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4. 어디서 들어본 설정(1)
세상은 여전히 잘만 돌아간다.
이 대리와 이유나가 아침마다 박서원의 기사를 내게 보여 줘도, 박서원의 사인이 있는 티셔츠가 화장실 앞에 놓는 발걸레로 사용되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가끔 뉴스에서 박서원이 출몰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2018년의 겨울이 끝나고 2019년이 찾아왔다.
신년이 다가오기 전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던 부서 사람들도 하나둘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대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차시영 부장과 김태욱 차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올해도 최악이었어.”
“내년에는 꼭 11월에 그만둘 겁니다.”
“김 차장 매년 그 얘기 하는 거 알지?”
이 대리는 나와 이유나를 자리를 비웠던 부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바빴다.
어쨌든 이름도 모르는 드라마에 들어온 지 한 달. 이 정도면 이 회사에도 적응한 거 같다.
* * *
한 달 동안이 빌어먹을 드라마 세상에서 살면서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느낀 건 이곳에 대한 지식이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정해영이 좋아하는 걸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사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일 정도는 알아야 했다.
백번 양보해서 초능력자 박서원이 누군지 모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초능력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를 수 없다.
그리고 나라에 몇 안 되는 초능력자인증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 모두 알아야 한다.
무식한 사람이 되는 건 상관없다. 상식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전반 지식을 모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새날에 다니는 건 자연스럽게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관련 기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만큼 관련된 주제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난 신입이다. 설명을 하기보다는 설명을 듣는 쪽이다.
“올해 검사지 제출하려고 하는데요…….”
“네, 신분증 확인하겠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나도 창구에 앉게 되었다. 2층 등록창구에서 일하는 직원은 따로 있지만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곳이다 보니 한 달은 참관, 한 달은 직접 일하게 시킨다고 했다.
새날도 그렇지만 인증센터는 공기업인 듯 아닌 듯 공기업 같은 느낌이 강하다. 3등급 이상의 초능력자들은 인증센터에 반드시 소속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이 정도면 그냥 공기업이 아닌가 싶지만 그건 또 아니라니까……. 정해영이 보는 드라마가 그러면 그렇지.
“확인했고요, 서류도…….다 챙겨오셨네요. 확인했습니다. 등급 산정이 끝나면 보통 일주일 안으로 연락이 갑니다. 인터넷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고, 일주일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반드시 문의해 주셔야 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인증센터에 소속된 초능력자들은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CG로 보이는 괴물들이 나타날 때 불려간다. 꼭 괴물이 아니어도 가뭄이나 불이 나거나…… 미세먼지가 심한 날…… 등산객 실종…… 등등의 일에도 불려 나간다. 이게 왜 공무원이 아닌가? 하는 일은 완전 공무원인데!
이 세상을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게 허용치를 넘어 버리면 나는 언제나 마법의 단어를 속삭인다.
정해영.
그래. 이건 다 정해영 때문이다.
그럼 내 속은 마법같이 편안해졌다.
오전 창구 근무를 끝내고 8층으로 올라가자 어쩐 일인지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날 발견한 이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까딱까딱 손짓하며 날 불렀다. 그래도 동기라고 이젠 꽤 친해졌다. 아이돌 얼굴 때문에 아무리 봐도 어색했는데.
“뭔데요?”
“부장님한테 협조 메일이 왔어요!”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궁금해졌다. 이 대리가 우릴 보며 정색하며 말했다.
“유나 씨랑 해준 씨도 이제 우리 부서 사람 됐으니까 바깥사람들은 모르는 정보를 알 때가 됐죠.”
물론 곧바로 김 차장이 구박했다.
“어이구, 이 대리 저거 봐라. 막내들 들어왔다고 아는 척도 다 하네.”
“아, 차장님. 그런 말 하시면 어떡합니까.”
“허, 늙은 차장은 이제 별 볼 일 없다 이거지. 그래, 그래. 이제 이 대리 시대다!”
김 차장은 낄낄거리며 웃다가 나에게 종이 하나를 건네줬다. 영어로 온 이메일을 인쇄한 종이였는데, 딴 건 눈에 안 들어오고 로고만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대충 우주를 표현한 로고. 원래 세상에서도 똑같은 로고를 쓰는 곳이 있다. 미국에.
“……여기서 왜 메일이 와요?”
“원래 관리부에서 처리하는 건데 내가 서원이랑 친하니까 내 쪽으로 보냈어.”
“박서원 씨요?”
메일을 다시 봤다. 중간에 Park Seo Won 이름이 보였다.
“서원이 능력 때문이지, 뭐. 매년 서원이 달래서 보냈는데 올해는 하려나 모르겠네. 작년에도 귀찮아했는데.”
초능력자 인증카드에는 등급만 적혀있지 능력은 적혀있지 않다. 그렇지만 박서원 정도로 유명한 초능력자라면 능력도 널리 알려져 있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니 바로 나왔다.
박서원의 능력은 중력. 지정한 공간의 중력을 뜻대로 바꿀 수 있다. 중력을 높일 수도 있지만 낮추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박서원은 일정 공간의 중력을 극도로 낮춰 무중력에 가까운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나는 다시 메일을 보았다.
메일에는 우주비행사 훈련을 위해 박서원 좀 빌려 달라는 말이 정중하게 돌려 써져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세상 아냐? 정해영!
“이거 알리려면 서원 씨 여기로 부르죠?”
“매년 그랬으니까 그렇겠지? 왜?”
이 대리가 날 보며 웃었다. 치과 모델로 세워 두면 딱 좋을 만한 건강한 미소지만 불길했다.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고?
“그게 해준 씨가…….”
뭘 말하려는지 알겠다. 난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니라니까요!”
