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7. 스폰서(1)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박서원이다. 그건 확실하다.
드라마 결말은 모르지만 그 직전에 최소 서울이 멸망하는 것도 확실하다.
주인공 빼고 다 죽는 것도 확실하다. 그래서 주인공 옆에 빌붙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 주인공의 성품…… 을 보고 고민을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 방법이 현재로서는 제일 생존방법이 높은 수단이기는 했다.
여의주나, 뭐 기타 소원을 이루어 주는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서도 주인공 옆에 있는 건 괜찮은 선택지기도 하고. 하멜른의 피리 사태를 보아라. 김태욱 차장이 박서원 이름을 팔아 뉴욕 박물관에서 대여를 해 왔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진이 잠들어 있는 요술램프가 우연찮게 손에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은가? 주인공 곁에 있다 보면!
정해영이 지껄이던 헛소리 사이를 떠올리며 드라마에 관한 정보를 추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이런 것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나마 합리화해야 했다.
“왜?”
내가 박서원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필요하니까.
“좀 더 열심히 해 보라니까요?”
박서원이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노력 몰라요, 노력? 의지를 가지고 해 보라고요.”
내 손에 칼이 있으면 찔러 죽였다.
그러나 칼을 들고 있는 건 박서원이었다. 정확히는 박서원의 능력이었다.
“다시 해 볼까요?”
박서원은 내 얼굴을 향해 똑바로 검을 날렸다. 다행히, 정말 다행스럽게도 계속 켜놓고 있던 보호막이 박서원의 검을 훌륭히 막아 냈다.
“날리는 건 그렇다 쳐도 제발 얼굴에는 날리지 말라니까요!”
박서원은 혀를 쯧쯧 차며 검을 회수해갔다.
“정해준 씨 너무 순진하네. 요괴가 공격할 때 여기로 들어갑니다, 친절하게 알려 줄 것 같아요? 다들 한 방을 노린다고요. 알겠어요?”
요괴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능력자의 덕목은 평정심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면 안 돼요.”
억 소리 나는 연봉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 알았다면 덜컥 손을 잡진 않았을 것이다.
“이도 저도 싫다면 빨리 분리에 성공하세요.”
그 말과 함께 박서원은 다시 검을 날렸다.
정해영아, 정해영아. 너는 도대체 저딴 놈을 왜 좋아한 거냐? 너의 취향을 이 오빠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 * *
이틀 뒤 박서원은 제주도로 향했다.
자유가 찾아왔다. 갑작스레 할 일이 없어졌다.
박서원은 나보고 계속 다른 장소에 보호막을 설치할 수 있도록 분리 훈련을 하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열심히 했다. 하루 정도는 휴식을 주어도 될 만큼 열심히 했다.
회사를 그만둔 것도 아니라 계속 나가겠다고 했었지만 그마저도 박서원이 막았던 탓에 회사를 나가는 것도 미묘해졌다. 아직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추정 등급 초능력자가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도 낭비라고 하고. 내 소속도 조만간 바뀔 거라고 했다. 그동안 등급산정부서에도 익숙해졌는데 아쉽게 되었다.
어쨌든 훈련할 마음도 없고 회사에도 나갈 수 없는 지금, 나는 우울한 백수와 다를 바 없는 꼴이 되었다. 정해영이 방긋 웃는 꼴이 생각났다. 걘 진짜 남자 보는 눈이 더럽게 없다.
호화스러운 방구석에서 한강뷰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답답한 마음에 결국 못 참고 집을 뛰쳐나왔다. 눈에 보이는 적당한 카페에서 음료수를 주문하고 몸을 돌았더니,
“어?”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을 낀 여자가 있었다.
“저기…….”
나도 모르게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여자는 화들짝 놀랐다.
“네, 네?”
“오늘 씨 맞죠? 특수과 수사관님.”
“어어, 어……?”
오늘은 눈을 깜빡였다. 날 기억 못 하는 게 분명하다.
“정해준입니다. 그, 가짜 복숭아…….”
“아! 아, 안녕하세요……. 제,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해서…….”
낯을 심하게 가리는 건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는지 오늘은 주문한 커피를 받아 내 앞에 앉았다. 나도 음료수를 받아왔다.
“혹시 제집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계신가요? 어디 물어보려고 해도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 어…….”
