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4. 어디서 들어본 설정(2)
여의주!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구슬이 가지는 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이건 일곱 개씩이나 모을 필요도 없다.
어디서 들어 본 설정이면 어떤가?
물론 내가 한국 드라마를 무시한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다 어디선가 모티브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여의주나 소원을 이루어 주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내가 무시하는 건 오로지 정해영뿐이다.
어쨌든 여의주는 소원을 이루어 준다. 중요한 건 그거다. 떠도는 말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 다들 들어 보셨죠?? 요게 어떻게 생긴 말인지 아시나요~~?
청룡님이 잠실에 터 잡으시기 전에 오랫동안 동해에 계신 건 알고 계시죠?
청룡님이 울진에 계실 때 어느 가난한 어부가 그물에 걸린 청룡님 아드님을 도와줬다고 해요~~
아드님을 도와준 어부한테 보답을 하기 위해 청룡님이 나타났는데, 글쎄 이 어부가 자기보다는 자식이 배곯지 않고 큰 사람이 되길 원했다지 뭐에요?
청룡님은 여의주의 힘을 쪼오오오금 써서 어부의 소원을 들어줬다고 해요~
그리고 이 어부의 소원대로 어부의 아들은 쑥쑥 커서 배곯지 않는 큰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경상북도 도지사 김개천 씨가 바로 그 어부의 아들이라고 하네요~~~]
장난치냐?
이런 정해영 같은 일이 있겠냐 했는데 뉴스도 있고, 인터뷰도 있고, 심지어 김개천 씨의 자서전마저 있었다.
‘용의 보은, 개천에서 용 난 남자 ― 김개천 저’
장난치냐?
어쨌든 여의주를 살짝 흔들어서 한 인간의 운명을 틀었다. 그럼 여의주를 던져서 깨트리면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까?
“여의주?”
내 주위에는 인터넷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차라리 로또가 낫지 않을까?”
김태욱 차장은 부정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기왕 한 방이면 로또보단 여의주죠.”
이진혁 대리는 좀 더 희망적이었다.
“여의주 힘을 다 쓰면 청룡님은 어떻게 될까요?”
이유나 사원은 원론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여의주는 왜요?”
“여의주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싶어서요.”
이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존하는 인물 중에 소원을 이룬 사람이 경북도지사밖에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네요.”
“아니지, 소원을 이룬 사람은 경북도지사 아빠지. 김개천이 소원을 빈 건 아니잖아? 그땐 태어나지도 않았다며.”
“그건 그렇죠. 근데 한국전쟁 이전이기도 하고 남은 이야기도 별로 없잖아요. 청룡님은 질문 안 받으시고 그 김개천네 아빠랑 청룡님이 찍은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았으면 뭔 개소리냐고 했을걸요.”
“글킨 하지?”
김 차장은 턱을 긁적였다.
“그래도 죽은 사람 살리는 건 아무리 여의주라 해도 안 되겠지.”
이 대리가 반박했다.
“사람 운명도 바꿨는데 어떻게 확신해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어려워도 죽을 운명을 바꾸는 건 되지 않을까요?”
“죽을 운명이라…….”
“청룡님 여의주라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 텐데 사실 뭐든 다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용이니까 짐작이 안 가네. 천 년 정도 묵으면 뭐든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세계 정복이라던지?”
“에이, 차장님 너무 나가셨다.”
김 차장의 말에 이 대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용이 천 년 동안 품었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여의주가 이루어 줄 수 있는 소원의 범위에 대해 이야기하던 게 천 년 묵은 용과 세계정복으로 주제가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낄낄거리며 이야기하던 김 차장은 곧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자, 이제 일해야지?”
차장의 말에 다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의자에 앉는데, 김 차장이 종이를 팔랑거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해준 씨? 이거 가져가야지.”
우주를 떠올리게 하는 로고가 선명하게 보였다.
“박서원이 연락처는 사내 초능력자 명단 뒤지면 나올 테니까 찾아보고. 내 이름 팔면 싫은 티 팍팍 내면서도 하겠다고 할 거야.”
