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2화 (12/202)

# 12

6. 지피지기(3)

삶이란 본래 뜻대로 되는 법이 없다.

회사에서 가짜 복숭아를 주는 바람에 졸지에 집에서 쫓겨난 것도 서러운데, 위로금 명목으로 받은 복숭아를 먹었더니 매일 아침 손이 빛나게 되었다. 복숭아는 다시 먹으래도 다시 먹을 만큼 맛있었지만 이 상황을 바란 적은 없다.

반짝거리는 손을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기필코 이 빌어먹을 드라마를 빠져나가 주마!

* * *

박서원은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불꽃 같은 임팩트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했다.

박서원의 발끝이 검 위에 닿았다. 허공에 떠 있는 검은 박서원의 무게를 온전히 지탱했다. 균형을 잃고 그대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보는 사람의 기분일 뿐, 박서원은 검 위에 우뚝 서서 이쪽을 보았다.

“보기 힘든 능력이네.”

박서원의 손짓에 따라 검이 떠올랐다. 밟고 있는 검 하나, 놈의 어깨에 박혀 있는 검 하나를 제외하고 남은 검이 움직였다. 저래서 박서원이 검을 바리바리 들고 다니는구나. 난 또…….

박서원은 검을 날리기 전 나를 향해 말했다.

“그거, 제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네?”

세 자루의 검이 마구잡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쳐냈다. 튕겨진 검은 빙그르르 날아가다가 박서원의 손짓에 따라 다시 움직였다. 그 와중에 몇 번 흰 막을 두드리는 바람에 기겁했다. 놈이 부순 콘크리트 조각이 날아오기도 했다.

둥그스름한 하얀 막에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표정이 이상했는지 슬그머니 다가온 이유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해준 씨?”

“아직은 견딜 만한데…….”

“그, 그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해준 씨 초능력자였어요?!!”

“아뇨?”

이유나는 멍청한 얼굴을 했다. 3년 차 아이돌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면 드라마에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정신 차렸다. 그나마 좋은 점이 그것뿐이다.

“그럼 이거 뭐예요?!!”

“그러게요?!”

희게 빛나는 손을 보며 이유나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안 박서원은 상황을 끝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왜 저 남자가 인기가 많은지는 알겠다. 능력부터가 사기지 않은가.

박서원은 늘 검을 뭉텅이로 들고 다녔다. 왜 집에 그렇게 검을 쌓아 뒀는지 알겠다. 박서원에게 검은 일회용이었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하늘을 날아다니던 박서원의 검은 놈을 반쯤 난도질한 뒤에 멈췄다. 그 과정에 검은 가로등과 건물, 바닥을 긁었다. 날이 빠지면 날이 빠지는 대로, 부러지면 부러지는 대로 박서원은 검을 움직였다.

박서원은 여전히 검을 딛고 하늘에 서 있었다. 놈이 발악할 기운도 없이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쉬자 그제야 자신이 올라탄 검을 움직였다.

박서원은 검에서 내려섰다. 쓰러진 놈의 몸 위에 내려와 웃음기 한 톨 없는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박서원의 마지막 검이 천천히 움직였다. 수직으로 선 검이 놈의 정수리를 갈랐다.

“흐억.”

그리고 난 토할 것 같은 속을 부여잡았다. 전등처럼 빛나던 손이 얌전해졌다. 동시에 우릴 감싸고 있던 흰 막도 사라졌다.

삐용삐용.

멀리서 구급차와 경찰서 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끝인가? 빌어먹을 드라마. 빌어먹을 정해영.

박서원은 우리에게 걸어왔다.

아니, 내게 걸어왔다.

박서원은 평소처럼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린 채 말했다.

“이봐요, 정해준 씨. 나랑 일할 생각 없어요?”

* * *

나는 원래 초능력자가 아니었고,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능력자가 되었다.

그 말은 즉, 등급 테스트를 받고 초능력자로 등록해야 한다는 말이다.

“천도를 먹었더니 손이 빛나게 됐다고요?”

