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7. 스폰서(2)
새날이 본래 내 세계에서 내가 합격한 무역회사였듯이, 단청도 휴대폰과 TV, 컴퓨터 등 전자기기를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새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기업이었다. 내가 쓰는 휴대폰이 단청에서 만든 제품일 정도로.
이곳에서도 단청은 그런 기업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세계는 날 방심하지 않게 했다.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 단청에서 만든 내 휴대폰으로 검색해 봤지만 딱히 초능력자와 관련된 말은 없었다. 여기서도 여전히 휴대폰을 만들고 있었다.
하긴 후원은 굳이 초능력자 관련 사업을 안 해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초능력자 관련 사업은 불법 아닌가? 새날에서 박서원 티셔츠를 파는 걸 보면 괜찮은 건가?
박서원은 단청 본사 1층 로비에서 삐뚜름하게 선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조금 작아서 그렇지 배우로서는 완벽한 얼굴을 가지고 있긴 했다. 여기서도 초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연예인으로 잘 먹고 잘살았을 거다.
“……이렇게 막 와도 되는 겁니까?”
내가 구직활동을 할 때 단청도 살펴보긴 했다. 이력서를 넣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살펴만 봤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라는데, 한 번 정도는 꿈꿀 만하지 않은가.
“이럴 때 와 봐야지 언제 와요? 정해준 씨 혼자 오면 입구에서 막히잖아요?”
너무 사실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드라마 작가 씨. 요즘에는 이런 캐릭터가 인기가 많습니까?
내가 뭐라 투덜거리던 박서원은 날 끌고 익숙하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들 박서원을 아는지 막지 않았다. 차라리 좀 막아 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박서원의 가슴팍에서는 단청 로고가 새날 바로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멋들어진 호랑이 말이다.
“…….”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도 박서원이 있었다. 최신 단청 휴대폰을 들고 있는…… 박서원이.
“왜요?”
“……아니, CF도 찍었구나 싶어서.”
“돈 받았으니 저 정도는 해 줘야죠.”
“그건, 네……. 그렇죠…….”
그러고 보니 원래 세계에서 집 앞에 있는 휴대폰 매장에 박서원이 찍은 광고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박서원……. 이라기보다는 박서원을 연기한 배우가 찍은 CF. 드라마와 현실이 너무 절묘하게 합쳐져 있어서 더욱더 내가 미친 기분이다. 역시 이곳이 현실일까?
‘내 새끼 얼굴만 뜯어먹어도 난 100년은 살 수 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럼 정해영이 지껄인 말들은 내 무의식의 발현이란 말인가?
‘눈초리가 살짝 올라가서 새치름하고, 목도 하얗고, 허리선은 또 얼마나…….’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건……. 절대……. 내가……. 정해영이 했다. 정해영이 지껄인 소리다.
기집애가 진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남자 얼굴에만 정신 팔려서!!
“……뭐 합니까?”
“번뇌를 내쫓는다고요.”
“들어서 흔들어 줘요?”
“그런 뇌가 나갈 것 같은 행동은 좋아하지 않아서요. 저 놀이기구도 안 탑니다.”
“인생의 낙이 없는 사람이네요, 정해준 씨.”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날으는 칼을 슈퍼보드처럼 타고 다니는 인간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 같은 소시민은 이게 정상이다.
등 뒤에서 휴대폰을 들고 있는 박서원이 있고, 앞에는 칼을 메고 있는 박서원이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박서원이 내 편의를 봐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처음은 적선이었을 거고, 지금은 필요에 따른 투자겠지만 내가 감지덕지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박서원을 보면 정해영이 떠오른다. 원수 같은 여동생이지만 그래도 내 여동생이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입술을 짓씹었다.
끝없이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 여기 드라마였지. 드라마에서 볼 법한 풍경이다.
“부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가 우리를 안내했다.