“……네.”
“팬이라니까 만나면 사인도 좀 받고. 아, 사인은 받았댔나? 그럼 사진 좀 찍어 달라고 해. 내가 말해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 그래. 이런 건 직접 말해야 좋다지? 요즘 젊은 애들은 잘 모르겠다니까. 어쨌든 해준 씨, 기왕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데 덕 좀 봐야지. 서원이 회사 온다고 하면 말해 줘.”
“……네.”
제길, 깜빡한 척 넘어갈랬는데.
* * *
“사진 찍고 싶다면서요?”
김 차장이다. 범인은 김 차장이다. 내 안의 살생부 두 번째 자리에 김태욱 차장을 써 넣었다. 물론 첫 번째는 정해영이다.
당장이라도 살생부에 적힌 이름을 체크하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회사의 노예였다. 필사적으로 웃었다.
“하하. 아뇨.”
“사진 찍어 주라던데.”
김 차장!!!!!
“진짜 괜찮습니다.”
“팬이라면서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초능력자 박서원 씨를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정해영은 이런 애를 왜 좋아하지? 얼굴?
그래. 얼굴이겠지. 그거 말고 무슨 이유가 있겠냐.
“그래서 왜요?”
“전화로도 이야기했지만 미국에서 요청이 와서요. 우주……. 그거요. 매년 오는 거라고 하던데요?”
“아, 거기. 나 하나면 자기네 훈련시설보다 더 싸고 완벽하게 훈련하니까 매년 매달리는 거죠.”
박서원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잔뜩 짜증을 내며 자기 모습을 한 쥐를 썰어 죽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옷차림은 같았지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무스탕을 눈으로 흘깃 보며 나는 박서원에게 메일을 인쇄한 파일을 건넸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6등급 부려먹던 가격으로 부려먹을 생각인 건지, 참. 양놈들은 양심이 없다니까. 안 그래요?”
“하하…….”
박서원은 유명하다. 세계 최강이라고도 불리는 초능력자기도 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십 년 가까이 괴물들을 잡으며 이름을 알려왔다. 잘생긴 얼굴도 한몫해서 어지간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도 누리고 있다.
“별로 끌리진 않는데.”
“차장님이 올해도 부탁하고 싶다고 하시던데…….”
“그 아저씨는 만날 그 소리 한다니까. 그럼 감사패 같은 거 말고 금이나 달라고 해요.”
“네?”
“이 짓도 6년째인데 10년 뒤에도 감사패 줄 생각인가? 둘 자리 없다고 말해요. 아니면.”
박서원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비죽거리며 웃었다.
“금으로 된 감사패를 만들어 주던지.”
힘없는 사원은 그냥 웃었다. 차장님이 알아서 해 주겠지. 안 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금으로 된 감사패 조건이 붙긴 했지만.
나는 박서원을 보았다. 드라마의 주인공. 정해영의 내 새끼. 이 남자는 그 빌어먹을 15화에서도 살아남는다. 성격은 좀 꼬인 것 같지만 친해지면 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15화를 보고 정해영은 작가 욕하기에 바빠서 주인공 빼고 모두가 죽는다는 것 말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주인공 말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뭘 봐요?”
“아니…….”
박서원은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10등급 초능력자이며 최초의 11등급이 될 거라 점쳐지는 남자다. 눈앞의 남자가 정해영의 ‘내 새끼’라는 걸 확인한 이상 정보는 얻어야 하니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 봤었다. 수많은 뉴스 사진 속에는 박서원이 잠실의 청룡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사진?”
“필요 없다니까요.”
“내 팬이라면서?”
“여동생이 좋아하는 겁니다.”
“여동생 있어요?”
“네.”
“나도 여동생 있는데.”
그 말이 의외라서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박서원을 보았다. 형제나 남매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던데. 하긴 선입견이다.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사진 찍어서 여동생 보여 줘요.”