답답하기는 해도 기다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정해영의 중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자. 어디서 이상한 걸 보고 와서는 한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다니고 속삭이듯 얘기하고 다니던 그 시절을 말이다. 앞머리도 길러 눈을 가리고 다니던 걔 때문에 내 평생 쌓을 인내심은 그때 다 쌓았다. 그런 정해영에 비하면 오늘은 활발한 편이다.
“확… 인 작업은 됐…… 고요, 지금은… 정리 중…… 이에요…….”
“이상한 저주가 붙었을까 봐 확인한다고 그러셨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문제없었나요?”
“네, 네……. 저, 저희, 도 이런 일은 처음… 이라서……. 시, 시간이 오래, 걸, 걸렸어요……. 그래도… 다행히…… 크, 큰 문제는… 없… 었…….”
“그래요? 다행이군요. 혹시 제 물건 중에 망가지거나 한 게 있나요?”
“네?!”
오늘은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오늘이 내 말에 오해했을 것 같아서 난 다급히 말했다.
“손해 청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물건이 있어서, 그게 멀쩡하면 됐어요.”
“아…….”
오늘은 커피 잔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 실? 바깥… 방은…… 복숭아…… 가, 터져서…… 어쩔, 수 없이…… 엉망, 이긴 한데요…….”
그건 복숭아를 뒤집어쓴 내가 더 잘 안다. 오늘도 그 처참한 몰골을 함께 한 동지 아닌 동지였고.
“안쪽… 방은, 크, 게, 건들지 않아서……. 멀… 쩡해요…….”
오늘은 어쩐지 내 눈치를 봤다.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물건이 멀쩡하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다.
“그럼 언제쯤 끝날까요? 지금 아는 사람 집에 신세 지고 있긴 한데, 역시 집이 최고더라고요.”
“아, 그, 그…….”
“네?”
“그… 3월…… 초에는… 될……. 되지, 않을까요……?”
“3월이요?”
그때 한 달쯤은 걸린다고 들었으니 대충 예상했던 날짜긴 했다. 빨리 처리해 달라고 강짜라도 부려볼까 했지만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랬겠지. 공무원인 사촌 형이 주민센터에서 민원처리하면서 죽어 나가는 꼴을 본 이후로 공무원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새날에서 일하다 보니 알게 된 건데, 초능력자 관련 일을 하다 보면 정부와 부딪칠 일이 많았다. 괜히 공무원들 사이에 그 회사 직원 안 되겠더라, 하는 소문이 돌 바에는 시간이 걸려도 친절하게 보이는 게 낫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네요. 바쁘실 텐데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수사관님.”
“아, 아뇨! 아니… 아뇨……. 괜, 찮… 아요…….”
오늘은 안경 너머로 살짝 웃었다.
“저… 저도, 일, 하기 싫어서……. 땡땡이…… 치던 거라…….”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 정해준, 씨는… 새날… 에서, 일하시지 않으셨? 어요……?”
“네, 새날에서 일하는데 저, 그, 얼마 전에 각성해서요. 지금 등급 테스트받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각성, 이요?”
“사무직으로 계속 있으려고 했는데, 특수 능력 쪽이라 아깝다고 해서요.”
굳이 박서원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대뜸 세계구급 초능력자 이름이 나오면 후광에 기대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없어 보인다고.
“그래서 어,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긴 한데…….”
박서원이 내 얼굴을 향해 검을 날리지만 않았더라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을 테다.
“어쨌든 앞으로는 사무원이 아니라 초능력자로……. 하하, 네.”
오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초능력자란 소리가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긴 나도 믿기지가 않는데.
오늘은 입을 뻐끔거리더니 급하게 가방을 뒤졌다. 뭔가 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오늘이 자기 명함을 내밀었다.
“그, 따로… 그, 뭐, 받는 건 불… 법이지만……. 부탁! 아는, 아는 사이라면, 그, 되, 거든요? 그, 그러니까…… 혹시… 필요하면…….”
“자문이요?”
“그… 뇌물이나…… 대가성… 부탁은… 안 되지만……. 아는… 사이에, 부탁 정도는…….”
뇌물이라니.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꺼낸다, 이 여자는.
“주술, 같은… 그런…….”
“아, 혹시 사건 같은 게 일어나면 알려 달라는 건가요?”
더듬거리면서도 어쩐지 절박한 어조라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오늘의 명함을 받았다. 딱딱해 보이는 정부기관명 아래로 오늘, 수사관 이름이 보였다. 휴대폰 번호까지.
어쨌든 명함까지 따로 준 걸 보면 날 나쁘게 보진 않는 듯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웃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 초능력자 면허증이 나왔다.
