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6화 (16/202)

# 16

8. 제주서천농원(2)

장규혁은 폐교 안으로 우릴 데려갔다.

여태까지 호러인 줄 알았는데 장규혁의 등장으로 스릴러로 장르가 바뀌었다. 언제라도 보호막을 꺼낼 수 있게 긴장하자.

그렇지만 생각과는 달리, 중앙현관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날 반긴 건 은은한 풀 향기였다.

낡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쓰러질 것 같았던 외관과는 달리 폐교 내부는 훨씬 깔끔했다. 건물이 낡아서 오래된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지만 새로 깐 듯한 마룻바닥이나 창가에 둔 산세베리아 화분은 장르를 스릴러에서 평범한 일상물로 바꾸기 충분했다.

더군다나 폐교 군데군데 장규혁이 들고 있는 이름 모를 꽃을 말린 것으로 보이는 뭉치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폐교를 가득 채우고 있는 풀 향기는 저 꽃더미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슬리퍼 꺼내 드려야 하는데……. 손이 이래서…….”

장규혁은 턱 끝으로 신발장을 가리켰다. 박서원은 익숙하게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 갈아 신었다. 나도 박서원을 따라 했다.

폐교에는 교실이 몇 개 없었고, 장규혁은 그중 하나로 들어갔다. 여기도 말린 꽃과 말라 가는 꽃들이 가득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응접실인지 교실 가운데에 푹신한 카펫과 테이블이 있었다.

장규혁은 테이블 위에 소쿠리를 내려놓고 앉았다. 장규혁을 졸졸 따라온 호랑이들이 장규혁의 무릎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그중 유일하게 덩치가 큰 호랑이는 그 다툼에 끼지 않고 장규혁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엎드렸다.

박서원이 장규혁의 앞에 앉고, 나도 눈치를 보다가 옆에 앉았다. 백호 한 마리는 박서원의 무릎을 차지했다. 그걸 보니 내 무릎도 좀 시린 것 같다. 산주인이고 호랑이고 무슨 상관인가. 어린 동물들은 다 귀여운 법이다. 나도 어릴 때 저만한 개를 키웠다.

“상황은요?”

“날이 많이 풀려서 걱정했는데 아직 괜찮습니다. 그래도 끽해야 2주쯤 남았습니다.”

장규혁은 손을 움직였다. 노란 이름 모를 꽃을 들고 잎사귀를 떼어 내고 줄기를 손질했다. 얼굴과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섬세한 손짓이다.

“아.”

장규혁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하면 생긴 걸로 편견을 가지고 싶진 않지만 정말 길에서 마주치면 20미터는 떨어져 걸을 만한 인상이다.

“손님 앉혀 두고 이러고 싶진 않은데 꽃이 너무 많이 펴서 쉴 수가 없군요. 지금도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이러다가 썩게 생겼습니다.”

“지원이라도 요청하지 그래요?”

“이미 했죠. 그런데 강원도 그 꼬맹이가 싹 다 끌고 갔다지 뭡니까. 이래서 육지 놈들이란…….”

“그새 제주도 사람 다 됐네요?”

“서원 씨도 여기 4년쯤 있어 보시죠. 제주도 사람 안 되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한 것 같다. 용기를 내자, 정해준.

“꽃 안 썩게 하는 게 제일 힘듭니다. 수확 시기 놓치면 바로 썩어 버리니, 솔직히 처리하는 건 괜찮은데 냄새 때문에…….”

“경찰에 신고당한 적 있었죠?”

“그때는 진짜…….”

장규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와중에도 꽃 손질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저기…….”

다행히 장규혁과 박서원은 내 존재를 완전히 잊진 않았는지 내 목소리에 반응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뭡니까?”

“그러고 보니 정해준 씨는 처음 보죠?”

“네?”

“이 꽃 말이에요. 시중에서는 생화로 안 나오니까요.”

“네?”

“농원 이름에서 짐작했으면 지금처럼 얼 나간 표정을 하진 않을 테고.”

박서원은 소쿠리 안에 있는 꽃을 하나 집어 흔들었다. 장난치는 줄 알았는지 박서원의 무릎에 있던 백호가 앞발로 흔들거리는 꽃을 잡으려고 했다.

“이게 살살이꽃이거든요.”

“네?”

“피부 재생시켜 주는 그거요. 이걸로 만든 연고는 나 같은 비상근무 초능력자들에게는 필수품이라고요. 이제 정해준 씨도 자주 쓰게 될걸요?”

“네?”

네? 귀신이 붙은 줄 알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할 말도 없다.

