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3화 (3/202)

# 3

3. 여동생이 좋아한 그 남자(1)

“그쪽은 어때?”

“솔직히 말해?”

“얼굴 보니 알겠다.”

연수 때 같은 방을 썼다는 이유로 친해진 김석준이 안쓰러운 얼굴로 날 봤다.

쟤가 날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네 걱정이나 해라.”

“하……. 그렇지……. 내가 누굴 걱정해.”

등급산정부서 신입과 초능력자관리부서 신입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영영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도떼기시장 같은 안내처의 풍경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생각이 많았던 것도 처음 하루 이틀이다. 원래 생각이란 건 몸이 편안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도대체 나는 왜 새날 같은 회사에 이력서를 낸 것인가? 왜 등급산정부서에 지원을 한 것인가?

생각의 끝은 정해영에 도착했다. 만악의 근원! 기필코 그 녀석 등짝을 때리고 말 거다.

“인증센터에서 일하면 좋을 줄 알았지…….”

김석준은 씁쓸하게 말했다. 저렇게 말해도 입사한 지 이제 일주일 되는 새삥이다.

“아니, 좋긴 한데……. 일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진짜.”

“그래도 퇴근은 제시간에 시켜 주잖아.”

“야, 우리 부서 선배들은 다 야근하더라. 신입들만 퇴근시켜 줘.”

김석준은 예견된 미래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겨울철이라 그렇다잖아. 불낼까 봐 그쪽 계열 초능력자들은 싹 빠지고 물 쪽은 가뭄 때문에 불려 나가고. 남은 인원으로 굴리니까 머리 터지겠지.”

“대한민국 사계절 누가 좋댔냐? 아주 거지같구먼.”

그리고 나 또한 예견된 미래에 부르르 떨었다.

“우리는 3월이 피크라던데 저기서 더 몰릴 수 있다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역시 입사를 잘못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다시 생각해 보자.

“야 그래도 너랑 같이 들어간 여자애 예쁘잖아. 어때?”

“어떻기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걔가 어떻게 생기든 난 일만 잘하면 돼.”

내 말에 김석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일 잘하는 게 최고긴 해.”

언제 야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슬픈 신입 인생에는 일 잘하는 동료가 최고다.

* * *

“해준 씨.”

“바빠요.”

“나도 바쁘거든요?”

이유나가 까칠하게 말했다.

“왜요?”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여기, 이 수치요.”

새날의 신입 교육은 빡빡하다. 나도 회사 생활은 이곳이 처음이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무도 신입부터 이렇게 바쁘다고 하진 않았다.

이 대리가 겁을 주긴 했지만 처음부터 그……. 사바나 같은 곳에 던져지진 않았다. 오전과 오후 한 타임씩 이유나와 교대로 내려갈 뿐이다. 내려가서도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아니고, 뒤에서 일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참관만 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이 대리가 넘겨준 자료를 확인하며 공부 중이다. 전부 초능력자 등급을 매기면서 실제로 일어난 케이스들이랬다.

“아, 이거. 안 그래도 저도 이상한 거 같아서 유나 씨한테 이야기하려고 했었어요. 테스트 영상이랑 등급이랑 좀 안 맞지 않아요?”

“그죠? 아무리 생각해도 4등급이라고 생각했는데 5등급이라 되어 있더라고요!”

이유나의 말에 나도 다시 자료를 확인했다. 5.1등급. 애매하기 짝이 없는 숫자지만 그래도 5등급 초능력자부터는 대우가 다르긴 했다.

“지형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잘 없긴 한데……. 그렇다 해도 너무 후해요.”

“5등급이라 하기에는 범위도 넓지 않고……. 능력도 제한이 있잖아요. 잘 쳐 줘도 4.5인데.”

파일 쪼가리와 모니터에서 반복 재생되는 테스트 영상을 나란히 놓은 채 이유나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스트 영상 속에서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학교 운동장에서 서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흙바닥이 바다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삐죽삐죽 솟구쳤다.

정말 괴상한 세계라니까.

“오, 벌써 찾아냈어요?”

“네?”

커피를 들고 우리 뒤를 지나가던 이 대리가 말을 걸었다.

“하긴 테스트 영상은 뉴스에 안 내보냈으니까 못 알아보겠네요. 이거 그거에요.”

이 대리는 씩 웃었다.

