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6. 지피지기(2)
“해준 씨!”
“왜, 왜요?”
“뭐야. 왜 그렇게 피해요?”
“갑자기 그렇게 부르면 뭔가 불길하거든요.”
“죄지은 거 있어요?”
이유나는 깔깔 웃으며 내게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더 불길해지는데.
“뭔데요?”
“아는 동생이 잠실타워에서 일하거든요. 설 선물 중 하나로 받은 건데, 자기한테 필요 없다고 나 줬거든요? 근데 나한테도 필요 없어서…….”
쇼핑백 안에는 손바닥만 한 청룡 인형과 열쇠고리, 펜, 뱃지 같은 청룡 기념품이 있었다. 나는 한 손에 인형과 한 손에 기념품을 들고 이유나를 보았다.
“이거……. 저작권적으로 괜찮은……?”
“수익은 청룡님 이름으로 아동단체에 기부되니까 괜찮아요.”
청룡도 연말정산을 할까?
“그런데 이건 왜 주는 거예요?”
“해준 씨 청룡님 좋아하잖아요?”
“……네?”
“어차피 저 들고 있어 봤자 먼지만 쌓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들고 있으면 청룡님도 좋아할 거예요.”
“네?”
요 며칠 동안 계속 [오늘의 청룡님] 블로그나 청룡에 관한 기사만 찾아보고 있어서인지 이유나는 큰 오해를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저 청룡 안 좋아하는데요, 라고 얘기해도 박서원 때처럼 더 큰 오해를 할 것 같아 참았다. ……때로는 작은 희생도 필요한 법.
그렇다고 집에 들고 가 봤자 나도 쓸 일이 없어서 그냥 모니터 옆에 세워 두었다. 크기도 작달막하고 눈도 동그란 게 귀엽기는 하지만 잠실에 있는 실물을 떠올리면 이게 그거라고?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는 법이다.
“어, 해준 씨 청룡님 좋아해?”
“작년에 행사했을 때 청룡님 굿즈 남은 거 있지 않았나? 그거 해준 씨 좀 챙겨 줘.”
“종류가 꽤 많은데……. 아, 인형은 구하기 힘들 테니까 꼭 가져가요. 그거 지금 프리미엄 붙었을 거야.”
……정신을 차려 보니 내 품에는 각종 청룡 굿즈를 담은 상자가 안겨 있었다.
회사 그만두고 싶다.
* * *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과 남이 바라보는 모습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정해준은 여동생의 마수에 의하여 팔자에도 없는 드라마 세계에 떨어져 개고생하고 있는 남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서 생각하는 정해준은 그게 아니다.
박서원의 팬이고 청룡을 좋아하며……. 일단 여기서 속이 터진다.
“청룡님 좋아한다면서요? 벌써 갈아타요?”
심지어 박서원은 회사도 안 나오는 인간이 어디서 헛소리를 들었는지 태평하게 속을 긁었다.
정해영…… 죽인다…….
박서원은 소파에 앉아 감귤 초콜릿을 먹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 모습이 재수 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박서원이 초콜릿 몇 개를 던져 줬다.
“제주도 갔습니까?”
감귤 초콜릿은 오랜만에 먹는데 여전히 오묘한 맛이었다. 썩 좋아하는 맛은 아니지만 입에서 몇 번 굴리니 적응됐다.
“제주도에 귀찮은 일이 있어서……. 한동안 자주 가게 생겼어요.”
박서원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귀찮은 일이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박서원은 세계구급으로 먹히는 초능력자다. 능력의 사용범위도 넓고, 응용하기도 편해서 이곳저곳 많이 불려 다닌다. 본인의 의지도 있어서 괴물을 주로 처리하긴 하지만.
그런 박서원 정도 되는 초능력자가 귀찮은 일이라 하며 자주 가야 한다고 하는 일이라니. 관련 이슈에 민감한 회사에 다니는데도 들은 일이 없다.
“제주도까지 가는 게 일단 귀찮죠.”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 때문에 불려 가는 거면 제주도가 아니라 집 앞에 나가는 것도 귀찮다.
“그것도 한두 번으로 끝날 일도 아니고.”
그래도 박서원이 저렇게 질색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좀 좋아졌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딴 놈 알아보라고 했을 텐데 나라의 존망이 걸린 터라…….”
“나라의……. 네?”
“가는 김에 겸사겸사 다른 것도 좀 알아보고.”
박서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 미친 새끼가 날 놀리는 건지 진담으로 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경 쓰면 지는 거다.
난 신경질적으로 감귤 초콜릿을 먹었다. 박서원은 킥킥 웃다가 TV 채널을 돌렸다. 뉴스 채널이다.
[이선영 기자가 현장에서 전합니다.]
