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5. 복숭아 타령(1)
“자, 모두 복창합시다.”
차시영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익숙한 구절이 나온다. 차 부장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기까지 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하이고, 부장님.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안 합니다.”
“닥쳐 봐, 김 차장. 난 지금 회사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을 할 수 있을 만큼 애사심이 고취된 상태니까.”
나는 이유나한테 눈짓했다. 이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사심이 고취되었는데 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합니까?”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차 부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풀었다. 뭔진 몰라도 푸른색의 윤이 좌르르 흐르는 비싸 보이는 보자기였다. 보자기 안에서 나온 상자도 비싸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거지.”
차 부장은 몽롱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이거라면 또 불려 가도 좋아…….”
넋이 나간 건 차 부장뿐만이 아니었다. 비교적 정신을 잡고 있는 듯했던 김 차장도 막상 상자를 보자 사랑에 빠진 얼굴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회사가 미친 거 아닐까요……? 이게 다 얼마짜리야.”
“일하다 죽으란 걸까? 죽을 때까지 일하란 건가?”
수런거리는 목소리가 사무실에 퍼졌다. 다들 비싸 보이는 상자를 두고 말이 많았지만 저 상자가 뭔지 모르는 나는 영문 모를 일일 뿐이다. 이유나를 다시 보아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럴 때는 제일 만만한 사람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 대리님.”
몽롱한 얼굴로 상자를 보고 있던 이 대리는 어깨를 쿡쿡 찌르고 나서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죠?”
“저 상자가 뭡니까?”
잠깐 돌아왔던 눈빛이 다시 상자를 향하자마자 흐릿해졌다.
“대리님?”
“아, 아아, 네. 저건 그겁니다.”
“네.”
“그거죠.”
“네?”
몽롱해지는 이 대리의 어깨를 한 번 더 쿡 찔렀다. 이 대리는 끙, 하며 대답했다.
“12월에 일 나간 거랑……. 설날 선물 겸 해서 회사에서 준 겁니다.”
설날 선물이라고 하기엔 크기가 크다. 어린애 하나 정도는 들어갈 만한 상자. 일반적으로 주고받는 햄 세트나 기름 세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렇게 난리인 거 보면……. 비싼 거예요?”
이유나도 궁금했는지 슬쩍 끼어들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워낙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서……. 진짜 왜지? 이중장부라도 만들었나?”
“이 대리님?”
“그러니까, 저게 뭐냐면요…….”
그때, 상자 뚜껑을 쓰다듬으며 간만 보던 부장이 드디어 걸쇠를 풀고 상자를 열었다. 동시에 달콤한 향기가 사무실에 퍼졌다. 단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처럼 진한 향기였는데도 물리지 않고 산뜻하기만 했다.
“복숭아……?”
이 대리는 상자를 향해 목을 쭉 내밀었다.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천도복숭아예요. 서왕모가 키운다는 그 복숭아요.”
용과 여의주, 초능력자에 이어 이제 서왕모까지 나왔다.
……요즘엔 이런 설정이 유행인 건가? 이런 드라마가 정말 인기가 있다고? 요즘 세상……. 정말 모르겠다.
“자, 우리 너그러우신 사장님께서 천도복숭아를 한 상자씩이나 보내 주셨으니 한 알씩 가져갑시다.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사람 있던가? 천도복숭아는 괜찮을 거야.”
국가의 부름을 받지 않았던 이 대리에게도, 그리고 신입인 나와 이유나에게도 천도복숭아 하나가 떨어졌다. 빛깔이 평범한 복숭아와는 다른 게 딱 봐도 뭔가 대단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처럼 생겼다.