“김무영 게이트.”

“아!! 이게 그거에요?”

이유나가 팔짝 뛰었다. 이유나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나도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이쪽 세계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까 어디까지가 상식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무려 게이트가 붙는 사건을 모른다고 하면 안 되겠지.

“이게, 그…….”

대충 아는 척할 수밖에.

“전설의 시작! 진짜 궁금했었거든요. 끝까지 이건 공개 안 됐었잖아요. 이게 시작인데. 그래서 얘가 전 국무총리 사생아라고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게 나왔다.

“줄줄이 엮여서 다 잡혀갔죠. 덕분에 대통령까지 엮여서 난리였으니. 김무영도 다른 비리는 어떻게 빠져나갔지만 이거 때문에 실형 받았잖아요.”

연수 기간 때 백성찬 강사가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초능력자 특별법. 백성찬도 계속 경고했었는데 국무총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법인 모양이다.

“뭐, 애는 잘못 없었으니까 공개하기도 좀 그랬죠. 얘가 자기 등급이 이상하다고 이의제기를 안 했으면 묻혔을지도 모르고요.”

“아빠랑은 많이 다른가 보네요.”

“착한 애예요. 아빠 때문에 사춘기를 좀 험하게 겪긴 했지만.”

이 대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묘하게 친근감이 묻어나는 어조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리님이랑 아는 사이입니까?”

“우리 회사 소속이에요. 자기 아빠 싫어하니까 만나거든 그 얘기는 하지 마요.”

그럼 처음부터 말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나?

나는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 테스트 영상을 보았다. 능력을 알아볼 순 있지만 얼굴은 나오지 않는 각도였다.

이유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 대리에게 물었다. 이 대리는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걔가 지 아빠랑 생긴 게 꼭 닮았거든요. 만나면 바로 알아볼 테니까 미리 말해 주는 거예요.”

“음, 알겠어요. 혹시 만나게 되면 주의할게요.”

“저도요.”

이 대리는 싱긋 웃었다. 그냥 미소를 짓는데도 새하얀 치아가 돋보인다. 도대체 치아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나도 알고 싶다.

“두 사람 다 열심히 해서 좋네요. 등급 이상한 것도 바로 알아보고. 상으로 커피 사 줄게요. 1층 갈래요?”

“어…….”

이유나가 살짝 망설이는 틈을 타 내가 냉큼 대답했다.

“사 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신입 때 많이 얻어먹어요. 다 피와 살이 될 테니까…….”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 * *

“뭐 마실래요? 난 요거트 스무디.”

“전 딸기 스무디요.”

“아메리카노요.”

이 대리는 이유나를 돌아봤다.

“저 젤 싼 거 안 시킨다고 눈치 주는 그런 상사 아닙니다. 먹고 싶은 거 드세요.”

“진짜 아메리카노면 돼요. 저 단 거 잘 안 먹어서요……. 커피 좋아하고.”

“그래요?”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다행히 1층 로비에 있는 카페에는 점심시간만큼 회사원들이 몰리진 않았다. 회사원이라고 해봤자 여긴 새날 건물이고 새날 소속 직원들이 전부다.

물론 그렇다 해도 2층의……. 초능력자 등록을 위해 찾아온 방문객들이나 훈련을 받는 초능력자들 때문에 카페는 여전히 북적거렸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이왕 내려온 거 땡땡이나 치고 가죠!”

“대리님 일하기 싫어서 내려오신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한 팔 할쯤은 그럴 지도요.”

이 대리의 뻔뻔한 말에 이유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책상 많이 비어 있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나는 8층 등급산정부서 풍경을 떠올렸다. 책상은 많고 모두 사용하는 흔적이 있지만 절반가량은 비어 있었다.

“국가의 부름이 있어서요.”

“네?”

“연말이라서 각 기관에 등록된 초능력자들 실적과 나라에서 보고받은 거랑 다른 점이 없어야 하거든요. 매년 연말이면 그 업무 때문에 반은 나가요. 그래서 2층 창구도 그 난리고.”

이 드라마는 도대체 어디까지 설정이 되어있는 걸까? 정해영이 말할 때 좀 더 새겨들어야 했……. 아니지.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애초에 난 그 드라마 이름도 모른다. 내가 이 드라마에 들어와야 하는 이유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도 12월이랑 3월만 빼면 이렇게까지 난리 나진 않으니까 벌써부터 겁먹지 말고.”