외관만큼은 미래도시 서울에 어울릴 법한 단청 본사였지만 내부는 고전적인 맛이 있었다. 회사 곳곳을 장식한 디스플레이는 또 21세기라서 이렇게 나무로 만든 두꺼운 문을 보면 되레 시대를 역행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박서원은 평소처럼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리며 웃었다. 한쪽 벽면은 전부 창이었다. 그 앞에 있는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아니, 잠깐만 이거. 너무…….
“나 아직 회장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 박서원 씨?”
그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모두 받으며 남자가 다가왔다. 역광 때문에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거 너무 드라마틱한 연출 아냐?! 저기요? 드라마 세계라고 해도 너무하시네요, 진짜!
“아직이면 말 다 했죠.”
“하하. 그런가?”
남자는 씩 웃으며 다가왔다. 햇살을 피해 남자가 다가오자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자, 잠까아안?!
“이쪽이 정해준 씨? 서원 씨에게 이야기는 들었는데. 보기 드문 능력자시라고?”
“네, 네……. 네…….”
“단청 부회장 구민석이네.”
“뭘 새삼스럽게 인사해요? 뉴스만 봐도 알 얼굴인데.”
뉴스에서 안 얼굴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는 얼굴이긴 했다.
“비즈니스에서는 자기소개가 중요한 법이야, 서원 씨.”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를 했다.
“네……. 그렇죠, 네…….”
아니, 미친, 왜 저 얼굴이 여기서 나와?! 여기가 강남 한복판이래도 하늘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욕을 퍼붓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대한민국 1위 기업이라는 단청의 부회장이라고 자길 소개한 남자는, 내가 아무리 영화와 드라마에 관심이 없어도 알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무려 국민배우 타이틀을 십 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얼굴이었으니까!
미친, 이런 배우가 왜 이런 케이블 드라마에 나와?! 요즘 케이블 드라마는 다 그래? 왜? 왜?!!
그리고 내가 아는 단청 부회장은 이 얼굴이 아니라고!!!
“단청에서 후원하는 초능력자가 몇 명인데 대충하죠.”
“정해준 씨가 보통 초능력자인가. 서원 씨 도와줄 사람인데 꼼꼼하게 살펴야지.”
“언제는 돈만 지원한다면서?”
정해영 님. 앞으로 착하게 살 테니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 주십쇼.
“언제 적 얘길 하는 건지……. 내가 돈만 주면 아쉬운 건 서원 씨일 텐데?”
제발요.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라면도 두 번쯤은 끓여 드릴게요.
“회장님은 안 아쉽고?”
“어허, 회장 아니라니까. 큰일 날 소리 하네.”
“진짜 회장님 살아는 있고요?”
“뉴스 안 봤나? 당연히 살아 있지.”
“난 또 머리털 뽑아서 가짜라도 만들어 놓은 줄 알았죠.”
“누굴 원숭이로 아나?”
라면에 계란도 넣어 드릴까요?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하겠습니까.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계약서나 주시죠. 아니, 무슨 계약을 회장이 직접 합니까?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아요?”
“부회장이라니까. 우리 회사 이름 달고 활동하는 친구들인데 내 눈으로 봐야지. 누굴 시켜? 서원 씨도 나랑 계약했잖아.”
“그때야 회장 아니었으니까요.”
“지금도 회장은 아냐.”
구민석은 방긋 웃었다. 국민배우다운 얼굴이다. 우리 엄마가 저 얼굴을 그렇게 좋아했다. 찍은 영화와 드라마를 모조리 다 챙겨 볼 만큼.
……아. 어쩐지 중간부터 정해영이랑 같이 그 빌어먹을 드라마를 본다 했지. 다 구민석이 나와서 그랬군.
단청 부회장이 된 국민배우 구민석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이돌 이유나와는 차원이 다른 부담감이다. 예쁘기는 이유나가 더 예쁘지만 이쪽은 어릴 때부터 TV 속에서 봤던 얼굴이다. 비현실감이 장난 아냐. 무섭다고…….