서왕모의 천도복숭아는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이고, 옛 전설 속의 복숭아처럼 먹은 사람을 불로불사로 만들어 준다거나 병을 완치시킨다거나 하는 효력은 없다고 했다. 적어도 시중에 남아 있는 건 말이다. 중국 땅은 넓으니 어느 구석에서는 전설 속의 복숭아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효력은 줄었어도 천도복숭아는 천도복숭아라서, 성인 주먹 두 개만 한 복숭아는 썩지도 않고 온갖 해악을 막아 준다고 했다. 먹어도 건강에 좋고 맛도 좋다지만 집에 두고 액막이 부적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내가 사는 자취방에 둔다면 방이 아니라 건물 전체의 액막이가 될 거라고 준전문가 이 대리가 설명했다.
“먹는 것도 좋아요. 잔병치레가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건강해질 테고……. 뭣보다 이게 그렇게 맛있대요.”
“냄새부터가…….”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기를 맡고 있으니 입에 침이 절로 고였다.
천도복숭아는 중국에서만 자라고, 키우는 기간, 날씨 등에 따라 급이 나뉜다고 했다. 이번에 사무실에 들어온 건 최상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하급도 아니었다. 상과 하를 따지자면 하에 가깝지만 그것만으로도 영험하다니. 이걸 신입한테까지 나눠주는 배포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이건 얼마나 할까요? 최상등급 천도복숭아는 하나에 억이라면서요?”
“더 비싸지 않을까요? 최상등급이면 부르는 게 값인데……. 미국 대통령도 사려다가 없어서 못 구했다고 하던데.”
“이건 그렇게까지 비싸진 않을 테고……. 그래도 못해도 백 이상은 하지 않을까요?”
나는 복숭아를 보았다. 이게……?
“한 상자에?”
내 말에 이 대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설마요. 하나에. 최하급이 백 정도니까 그것보단 비싸겠죠.”
“…….”
이 대리가 입을 뻐끔거리며 추정 가격을 말해 주었다. 나는 질린 눈으로 내 월급 정도의 가치를 가진 복숭아를 보았다.
……진짜? 진짜로? 복숭아 하나가 그렇게 비싸단 말야?
그날 사무실은 내내 복숭아 향이 맴돌았고, 나는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비닐로 돌돌 말고 쇼핑백에 넣어도 복숭아 향이 옅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달 월급을 종이봉투에 달랑 넣어 지하철을 탈 용기도 없었고. 택시 기사는 감사하게도 택시를 가득 채우는 복숭아 향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먹기엔 좀 아까운데…….”
집에 도착해서도 복숭아는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 먹기엔 아깝고, 안 먹기에도 아깝다. 뭣보다 맛도 좋다지 않은가. 향이 이 정도니 맛도 달 거다. 원래부터 복숭아는 좋아하는 과일이다. 가만히 있어도 침이 고였다.
“썩지도 않는다니 두고 고민해 봐야겠다.”
그래도 월급이라 생각하니 손이 가지 않았다. 소시민의 비애다. 과도를 들고 한참 고민하다가 내려놓았다. 좀 더 생각해 보자. 일주일 정도 이 냄새를 맡다 보면 월급이고 뭐고 간에 눈이 뒤집혀 먹고 말 테니까.
나는 복숭아를 쟁반 위에 올려 식탁에 두었다.
그리고 딱 이틀 뒤, 나는 복숭아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안 썩는다며?”
천도복숭아의 아랫부분이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 * *
내 인간관계는 협소하다.
원래는 이렇게 협소하지 않은데 어찌 된 게 이 드라마에는 내 친구 놈들도 남아 있지가 않다. 정해영의 저주가 틀림없다.
어쨌든 내 협소한 인간관계는 회사 사람들이 전부다. 하긴 회사 사람들이 전문가라고 할 수 있으니 굳이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Q. 천도복숭아가 썩어요. 왜 그럴까요?
└ 중국산 짭 아님?
└ 애초에 천도는 중국산인데
└ 터 안 좋은 건 아니고? 나쁜 거 달라붙으면 복숭아가 대신 막아 주잖음 그럼 까맣게 되던데
└ 질문자 착하게 살아라. 나쁜 짓 하지 말고
“…….”