“12월은 알겠는데 3월은 왜 바빠요?”

“유나 씨. 유나 씨가 헬스장을 다니려고 해요. 그런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네. 늦잠도 자고 싶고 친구랑도 만나고 싶고 그래요. 에이, 어차피 일요일이니까 월요일부터 하자. 이렇게 생각할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이 대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이유나도 마찬가지였는지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업계용어로 신학기 효과라고 합니다. 다들 3월이 되면……. 알겠죠?”

이 대리의 말에 대답하기 전에 진동 벨이 울렸다. 음료수가 준비되었다는 뜻이다. 이 대리는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 진짜 어디 치과에서 원장이랑 사진 찍었다에 내 딸기 스무디를 걸 수 있다.

음료수가 나오면서 짧은 휴식도 끝났다. 조금 있으면 이유나가 2층에 내려갈 시간이고, 한 시간 뒤에는 내가 2층에 내려갈 시간이다. 차라리 위에서 모니터와 서류를 뚫어져라 보는 게 낫지, 2층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났다.

세 명이서 음료수를 들고 직원용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입구 쪽에서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박서원이다!”

박서원?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박서원이라고요?”

이유나가 눈을 반짝 빛냈다. 요거트 스무디를 쪽 빨아 먹던 이 대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서원 씨가? 1층에 절대 안 내려오는 사람이?”

이 대리의 말에 나는 박서원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연수 중에 백성찬 강사가 말했었다. 현재 11등급에 제일 가까운 초능력자라고. 회사 소속 이랬었지.

1층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등록을 하러 온 초짜 초능력자거나 자기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오는 민간인들이다. 이 세계에서 초능력자들은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인지도가 높았다. 모두 그 유명한 초능력자를 보기 위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옷차림이 특이했다. F1 드라이버처럼 두툼한 소재로 만들어진 듯한 옷을 입고 그 위에 무스탕 재킷을 걸쳤다. 그 차림새를 보는 순간 직감했다.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애가 드라마 등장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확신을 가지게 해준 건 얼굴이었다. 아니, 시발……. 내가 남자 얼굴을 보고 이런 감상평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백성찬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고 이 대리도 마찬가지다. 이유나는 아이돌 출신답게 예뻤고. 그렇지만 저 남자는 다르다. 확신했다.

정해영은 말했었다.

‘내 새끼 얼굴만 뜯어먹어도 난 100년은 살 수 있다.’

또 말했었다.

‘눈초리는 살짝 올라가서 새치름하고, 목도 하얗고, 허리선은 또 얼마나…….’

난 걔가 변태라는 것을 걔가 중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 게 아쉽긴 한데, 어차피 신발 신으면 180은 되겠지. 오빠 키도 180 안 되잖아?’

‘반올림하면 180이거든?’

‘그리고 화룡점정은 눈 밑에 있는 점인데, 아니 어떻게 점이 그렇게 나란히 두 개가 콕콕 찍혀 있지? 누구 좋으라고? 나?’

‘미친년. 가서 자라.’

남자는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니 오른쪽 눈 밑에 난 점 두 개가 똑똑히 보였다.

확신했다. 이 남자가 정해영의 ‘내 새끼’,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서원 씨. 어쩐 일입니까?”

박서원과 안면이 있는지 이 대리가 말을 걸었다.

조용히 걷고 있던 박서원이 이 대리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잘생기긴 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런 얼굴이면 배우를 해야지.

박서원은 우리 앞에서 멈춰 섰다.

“아, 이쪽은 우리 신입. 여긴 이유나 씨고, 정해준 씨.”

박서원은 고개를 까딱 숙이며 인사했다. 나와도 인사를 하는데, 박서원의 가슴 부근에서 뭔가 툭 튀어나왔다.

“꺄아아아악!!!!”

비명은 다른 쪽에서 들렸다. 박서원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따뜻한 액체가 튀고 나서야 나는 박서원 가슴에서 튀어나온 게 검인 줄 알았다.

검이 빠졌다.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박서원은 비명도 못 지르고 입만 끔뻑끔뻑 움직였다. 검이 빠지면서 박서원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시발……. 쥐새끼 때문에 무슨 난리야.”

그리고 다시 박서원이 나타났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박서원은 쓰러진 박서원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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