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8. 제주서천농원(1)
“이거요?”
박서원은 귀찮은 얼굴로 비상근무 초능력자들의 필수 아이템들에 대해 설명했다.
“비상근무 뛰는 초능력자들은 입죠. 디자인이야 자기 마음대로 하지만…….”
“전부 입는다고요?”
“기본적으로는요. 필수는 아닌데, 편의성 때문에 입죠. 방열도 좋고, 이런저런 방어주술을 걸어 놓기 편하니까요. 겨울에는 많이 입죠.”
레이싱 슈트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부가기능이 많은 모양이다.
“방어주술이라고요?”
“초능력과 주술은 다른 영역이니까요. 요괴들 중에는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그런 쪽으로 공격하는 놈들도 있어요. 그래서 보통은 부적이나 액막이를 챙기고 다녀요. 집에도 두고.”
박서원은 현관문 안쪽에 붙어 있는 부적을 가리켰다. 입춘대길 같은 건 줄 알았는데 다른 의미도 있었나 보네. 답지 않게 인테리어를 해 놨다고 생각한 거실 벽에 걸린 드림캐처도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방열만 됩니까? 방한은 안 돼요?”
“그것도 기본적인 수준은 되죠. 겨울에 입을 정도는 됩니다.”
“……그 이상으로는요?”
“우리나라에는 얼음을 내뱉는 놈들보다 불을 뱉는 놈들이 더 많거든요.”
현실적인 이유라는 거지.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 쓰는 초능력자들이 훨씬 많고요. 그 사람들이랑 팀업하려면 방열 슈트는 필수죠.”
역시 판타지는 없다. 드라마면 대충 타협해도 괜찮지 않아? 왜 쓸데없는 부분에서 현실을 찾고 그래?
“그럼 저도 필요하다는 거죠? 어디서 구합니까?”
“정부사업이에요. 회사에서 곧 연락 올 테니까 그때 알아서 하고…….”
박서원은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일단 나랑 제주도 좀 가죠.”
네?
* * *
드라마 속에 들어온 이후로 그렇지 않은 적이 없긴 하다마는, 이번에도 모든 일은 폭풍처럼 몰아쳤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김포 공항에 있었고, 한 번 더 감았다 뜨니 하늘 위에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더니.
휘이잉…….
제주 공항에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고, 초능력자 전용 슈트 대신 청바지에 코트, 모자와 선글라스를 낀 박서원은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보다는 연예인 같았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걸 피하려는 모양이지만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모았다.
“택시 타죠.”
어쨌든 날 데리고 온 건 박서원이었고, 불우한 하숙인은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그 집을 나오면 거부권이 생길까? 안 생기겠지.
“여기 이 주소로 가 주세요.”
박서원은 목적지를 말하는 대신 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불러 주었다. 더욱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박서원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제주도에 내려가는 건 알고 있다. 급한 일이 있다고도 했고. 갔다 올 때마다 그놈의 감귤 초콜릿을 던져 줬었다. 아마 오늘의 제주도행도 그 일이란 것과 관련이 있을 게 뻔했다.
문제는 이거다. 나는 왜 필요한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애초부터 박서원한테 내가 왜 필요한가?
내 보호막을 보고 같이 일하자고 한 건 박서원이긴 하다. 나는 거기에 어어 하다가 휘말렸고. 그렇지만 초능력 면허등록이 끝난 지금까지, 박서원은 자신에게 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애초에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박서원 집에 얹혀산다고는 해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적은 많지 않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더욱 하지 않았고. 그래도 박서원이 이유 없이 남에게 호의를 베풀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런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같이 일하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택시 안은 조용했다. 나와 박서원 사이에서도 대화가 없자 택시 기사도 별말 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 소리만 띠링띠링 울렸다.
“박서원 씨.”
택시에서 내리고 나서야 박서원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묻고 싶은 건 묻지 못했다.
“여기……. 들어와도 되는 곳입니까?”
택시에서 내린 곳이 예상치 못한 풍경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택시는 도로 한가운데서 멈췄다.