혹시나 싶어 인터넷에 글도 남겨 봤지만 도움 되는 글은 하나도 없었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에도 복숭아는 여전히 달짝지근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아랫부분이 까만 걸 제외하면 처음 받았을 때와 다른 건 없다.
“부장님.”
그래도 찝찝한 건 찝찝한 거라 알아보긴 해야 했다.
“저번에 주신 복숭아 있잖아요.”
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크게 뜨자 중학생 자녀 둘을 둔 엄마답지 않게 어려 보였다.
“그게 안 먹고 집에 뒀었거든요?”
“응.”
“그런데 밑 부분이 까맣게 되었어요.”
“……응?”
“어떻게 된 건지 좀 봐 주실 수 있을까요?”
“……밑 부분이 까맣게 되었다고?”
“네. 잠깐만요. 사진을 찍어 왔거든요.”
차 부장은 내가 찍어 온 사진을 보더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게 이렇게 됐다고요?”
“네. 혹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아시나 해서요.”
“아니, 이게……. 잠깐만요. 김 차장! 태욱아!!”
차 부장은 김태욱 차장을 크게 불렀다. 차 부장의 대학 후배이자 직장 부하인 김 차장은 어기적거리며 다가왔다.
“뭡니까?”
“해준 씨가 집에 둔 복숭아가 이렇게 됐다는데…….”
“……이게 이렇게 됐다고요?”
“……저, 뭐가 잘못된 건가요? 복숭아가 썩으면 안 좋은 기운이 있는 거라던데.”
“이건 썩은 게 아니라…….”
김 차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 부장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으로 찍은 복숭아 사진을 보다가 말했다.
“김 차장, 일단 총무과 박 부장한테 연락해. 그쪽에서도 이것만 들여온 게 아닐 테니까. 아, 그리고.”
차 부장은 목소리를 높여 사무실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번에 준 복숭아 아직 안 먹은 사람은 먹지 말고 다시 들고 오세요! 문제가 생겼으니까!”
“문제요?”
차 부장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휴대폰 속의 썩은 복숭아를 보았다.
“가짜 천도가…… 있네요.”
* * *
자, 그리고 내 자취방에는 정부의 초능력특별수사과에서 나온 사람들이 파견 나오게 되었다. 초능력자 혹은 그런 물건들과 관련된 범죄를 다룬다고 했다. 도수가 높아 보이는 두꺼운 안경을 낀 여자가 눈을 끔뻑대며 인사했다.
“아, 아, 안녕하세요, 특수과 수사관 오늘이라 합니다.”
“수사관 김도훈입니다.”
“정해준입니다.”
“저, 그, 연락, 드, 드렸는데……. 복숭아 때문에…….”
여자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다. 어려 보이는 얼굴과 소심한 태도 때문에 여자가 보조인가 했는데 먼저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이쪽이 주 수사관인 모양이다. 수사관 오늘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아……. 복숭아를…….”
“혹시 모르니까 옮기면 안 된다고 들었거든요.”
“그, 가짜라면……. 어떤 주술적, 고, 공정을 거쳤는지…… 몰라서어……. 함부로 움직, 움직이면…… 반동이…….”
“네, 그러니까 확인하시려면 들어와야 하거든요. 들어오시겠습니까?”
“그그그, 허락은 저희 쪽이…… 맡아야 하는…… 데…….”
“그럼 물어봐 주시겠어요?”
“……으, 저, 복숭아……. 확인……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대꾸하고 있으니 얼굴이 따가워졌다. 잠깐 시선을 트니 김도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말을 안 끊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시, 시끄러워…….”
오늘이 김도훈의 발을 콱 밟는 게 보였다. 생긴 건 순한데 생각보다 성격이 있나 보다. 나는 김도훈의 발을 지그시 지르밟는 오늘의 발을 무시하며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