동거인인지 집주인인지 모를 박서원은 복숭아를 욕하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게 대단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없던 능력을 만들어 주진 않아요. 능력을 깨우치는 데 조금 도움은 줬을 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이 흰 손은 원래 내 능력이라는 말이다.

“이런 능력은 등급 판정이 까다로워요.”

이 대리는 내 담당이 되었다. 등급 테스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 이런 케이스는 외국에만 있는 줄 알았어요.”

보기 드문 케이스다 보니 아직 신입 딱지를 붙이고 있는 이유나도 따라왔다. 보고 배우라는 의미에서다.

“꼭 그런 건 아니죠. 북천의 손요운 몰라요? 그 사람도 비슷한 케이스예요. 그쪽은 육체 강화지만.”

“아, 들었어요. 요즘 엄청 주가 올리고 있다면서요?”

“육체 강화는 초반이 힘들어서 그렇지 성장률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작년만 해도 3등급이었는데 벌써 7등급이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손요운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센터에는 몇 명 있죠.”

“보기 드문 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해준 씨는 육체 강화 쪽은 아니잖아요?”

이 대리는 발광하는 내 손을 보았다. 빛나는 손에 맞추어 나를 중심으로 하얀 막이 생겼다.

며칠 전 고깃집에서 하얀 보호막을 펼친 이후로 그럭저럭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더 보기 드문 능력이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건 판정도 힘들거든요……. 사례가 적어서.”

이 대리는 손에 든 파일을 훑어보다가 경쾌하게 말했다.

“물론 우리 새날에는 이에 따른 대책도 당연히 있으니 걱정할 건 없습니다!”

“와아!”

이유나는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지금 짜고 치는 거지? 무슨 짓을 하려고?

“무려…….”

이유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며 북소리를 흉내 냈다.

두두두두두두……. 얼씨구.

“박서원 씨가 직접 테스트를 도와준다고 했으니까요!”

“인력 낭비 아닙니까?!”

“새날은 초능력자의 의사를 중요히 여기며 자발적인 도움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 멘트 항상 생각하는데 구려요.”

“그건 사장님께 얘기하세요.”

멘트는 둘째 치고 박서원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없다. 그 남자의 사고방식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서다.

적선하듯 자기 집 빈방을 준 건 그렇다 치자. 사실 이건 좀 고맙긴 했다. 사인을 해 주겠다니 사진을 찍어 주겠다니 비웃는 것도 그렇다 치자. 물론 이건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하다못해 같이 일하자고? 제정신인가?

내 테스트를 박서원이 도와준다고 해서 테스트 일정마저도 박서원 스케줄 맞춤이 되었다. 급한 일이 있다며 이틀 전에 제주도에 간 그 박서원 스케줄 말이다. 아니 그럴 거면 왜 도와준다고 한 거야? 그냥 예정대로 진행했으면 진작 끝났을 텐데.

“아, 서원 씨 근처에 도착했대요. 우리도 이동하죠.”

탕비실에서 믹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이 대리가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테스트는 어디서 하는 거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해요.”

“운동…… 장이요?”

“실내에서 하면 만약의 일이 일어나면 대형사고로 번지기 쉽잖아요. 해준 씨 같은 특수능력이면 더 그렇고요.”

일하면서 보았던 테스트 영상들을 떠올렸다. 비행 능력이면 비행 가능 높이나 중량으로 등급을 나눌 수 있지만 백성찬같이 공격성이 짙은 능력은 그러기도 힘들다. 보통은 아무 장애가 없는 넓은 공터에서 테스트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그런 공터를 찾기는 힘들다. 특히 도시 한가운데서는.

등급이 높은 초능력자라면 전용 테스트 장소로 이동하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는 초능력자는 이렇게 주위 학교의 운동장을 사용하곤 한다.

“뜸 들일 건 없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뒤라 초등학교는 적막했다. 테스트가 있을 예정이라고 주위도 모두 통제되었다.

“바로 시작할까요?”