택시가 떠나고 나서야 박서원은 움직였다. 길에서 벗어나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이대로 따라가도 괜찮은지 궁금해졌다.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휴대폰으로 박서원과 함께 제주도에 왔다고 주위에 알려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조금 뒤 우리 앞에 쇠사슬에 매달린 출입금지 표지판이 나왔다. 정말 괜찮을까? 사유지라고 적힌 걸 보니 더 불안해졌다. 설마 박서원 땅인가? 하긴, 저 남자라면 그럴 수 있긴 하다.
“괜찮아요.”
박서원은 출입금지 표지판을 가뿐히 무시했다.
“뭐 해요?”
“……아, 아뇨.”
잡히거든 다 저놈이 시켰다고 해 버리자.
박서원을 따라 작은 흙길을 걸어갔다. 길이랍시고 나 있긴 하지만 잡초가 무성해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은 티가 확 났다. 5분쯤 걷자 나무표지판을 발견했다. 한 오 년 전만 해도 예쁜 색으로 곱게 칠했었을 나무표지판은 지금은 비와 바람에 쓸려 페인트가 반쯤 벗겨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뽐냈다.
제주서천농원.
……저승으로 끌려가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5분쯤 더 걷자 건물 하나가 나왔다. 1층짜리 가로로 긴 목조 건물이다. 아담한 크기에, 낡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최소한 양쪽으로 열게 되어 있는 커다란 문은 최근에 페인트칠을 했다.
건물 앞에 있는 너른 공터를 보자 대충 짐작이 갔다. 학교 건물이다. 옛날에는 학교로 쓰였을 게 분명한 건물이다.
“박서원 씨, 여긴 어딥니까?”
“오면서 간판 못 봤어요?”
그 공포영화에 나올 것 같은 표지판?
“농원……. 그거요?”
하지만 내가 아는 농원은 이런 분위기가 아닐 텐데.
관리 안 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공터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사람 손이 닿았다고는 해도 폐교 건물은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낡았다. 오히려 새로 페인트를 칠한 문이 위화감을 조성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괜히 그래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역시 공포영화 인트로에 나올 법한 분위기다.
그래도 한때 학교였던 흔적으로 건물 주위에는 돌로 만든 화단이 있었다. 조금 비긴 했지만 철쭉이 있는 걸 보면 봄에 꽃이 피긴 할 것 같다.
“어?”
그런데 그 듬성듬성한 철쭉 사이로 뭔가 움직였다. 새하얀……. 강아지 같은 거.
“캉!”
휙, 하고 그 허연 게 튀어나왔다. 검은 줄무늬도 본 것 같아서 눈을 비볐다. 박서원의 발치에 흰 개 같은…….
…….
호랑이 새끼가.
“크르릉.”
“야. 네 보모는 어디 있냐.”
박서원은 발등으로 호랑이 새끼를 툭툭 치며 물었다. 새하얀 털을 가진 호랑이 새끼는 박서원의 발을 껴안고 깨물다가 몸을 일으켰다. 크르릉, 하는 게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박서원의 다리 사이를 돌아다니며 친근함을 보였다.
“저……. 이건?”
“백호죠.”
“아니, 그건 보면 아는데…….”
백호는 내게도 관심을 보였다. 내 발치로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던 새끼 백호는 에칭, 작게 기침을 하더니 앞발로 내 발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게, 지금?
“정해준 씨한테 냄새나나 봐요.”
“……그래서 얜 뭡니까?”
내가 아무리 드라마 물정에 어두워도 백호 새끼가 폐교에 돌아다니는 게 정상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박서원은 발로 백호를 툭툭 건들며 말했다. 백호는 박서원의 발을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이름은 없고, 편의상 백이라고 불러요.”
“백이요? 이름 참…….”
“편의상 붙인 거라니까요. 애칭…… 보다는 태명 같은 거죠. 인간이 산주인한테 이름을 붙일 순 없으니까요.”
“산……. 네?”