[지난 1월, 도플갱어가 나타나 큰 소란이 있었는데요. 정부에서는 쥐를 박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번식력이 뛰어나고 일반 쥐와 구별이 쉽지 않아 매번 고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미국에서 ‘하멜른의 피리’를 대여해 주기로 결정하였다고 알려져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저게 왜 와?”
박서원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하멜른의 피리라면 따로 검색해 보지 않아도 나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피리 부는 사나이로 알고 있다. 피리를 불어 도시의 쥐를 강물에 빠뜨려 죽인 이야기 아닌가? 청룡이니 해태니 현실에 튀어나온 판에 외국의 동화가 현실이 되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저건 미국 뉴욕 박물관 소장품이거든요. 국외 반출 안 하기로 유명한 물건인데…….”
나는 뉴스 화면을 보았다. 박물관에서 찍었을 빛깔 좋은 소개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낡은 피리다.
“하멜른이면 독일 아닙니까? 왜 미국이 나와요?”
“2차 대전 때 미국이 가져갔으니까요.”
……역사가 그렇게 되는군.
[이번 ‘하멜른의 피리’의 대여에 관해서는 초능력자 박서원이…….]
“내 이름은 왜 나와?”
박서원은 눈을 크게 떴다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는지 휴대폰을 찾았다.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어디론가 전화하던 박서원은 상대가 받지 않았는지 휴대폰을 휙 던지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네?”
“폰 내놔요.”
“왜, 왜요?”
박서원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 옆에 있던 휴대폰이 둥실 떠오르더니 박서원의 손에 안착했다.
“패턴 뭐예요.”
박서원의 기세가 무서워서 얌전히 패턴을 풀었다. 박서원은 내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박서원의 전화를 피하고 있던 건지 상대는 이번에 전화를 받았다. 박서원은 짜증 난 목소리로 일갈했다.
“아저씨!! 아저씨 짓이죠?! 전화는 왜 또 안 받아?”
“알아서……. 아니, 내가 알아서 했다고 해도 적당히 했어야지,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그야 당연하죠. 내 이름 팔아서 빌려 오겠다는데 누가 좋아해요? 나보고 보증 서지 말라고 가르친 건 아저씨…….”
“아, 뭐가 달라요. 같은 거지.”
“아저씨 실직자 되고 좋은 결말이겠네요. 해 줘요?”
“제대로 받아 낼 거니까 각오해 둬요.”
폭풍처럼 몰아치듯 통화를 끝낸 박서원은 내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통화가 막 꺼진 휴대폰 액정에는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김태욱 차장님]
“……?”
차장님이랑 얘기하던 거였어?!
* * *
“해준 씨!”
당연히 김 차장은 출근한 날 붙잡고 득달같이 물어봤다.
“서원이랑 무슨 사이야?”
“오해할 만한 발언은 안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왜 서원이가 해준 씨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내가 일부러 그 녀석 전화 안 받았는데!”
“차장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김 차장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미국 우주국에 박서원이가 도와주는 대신 하멜른의 피리 대여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했지.”
내가 이 말에 놀라지 않은 건 어느 수준으로 놀라야 제대로 놀란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다.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은 박서원이 바로 전화해서 따질 정도였으니 엄청나게 놀라운 소식인 건 분명하다.
“……허락은 받고 하지 그러셨어요.”
“내가 걜 몇 년 봤는데 모르겠어? 분명 안 된다고 했겠지.”
“그걸 알 정도로 봤으면 안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김 차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뉴스에는 안 탔는데 서원이가 쥐 잡은 이후로 두 번 정도 더 발견됐거든.”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물었다.
“큰일…… 이죠?”
“큰일이지! 어디에 둥지를 틀었나 봐. 난리도 아냐. 고양이를 풀어도 임시방편이지 요즘 쥐들은 머리도 좋아서 피하는 놈들은 진짜 끝까지 피하거든. 그러니까 하멜른의 피리로는 쥐들을 모조리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최선의 방법이다, 이거죠?”
“우리나라같이 쥐 때문에 고생하는 나라에서는 꼭 필요한 도구지.”
그리고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아니, 그래서 해준 씨, 서원이랑 무슨 사이인데?”
넘어가려고 해도 김 차장은 꼭 기억해 낸다. 나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답했다.
“박서원 씨에게 물어보세요.”
원래 이런 건 남에게 미루는 게 최고다.
김 차장의 눈빛이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지만 모르는 척했다.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아니라서 뒤통수가 좀 따가웠을 뿐이지 말을 걸진 않았다.
이런 걸 보면 또 드라마는 드라마란 말이지. 이상적인 상사와 아이돌 동기. 바쁘기는 해도 근무환경만큼은 최고다.
“해준 씨 오늘 2층 근무는 마지막이죠?”
내 뒤통수를 노려보는 김 차장 대신 차시영 부장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 사람도 이상적인 상사에 속한다. 비바 드라마! 현실로 돌아가도 상사만큼은 그대로이길.