운동장에는 이미 박서원이 도착해 있었다. 박서원의 발치에는 그가 늘 등에 메고 다니는 검들이 주르륵 놓여 있었다. 총 네 자루다.

“카메라 설치했습니다!”

이 대리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나만 빼고 다 즐거워 보였다. 나는 서둘러 팔을 휘저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만!”

“그런 건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어요.”

“어, 어떻게 테스트를 할 건지도 못 들었습니다만?!”

박서원은 씩 웃으며 발을 움직였다. 쭉 늘어놓은 검을 훑듯 발로 선을 긋자 검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3급 정도 되는 세기로 날릴게요. 막아 보세요.”

“자, 잠깐?!”

내가 제대로 된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박서원의 검이 날아왔다.

역시 인간의 감은 무시할 게 못 된다. 서둘러 내 목숨 줄이라 할 수 있는 보호막을 펼치며 생각했다.

박서원은 사이코패스다.

* * *

“역시 나랑 일하죠.”

운동장에 뻗어 있는 날 내려다보며 박서원이 말했다.

……재수 없는 면상. 저 얼굴을 한 대 때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6등급 정도까지는 대충 막을 수 있고…… 솔직히 말해서 이것만으로도 괜찮거든요? 그런데 각성한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요? 조금만 훈련하면 더 높은 등급도 노려볼 만해요.”

“제 의사는요?”

“그건 모르겠고요.”

씨발.

“연구할 재미가 있는 능력이에요. 단순 공격을 막는 걸로도 꽤 구미가 당기는데……. 보호막이 반구인지 완전한 원형인지, 인식한 범위 내에서만 펼쳐지는지……. 아니, 그 전에 보호막이 어딜 기준으로 펼쳐지는 것부터…….”

박서원의 눈빛이 오싹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박서원에게서 멀어지고 싶은데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다. 저 눈, 완전히 맛 갔지 않아?

다행스럽게도 박서원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이유나가 다가왔다. 이유나는 언제 준비했는지 이온 음료를 내게 주었다.

“이 대리님 말로는 5등급까지는 바로 나올 거래요. 축하드려요. 보니까 6등급까진 금방 올리겠어요.”

그게 정말 축하할 일인가. 모르겠다. 이 동네의 규칙 따위 알게 뭐냐…….

“5등급이 사무직으로 일하는 건 아까운데.”

“걱정 마세요. 정해준 씨는 나랑 같이 일할 거니까.”

“진짜요? 우와, 해준 씨 완전 성공했네!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일하게 되다니.”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정정은 해야 했다.

“여동생이 좋아한다니까요.”

나는 이온 음료를 깨끗하게 비웠다.

다르게 생각해 보자. 이 능력을 어디다 써먹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언젠가 멸망한다. 최소한 서울은 그렇다. 그 전까지 이곳을 탈출하는 게 목표지만 만약 그때까지도 못 하게 된다면? 이게 내 구명줄이 되어 주진 않을까?

“여동생이든 어쨌든 같이 일하는 거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전 책상에 앉아 있는 쪽이 더 좋은데요.”

박서원과 함께 일하라니. 무슨 미친 소리인가?

“정해준 씨.”

박서원은 싱긋 웃었다. 정해영이 좋아할 법한 미소다.

“이거 보여요?”

박서원은 자기 가슴을 툭툭 쳤다.

박서원은 평소처럼 검은색 레이싱 슈트와 무스탕을 입고 있었다. 레이싱 슈트의 가슴 쪽에는 여러 마크가 붙어 있었다. 내가 아는 무늬다. 새날 로고가 제일 위에 있었고 그 아래에 있는 로고들도 아, 하면 아! 할 만큼 유명한 회사들이었다.

“등급 높은 초능력자들에게는 따로 스폰서가 붙거든요. 센터랑은 별개로. 정해준 씨, 내가 일 년에 얼마 받는지 말해 줄까요?”

박서원은 내 귀에 속삭였다. 이유나가 궁금했는지 눈을 빛냈지만 박서원이 속삭인 숫자는 내 귀에만 들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박서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초능력자로 뛰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는 금전에 약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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