“원래는 이런저런 심사가 있지만 서원 씨가 직접 데리고 온 만큼 그건 모두 패스하도록 하겠네.”
이래서 사람들이 인맥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되네.”
이거 사기 아닌가? 구민석 얼굴로 저런 소리를 지껄이면 멍한 얼굴로 사인할 것 같다. 나 말고 정해영이.
“우리 쪽 요구사항은 별거 없어. 서원 씨처럼 슈트에 우리 로고가 들어가야 하고, 어디 가서 우리 회사 제품 욕만 안 하면 돼.”
“……그게 다입니까?”
“물론 우리 회사 제품을 써야지. 경쟁사 제품은 안 돼. 나가면 비서가 휴대폰이랑 이것저것 챙겨 줄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말하고.”
문득 박서원 집에 있는 TV를 떠올렸다. 단청 거였지, 그거…….
“서원 씨가 누굴 챙기는 건 처음이라 아마 꽤 주목받게 될 거야. 그걸 생각하면 사실 이건 싼값에 계약하는 거지.”
구민석의 손가락이 계약서에 있는 숫자를 톡톡 쳤다. 난생처음 보는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이게 싼 거라고?
“계약은 1년 단위야. 면허가 오늘 나왔다고? 내년 등급 갱신일이 재계약일이니까 확인하고. 일 년 사이에 유명해지고, 내년에 등급까지 오른다면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겠지.”
“아…….”
“그래서 서원 씨가 3년째 같은 조건으로 갱신하고 있거든.”
하하하.
구민석은 유쾌하게 웃었다. 자연히 박서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계약서에 장난질 치는 저급한 짓은 하지 않으니까 안심해도 좋아. 우리 단청은 초능력자들이 꿈꾸는 1순위 후원자거든. 그리고 서원 씨한테 밉보이면 그것대로 큰일이잖아? 최초로 11등급 올라가는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진 않거든.”
구민석은 박서원을 보며 샐샐 웃으며 말했다. 영화에서는 무게 있는 역을 많이 맡았는데 드라마에서는 이런 역할도 맡았구나 싶었다.
법에는 쥐톨만 한 지식도 없지만 세 장짜리 계약서는 빙빙 꼰 말 없이 간결했고, 박서원도 별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며 빨리 사인하라고 눈치를 줬다.
그쯤 되니 나도 될 대로 되라 싶었다. 눈앞에서 국민배우가 말하고 있는데 굳이 제정신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까지 이곳이 드라마 속이라고 말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 식구가 된 걸 환영하네, 해준 씨.”
구민석은 다시 내 손을 맞잡고 크게 흔들었다.
“앞으로 많은 활약 기대하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구민석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박서원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쯧쯧 찼다. 아마 저놈 성격에는 구민석 존재 자체가 싫은 모양이었다. 꽤 오래 본 사이 같았으니까.
“오래 봤냐고요?”
구민석의 비서가 챙겨 준 휴대폰과 블루투스 이어폰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아까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다.
박서원은 내 질문에 잠깐 셈을 하더니 대답했다.
“6년 정도? 김 아저씨보다 뒤에 알았으니까요.”
박서원이 초능력자가 된 건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새날 등급관리부서의 김태욱 차장이 박서원을 도왔다고 했다. 그때는 관리부서에 있었댔나.
“재수 없는 놈이니까 괜히 알려고 하지 마요. 사람 인생 하나 정도는 손쉽게 없앨 수 있는 놈이니까.”
역시 드라마 재벌은 남다르다. 그래도 무려 드라마 주인공의 입에서 나오는 평이니 새겨들을 만하다.
혹시 구민석이 서울 멸망의 뒷배경일까? 정해영이 얘기했던 드라마 내용 중에 주인공과 싸우는 흑막이 있긴 했다. 젠장, 정해영은 이름은 안 말하고 단어만 쓴 거야? 직관적이어도 너무 직관적이잖아.
……뻔하지. 이름을 말해도 내가 못 알아들었을 테니까.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