“해준 씨가 서원 씨 팬이라잖아요.”
“사인까지 받았어요!”
“그것도 티셔츠에!”
이 대리랑 이유나가 번갈아 가며 말했다.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김 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셔츠?”
“왜 그 1층에서 파는 티셔츠 있잖아요.”
“그러니까 팬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김태욱 차장은 오히려 반색하며 말했다.
“아니, 그랬어? 진작 말하지! 내가 서원이 걔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봤거든. 알았으면 소개해 줬지.”
“어차피 차장님 국가의 부름 당하셔서 안 계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우리 신입이 팬이라니 안 되겠다. 서원이 나 보러 자주 오니까 오면 꼭 말해 줄게. 이것도……. 그렇지.”
김 차장은 내 손에 들린 종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거 서원이한테 해준 씨가 전해 줄래?”
거절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팬은 아니지만 어쨌든 박서원은 드라마 주인공이잖은가?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편이 좋다.
“……진짜 괜찮은데요.”
그렇지만 이미 자연스럽게는 글러 먹었다. 화장실 문 앞에 있는 박서원 티셔츠(친필 사인 포함)를 떠올렸다. 오늘도 씻고 나와서 박서원 얼굴에 발을 문댔다.
“에이, 괜찮아, 괜찮아.”
그러나 대개 한국 회사가 그렇듯 일개 사원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 * *
자, 어쨌든 새날은 세상 사는 지식을 익히기엔 알맞은 곳이지만 그만큼 바빴다. 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문명이 있다. 스마트 폰은 나의 오랜 친구요, 스승이다.
“뭐 재밌는 거 있어요?”
“아뇨.”
“와, 완전 단호한데요?”
이유나는 탕비실에서 타온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단 건 안 마신다면서요?”
이유나는 종이컵을 흔드며 씩 웃었다.
“당연 아메리카노죠. 여기 탕비실엔 비싼 커피가 많아서 좋아요. 믹스 커피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너무 달다고요.”
물론 나는 믹스 커피를 마신다.
이유나는 심심한지 나한테 말을 걸었지만 난 대충 대꾸해 주며 휴대폰을 살폈다.
요 한 달간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꼬박꼬박 확인하면서 알게 된 건데, 매주 화요일마다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는 청룡님이 꼬박꼬박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화요일마다 미세먼지 농도가 낮아지는 이유?]
청룡이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청룡님 시간표]
무슨 버스냐.
[오늘의 청룡님]
잠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인지 청룡 사진만 잔뜩 올려놓은 블로그를 발견했다. 매일 한 장씩 찍힌 청룡은 항상 다른 건물을 감고 있었다. 어떤 날은 건물 여러 개를 걸치고 있기도 했다.
멀리서 어렴풋하게 봤을 때는 현실 CG라는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사진을 봐도……. 역시 잘 만든 CG다. 이 사람, CG 배우나? 잘 만드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이건 틀림없이 진짜 청룡을 찍은 거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비늘이 사실적이다.
“청룡님 봐요?”
“뭐…….”
“멋지긴 하죠. 동해 바다 출신이라잖아요.”
“동해 바다 출신이 서울 와서 왜 저러고 있어요?”
“다른 건물 안 걸치고 자기 몸으로 감을 수 있는 건물이 잠실 타워뿐이래요.”
생각보다 현실적인 이유다. 하긴 용이라도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는 곳이 편할 거다.
“음……. 사실 난 그거보다 여의주가 더 궁금하긴 해요.”
“여의주?”
그건 안다. 동양 문화권에 살다 보면 한 번씩 듣는 단어 아닌가. 용이 품고 있다는 구슬.
“소원을 이루어 준다잖아요. 탐나지 않아요?”
뭐?
* * *
여의보주는 불교에서 말하는 보주(寶珠)로, 모든 악을 제거하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한다. 보통 용이 가지고 있다고 하며 여의주라고도 한다.
정해영이랑 했던 대화를 억지로 기억해냈다.
‘그리고 서울에 용이 하나 살거든? 그 용이 소원을 이루어 주는 구슬을 가지고 있는데.’
‘어디서 들어 본 설정이다?’
‘일곱 개 안 모아도 되니까 닥쳐.’
‘오빠한테 말하는 거 봐라.’
아니아니아니, 딴 데로 새는 대화 말고.
‘……그렇게 주인공이 여의주를 찾아 나서는 거야!’
앞내용이 기억 안 난다. 정해영의 말을 항상 발로 듣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보통 정해영이 드라마에 대해서 떠드는 건 발로도 안 듣긴 하지만 미친년처럼 떠드는 게 불쌍해서 백의 한 번 정도는 들어준다. 대충 기억나는 걸 조각조각 이어 붙여 보니 대충 빌더쓰의 윤곽이 나왔다.
강력한 초능력자 주인공이 사람들을 구하며 영웅이 되고 흑막과 싸우다가 그들의 목적이 여의주인 걸 알고 먼저 여의주를 손에 넣기 위해 개고생하는…….이거 어디서 들어 본 이야기 아냐? 하긴 요즘 드라마가 다 그렇지 뭐.
주인공과 서울 멸망에 대한 내용은 제쳐 두어도 여의주는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잠실 타워를 용이 휘감고 있는 세상이다.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말도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중력을 다루고 손에서 불을 내뿜는 세상인데 소원 이루어 주는 구슬이라고 없을 이유가 있나.
슬그머니 기대가 피어오른다.
용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하나같이 여의주는 신물로 표현했다. 이무기도 여의주를 만들어야 승천해서 용이 된다. 어떤 작용인진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로 소원을 이루어 준다면…….
날 집으로 보내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