“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까지 마무리 잘 해요. 가끔 일 있으면 내려가서 일하니까 설렁설렁하지 말고.”
“주의하겠습니다.”
차 부장은 싱긋 웃었다.
“이제 해준 씨랑 유나 씨도 적응이 다 끝난 것 같네요. 오늘 오랜만에 회식이나 할까요?”
입사한 이래로 무려 첫 회식이다.
어떤 경험이든 처음은 겪어 봐야 한다. 내 철칙이다. 칭찬이든 욕이든 한 번은 해 보고 해야 한다. 드라마 속 이상향의 회사니 현실처럼 괴롭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다.
그래. 믿음. 믿음 말이다.
“꺄아아아아악!!!!”
회식 장소는 평범한 고깃집이다. 굶주린 위장을 달래며 불판에 돼지고기를 올렸다. 술잔을 들고 건배도 했고, 고기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멀리서 비명 소리만 들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테다.
“으아아아악!!”
그러나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렸다.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고깃집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 웅성거렸다. 그리고 휴대폰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삐. 삐. 삐.
내 휴대폰뿐만이 아니다. 옆자리에 앉은 이유나의 휴대폰도, 맞은 편 이 대리의 휴대폰도. 김 차장, 차 부장, 우리 부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옆 테이블의 사람들의 휴대폰도 요란하게 울렸다.
[소방재난본부청] 서초구 ‘오두귀’ 목격. 현재 초능력자 박서원 전투 중. 인근 주민들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꺄아아악!!”
와장창!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비명소리와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유나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여기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다른 데로 이동하는 게 더 위험할지도 몰라요. 일단……. 상황을 지켜봅시다. 박서원 씨가 상대하고 있다니까.”
차시영 부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차 부장도 걱정이 되었는지 손이 조금 떨렸지만 목소리는 안정적이다. 고깃집 사장이 벽에 걸려있는 TV를 뉴스 채널로 돌렸다. 자막으로 서초구 상황이 나오고 있었다.
“……잠깐만 보고 올게요.”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뭐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 힘들 것 같았다.
“그냥 여기 있는 게 낫지 않아요?”
“꽤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상황만 보고……. 제압되었는지 아닌지만 보고 올게요.”
“해준 씨, 같이 갑시다.”
이 대리가 함께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물론 우리의 각오는 쓸모없는 게 되었다. 고깃집을 나서기 전에 모든 상황이 끝나서는 아니고, 상황이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고깃집 바로 앞의 아스팔트가 푹 파였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이 대리가 자세를 낮췄고 나는 숨을 멈췄다. 붉은 피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사람 몸뚱이만 한 팔, 그보다 더 두꺼운 다리. 떡 벌어진 어깨 위로 다섯 개의 머리가 있었다.
재난 문자에서 봤던 이름을 떠올렸다. 오두귀(五頭鬼). 놈이 자세를 잡았다.
아마 딱히 우리를 노리려던 건 아닐 테다. 놈은 바로 옆에 있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고, 이 거리에는 식사 중인 직장인들이 많았다. 놈이 굳이 인간을 노리지 않아도 손을 쭉 뻗는 걸로도 많은 사상자를 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오두귀의 신경은 도로 끝을 향해 있었다. 놈의 몸에 이미 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붉은 술이 휘날려서, 나는 가까스로 그게 박서원의 검임을 알았다. 대낮처럼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검이 재차 멀리서 날아왔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놈은 우리를 노리던 게 아니었고, 그래서 박서원도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 박서원은 놈이 이렇게 나서기 전에 해치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두귀는 박서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튼튼했고, 조금 더 빨랐다.
박서원이 오두귀의 목을 끊어 놓기 직전, 놈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 행동반경에 우리가 있던 고깃집이 포함되었을 뿐이다.
개죽음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정해영 뒤통수도 때려보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세계에 똑 떨어져 이렇게 죽게 되다니. 억울하다. 말도 안 돼. 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준 씨?”
이 대리가 멍하니 나를 불렀다. 아프지도 않고 이 대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살아 있는 모양이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거, 해준 씨가 한 건가요?”
이 대리는 희뿌연 막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얗게 빛나는 막이 고깃집 앞을 빙 두르고 있었다. 놈의 움직임은 거기에 막혀 있었다. 놈은 자신의 움직임을 막은 하얀 막에 당황했다.
“……아뇨?”
그러나 부정할 수 없게도 내 손도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얼마 전 천도복숭아를 먹은 이후로 매일 아침 빛나던 손이다. 그게, 왜, 지금, 여기서?
“아무리 봐도 해준 씨가 한 건데요?”
“전 모르는 일인데요?”
“네?”
“네?”
나는 멍청한 얼굴로 빛나는 손을 보았다.
이제 깨달았는데, 난 용을 알기 전에 내 몸에 대해서 먼저 고찰해야 했다.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 빌어먹을 복숭아는 내 몸에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