내가 박서원이랑 찍은 사진을 보면 분명 정해영은 쓰러질 거다. 배 아파서. 네가 뭔데 계를 타냐며 한참을 징징거릴 거다. 눈에 선했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그럴 정해영이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거절했다.
“걔 좋은 일을 해 줄 필요는 없죠.”
내 말에 박서원은 픽 웃었다.
“그러세요. 그럼 뭐가 궁금한데요?”
“박서원 씨, 청룡님이랑 이야기해 봤죠?”
“잠실 청룡님?”
“네.”
박서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부서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다가 나왔는데, 청룡님이랑 이야기해 본 박서원 씨라면 알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야기는 해 봤지만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무슨 이야기였는데요?”
“청룡님 여의주요.”
“여의주?”
“경북도지사가 여의주 눈곱만한 힘으로 성공했다잖아요? 그러면 여의주 하나를 전부 다 쓰면 소원이 어디까지 이뤄지나 해서요.”
“그거 우리끼리도 몇 번 이야기 나왔던 건데.”
박서원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사람들 궁금해하는 건 다 똑같다니까.”
그러나 박서원도 고개를 저었다.
“어느 용기 있는 멍청이가 청룡님한테 직접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 주더라고요. 내일 날씨도 물으면 잘 말해 주시는 분이 대답 안 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이룰 수 있는 범위가 넓을걸요.”
이 동네 용은 혹시 기상청에서 일하는 걸까?
“그래서 청룡님 대신 아는 이무기한테 물어봤는데.”
아, 그래. 용이 있으면 이무기도 있어야지.
“용의 여의주보다 급이 좀 달리긴 하지만 자기네 여의주가 일곱 개만 있어도 죽은 사람을 일으키고 세상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하네요.”
결국 나왔다. 일곱 개.
“용의 여의주가 물론 이무기 여의주 하나보다는 강하겠지만……. 일곱 개랑 비교하면 솔직히 모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일곱 개보다 강할까?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이무기가 할 수 있는 걸 못하진 않겠죠.”
“……그럼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있다?”
“이무기가 할 수 있다는데. 거기다 용이니까 원숭이 손 같지는 않겠죠. 그런 면에선 가장 안전한 부활 방법이라 할 수 있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이야기는 금기에 가깝다. 그런 이야기들은 페널티가 덕지덕지 붙는 법이다. 그걸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이 세상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이 진짜라는 가정하에.
……아니. 아니다. 나는 정해영이 빌더쓰를 보며 개소리를 지껄이는 걸 기억한다. 평안 아파트 1차 701호에 살던 가족을 기억한다. 그곳이 진짜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도 돌아가서 정해영의 등짝을 때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왜, 인생 한 방 관심 있어요? 그거 골로 가기 딱 좋은데.”
“그냥 궁금하잖아요. 경북도지사도 한 방 해냈는데.”
“그건 그 사람 아빠가 한 거고. 요즘 사람들은 약아빠져서 청룡님이 소원을 이루어 주려다가도 그만둘걸요.”
“꿈이야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매주 복권도 사는데.”
“복권 당첨 확률이 더 높을 텐데……. 하긴, 매주 돈 버린다는데 정화수나 떠서 치성이나 드려 봐요.”
박서원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설명을 잘 해 주기에 의외로 친절한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해영의 눈이 그렇게 높을 리가 없지.
“박서원 씨는 소원 같은 거 없어요?”
박서원은 콧방귀를 꼈다.
“있기야 하죠.”
“거봐요.”
나도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저 남자도 소원이 있다고? 얼굴에 능력, 다 가졌을 것 같은데. 아, 하긴. 키가 좀 부족하다. 나보다 작으니까.
“지금 되게 기분 나쁜 생각 한 것 같은데.”
“착각이겠죠.”
“……흠.”
“박서원 씨가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압니까?”
“기분이 묘한데…….”
“착각이라니까요. 그래서, 박서원 씨 소원은 뭡니까?”
박서원은 묘한 눈으로 날 보다가 툭 내뱉었다.
“좆같은 미세먼지 없애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