박서원이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일제 때 일본이 우리나라 영물들 찾아내서 죽였잖아요. 그때 영물들을 지킨다고 산주인들이 나섰거든요. 그때 많이 당했어요.”
이 드라마의 설정이 어디까지 되어 있는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일제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가상세계 같은 건가 보다. 뭐, 초능력이 있는 세상……. 이런 거.
“터줏대감들이 사냥……. 살해당하면서 아직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새끼들도 많이 죽었어요. 그래도 살아남은 애들이 있긴 한데.”
“그게 얘다……?”
“어리고 교육받지 못해서 산주인보다는 아직 짐승 새끼에 가깝죠. 부모 없이 숨어 다녔어야 하니까. 독립군이 업어 키운 애도 있는데 걘 그나마 양호했고.”
크르릉…….
주위로 낮은 울음소리가 울렸다. 강아지가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위엄은 없었지만 개의 그건 아니었다. 백이와 비슷한 크기의 호랑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이 같은 백호가 하나 더 있고, 보통 호랑이처럼 붉은 기가 도는 황색 털을 가진 놈이 둘 있었다.
“여긴 낙오되었던 어린 산주인들을 보호하는 곳이에요. 아, 뭐……. 원래 하던 일은 그게 아니긴 한데, 겸사겸사.”
새끼 호랑이들은 박서원에게 비비적거리거나 자기들끼리 깨물고 뒹굴었다. 갑자기 골이 아팠다.
“몇 년을 고양이와 강아지랑 같이 둬서 그런지 이게 고양이인지 개인지 호랑이인지 구분이 잘 안 가긴 하지만…….”
고양이든 개든 호랑이는 호랑이다.
“산주인……. 이든 아니든, 호랑이를 그냥 풀어놓고 키워도 되는 거예요?”
새끼 호랑이 두어 마리가 내게도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죄다 처음의 백이처럼 내 냄새를 맡더니 흙을 덮었다. 이 새끼들이…….
“산주인이라 사람 잡아먹지 않으니까 걱정 마십쇼.”
그때, 등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말하는 낮은 목소리였다. 인기척이 없어 전혀 몰랐다.
“여기가 일반인한테 알려진 곳도 아니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꽃이 가득 든 소쿠리를 든 채 서 있었다. 남자의 발치에도 새끼 호랑이 하나가 있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덩치가 좀 더 컸다.
“서원 씨, 왔습니까.”
“이제 인사하기도 좀 그렇군요. 너무 자주 와서.”
“어쩌겠습니까. 그럼 이쪽은…….”
“전화로 얘기했던 정해준 씨입니다. 정해준 씨, 여긴 서천농원 관리인 장규혁 씨입니다.”
농원 관리인이라고 말해도 전혀 관리인 같지가 않다. 관자놀이 부근에 길게 난 흉터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남자에게 인사했다.
“정해준입니다.”
“장규혁입니다. 음……. 명함을 드려야 하는데, 손이 이래서.”
“아뇨, 괜찮습니다…….”
길에서 마주쳤다면 10미터 정도 피해서 지나갔을 인상의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꽃이 담긴 소쿠리에도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올해는 비가 많이 안 와서 꽃 잘 폈겠네요.”
그러나 박서원이 콕 집어 이야기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옅은 노란색 꽃잎을 가진 꽃은 유채꽃인가 싶었지만 생긴 게 달랐고, 시기도 달랐다. 장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합니다.”
“그럼 세 개를 만들지요?”
설마 개그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박서원을 보았지만 장규혁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진짜 고민 중입니다. 그러면 후유증이 더 심할 것 같아 참고 있긴 한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한민국의 유머 기준이 바뀐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돌아 버렸거나.
“아,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정해준 씨한테 이야기는 하셨습니까?”
“하면 도망갈 것 같아서 그냥 끌고 왔죠.”
“잘하셨습니다.”
“……저기?”
지금이라도 주위에 연락해야겠다.
나, 정해준은 박서원과 함께 제주도에 있노라. 혹시 내가 돌아가지 못하거든 필히 경찰에 신고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