“당장 오늘이나……. 2주 뒤엔 이걸로 목욕하고 있을지도?”

“네?”

“여기 왜 왔냐고 물었죠? 저쪽 방향에 살살이꽃밭이 있거든요? 그리고 좀 더 가면 한라산이 있어요. 등산로에서 벗어나서 한참 들어가면 동굴이 하나 있는데…….”

박서원은 목소리를 깔며 실실 웃었다. 저 비죽거리는 입꼬리를 볼 때마다 박서원의 입을 한 대 칠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안에 겨울잠 자는 웅녀가 있어요.”

“네?”

“올해 깨어날 거라고 하던데요.”

“네????”

진짜 어쩔 수 없다. 포기하고 이번 생은 네? 귀신이 되도록 하자.

* * *

서천꽃밭은 저승에 있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는 그렇다. 이곳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천꽃밭에 있다는 꽃들이 이승에 있는 건 확실하다. 장규혁이 손질하는 노란 꽃이 살을 재생시킨다는 살살이꽃이란 걸 보면.

장규혁이 말하길, 뼈살이꽃은 강원도에 꽃밭이 있고, 피살이꽃은 각 지역의 혈액관리원에서 하우스 농사를 한다고 했다. 수혈팩 만들기에 좋다나 뭐라나. 고려나 조선 시대 때는 감정과 관련된 꽃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 멸종되었다고 한다.

박서원과 장규혁의 설명, 그리고 현대 최고의 문명인 휴대폰으로 검색한 걸 조합해 보니 대충 그렇다. 꽃 몇 송이에 인간의 생로병사와 감정이 좌지우지된다니.

역시 이곳의 역사는 너무……. 이해하기 어렵다. 드라마라서 그렇겠지.

“여기가 살살이꽃밭입니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겨울나무 사이로 노란 꽃들이 흔들렸다.

사실 꽃밭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했다. 제대로 공간을 만든 건 아니었고, 우거진 나무 사이에 노란 꽃이 자생하고 있다에 가까웠다. 이렇게 대충 키우는데 왜 일반인들이 모른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한라산에 가까워서 그런가? 아니면 드라마라서?

정해영은 늘 드라마에서 현실을 찾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엔 시험 공부하기 싫어서 개소리를 지껄인 거긴 한데,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드라마가 현실이 된 경우에는 어디까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이 의문에 답을 내기 전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새끼 호랑이들은 꽃밭에 도착하자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꽃밭을 뒹굴거리는 새끼 호랑이들의 모습은 그냥 강아지 같았다. 그나마 덩치가 좀 큰 놈만이 도도한 얼굴로 장규혁의 옆에 앉아 꼬리만 살랑거렸다. 어떤 의미로는 걔도 개 같긴 했다. 셰퍼드나 도베르만 같은 종류의.

그리고 장래의 산주인들의 돌봄 담당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강아지 다섯 마리의 주인인 장규혁은 피로에 지친 얼굴로 호랑이들을 불렀다.

“안 돼! 물어뜯지 마! 먹지 마! 파헤치지 마!”

그 꼴을 보며 박서원은 내게 속삭였다.

“여긴 서천농원 제주지부고, 저 사람은 담당자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저래요.”

그래서 충청도 사람이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 와서 4년째 꽃밭을 관리하고 있고, 작년부터 어린 산주인마저 돌보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불쌍한 중간관리직이여.

“황삼아!!”

묵직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하던 게 거짓말인 양 장규혁은 다급하게 외쳤다.

외치기만 한 건 아니고, 몸까지 던져서 꽃 이파리를 물어뜯고 있는 호랑이를 저지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해! 먹지 마! 생으로 먹으면 탈 난다고!!”

그러나 호랑이는 세 마리가 더 있었다.

“황이야! 아니, 백일아, 너는 또 왜 그래.”

장규혁의 입에서 나온 호랑이들의 애칭 혹은 태명을 듣고 있으니 짐작 가는 게 생겼다. 나는 눈을 한 바퀴 굴려 저 난장판에 끼지 않고 있는 유일한 호랑이를 보았다.

“……얘는 황일입니까?”

“네.”

황일, 황이, 황삼. 백일, 백이.

……미래의 대한민국 산주인이시라는데, 이름은 시골집 똥개다.

어쨌든 꽃밭에서 때아닌 숨바꼭질을 즐기시는 호랑이와 보모를 보니 조금 서글퍼졌다. 장규혁이 월급쟁이였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 건 아니다.

“박서원 씨 능력으로는 어떻게 안 됩니까?”