* * *
“박서원이랑 안 친하다며?”
김석준은 내게 밀봉된 서류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봉투에는 붉게 본인 외 개봉금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내가 멀뚱히 보고 있자 김석준이 재차 내밀며 초능력자 면허증이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얘 초능력자관리부서였지…….
“안 친해.”
면허가 나왔다고 어떻게 줄까 연락이 왔기에 박서원 집 주소 부르는 것도 웃겨서 회사로 오겠다고 했더니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도대체 왜 다들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나는 박서원과 친해지고 싶지 않다. 박서원의 성품 문제도 있지만, 걔를 보면 정해영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내 새끼 너무 잘생겼어!!!’
‘내 새끼는 이슬만 먹고 사는 걸까?!’
‘내 새끼는 숨만 쉬어도 완벽해!!!’
……자고로 여동생은 오래된 원수인 법이다.
“박서원이랑 같이 일한다면서? 그래도 안 친하다고?”
“내 능력이 필요한가 봐.”
“보호? 하긴, 잘 없는 능력이니까……. 우리나라에 너 말고 한 명인가 있을걸?”
“……그 정도로 작아?”
“전 세계로 따져도 세 자릿수가 안 될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희소성 높은 능력이었다.
봉투를 열자 책자 하나와 카드 하나가 나왔다. 책자는 초능력자들의 혜택과 의무, 정기점검 등에 대한 안내사항이 적혀 있었고, 카드는…….
[정해준(921102-1******)]
[K-SNA-317425c883ae9]
[5.8급]
연수 때 보았던 백성찬의 면허와는 달리 메인과 서브가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김석준이 내 면허를 슬쩍 보더니 감탄했다.
“분리 안 된 건 나도 처음 봐. 특수 능력자들 면허는 뭔가 허전하네.”
……그런 이유였군.
“그래서, 스폰서는? 박서원과 같이 움직이면 이제 막 각성한 애라고 해도 스폰서 괜찮게 붙을 텐데. 부럽다.”
박서원이 내 귀에 속삭였던 숫자가 떠올랐다. 혹하는 숫자긴 한데, 역시 이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해가 안 된다.
초능력자는 아무리 봐도 공무원 취급인데, 회사 소속이라 하고. 거기다가 스폰서도 따로 있다니. 드라마 작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게임도 아닌데 이런 설정을 넣은 걸까.
“잘 모르겠는데…….”
“박서원이 취향이 고상해서 스폰서를 적게 받은 거긴 한데, 그래서 도리어 몸값이 비싸졌다던데? 하긴 세계적으로 유명하니까 홍보 효과는 탁월하긴 하지.”
“몸값이 비싸졌다고?”
“아, 이거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긴 한데……. 박서원 슈트가 검은색이잖아? 처음 스폰서 받을 때 난잡한 거 싫다고……. 촌스럽게 회사 로고 들어간 건 다 까 버렸데. 그래서 그럴싸해 보이는 로고를 가진 회사만 남았다더라.”
박서원답다.
박서원의 슈트를 떠올렸다. 제일 위에 있는 건 새날.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은 전부 유명 회사의 로고였지만 회사 이름이 적혀 있진 않았다.
“그런데 박서원이 유명해졌잖아? 그래서 회사들이 자기들 로고까지 바꾸면서 박서원 슈트에 자기네 로고 박겠다고 난리 쳤는데 기존 회사들이 추가로 받지 말라고 몸값을 와장창 올려줬다고 하더라.”
“그래서 몸값이…….”
“뭐? 너 박서원 몸값 알아? 얼마야? 걔 연봉이 업계 최고 미스터리잖아. 모두 추정만 하지 알려진 게 없어서.”
이 녀석이 이렇게 가십거리를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고로 연봉에 대해서는 가족한테도 말하지 않는 법이다. 박서원이 내게 알려 준 걸 보면 본인은 별생각 없어 보이지만 괜히 돈을 들먹였다가는 좋은 꼴 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때마침 휴대폰이 울리기도 했고.
김석준은 내 액정 위로 뜬 박서원 이름을 보고 숨을 멈췄다.
“여보세요?”
“오늘 면허 나왔죠? 그럼 단청 본사로 와요. 회사에서 안 머니까 금방 올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전자회사 이름이 나왔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름이지만 박서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거기가 약속장소라면 더더욱.
“거긴 왜요?”
박서원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정해준 씨, 스폰 받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