“제 능력은 숨이 붙어 있는 생물에게는 안 듣거든요.”

박서원은 장규혁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사람도 참 미련하다니까.”

박서원은 한숨을 푹 쉬고 장규혁을 불렀다.

“규혁 씨, 갑시다.”

“헉… 헉……. 네…….”

양옆에 호랑이 두 마리를 끼고 장규혁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길을 벗어난 백호 한 마리는 제 세상을 만났는지 꽃을 뿌리째 뽑아 입에 물고 있었다. 장규혁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렇지만 호랑이들은 장규혁을 좋아했다. 장규혁이 움직이자 호랑이들은 어린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왔다. 아까 장규혁이 왜 호랑이를 잡느라 고생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움직이면 될 일 아니었나……?

하긴 애완동물이랑 괜히 놀아 주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 장규혁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견주다.

* * *

꽃밭을 지나 길도 없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겨울이 끝나고 해가 길어졌다고는 해도 아직 겨울이고, 우거진 나무속을 걷고 있으니 묘하게 등 뒤가 서늘해졌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제주도를 와 본 건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제주도에 이런 곳이 었었나……?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이기지 못하고 박서원에게 물었다. 장규혁도 생긴 게 무서워서 그렇지 대답하면 잘 해 주지만 그쪽은 지금 호랑이를 돌보느라 바빴다.

“겨울잠은 무슨 소리입니까?”

차마 웅녀라는 소리는 못했다.

웅녀라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게 고조선 건국 신화, 즉 단군신화이다. 호랑이와 곰이 인간이 되고 싶어 동굴에서 마늘과 쑥과 여차저차. 결국 시련을 이겨 내고 인간이 된 건 곰이었고, 곰은 웅녀라 불리며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약 반만년 전의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은 서기 2019년. 웅녀가 나오기에는 5000년이나 늦다.

“웅녀라는 건 사실 농담이고, 곰이긴 해요. 몇 년산인지는 모르겠는데, 최소 200살 정도.”

다른 건 모르겠지만 곰치고 오래 살았다는 건 알겠다.

“왜 반달가슴곰이 제주도에 와서 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물이 100년 이상 묵으면 꽤 위험하거든요.”

“발견된 건 10년 전인데, 최근 징조가 심상치 않아서 올봄에 깨어날 거라고 예상합니다. 곰 영물이 유순하면 다행인데, 보통 봄철의 곰은 예민해서…….”

장규혁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날이 따뜻해지면서 내가 매주 내려와서 살펴보고 있는 거예요.”

곰이 발견된 곳이 살살이꽃밭과 가까워서 더 난리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살살이꽃밭이 여기뿐이라서.

조금 전 보았던 노란 꽃밭은 곰이 깨어나서 활동을 개시했을 때, 제일 먼저 엉망이 될 곳이었다. 살을 재생하는 꽃은 그 자체로도 영기를 지니고 있었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곰이 허기를 채우는 데에 그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말이 통한다면 말로 물러나게 하고, 그게 아니라면…….

“그런 위험한 작업에 나는 왜……!”

혹시 잊었을까 하는 얘기지만 나는 초능력을 제대로 쓰기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되었다. 내 초능력 면허증의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

“정해준 씨 능력이 도움이 되니까요.”

“저 능력 각성한 지 며칠째 인지는 박서원 씨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 능력 가지고 싸우란 말 안 해요.”

박서원이 멈췄다. 시선이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린 산주인들이 장규혁의 다리 뒤에 서서 으르렁거렸다. 수풀과 안개 속에서, 동굴이 보였다. 입구에는 검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정해준 씨 능력은 보호잖아요? 그건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일종의 차단막이기도 하죠.”

박서원은 내 능력을 직접 훈련시켰다. 아직 박서원의 마음에 찰 정도는 아니지만 박서원이 내 능력을 뜯어볼 시간은 충분했다. 박서원은 고등학교 때 각성해서 십 년 넘게 활동했고, 요 몇 년간은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이기도 했다. 나보다도 내 능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에서 끼치는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아요. 외부에 있는 사람도 내부에서 끼치는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죠.”

박서원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풀어 설명했다. 장규혁은 이미 들었던 내용인지 귀를 기울이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정해준 씨가 할 일은 곰이 깨어날 때, 외부에 영향을 끼치지 않게 보호막을 치는 겁니다. 대화를 시도할 시간을 버는 거죠.”

하지만 나는 그 작전의 맹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보호막은 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요?”

박서원은 평소답지 않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분리 훈련 성공시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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