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 그 드라마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나는 짜증을 내며 폰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자마자 잠들기 전에 맞춰 놓았던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매일 아침 연수원 침대에서 눈을 뜰 때마다 정해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며 히죽거리던 그 웬수 같은 얼굴을.
“해준아. 나 먼저 씻는다?”
“먼저 씻어.”
입사 동기, 연수원 룸메이트 김석준이 2층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왜 이렇게 됐지?
도대체 뭐가 문제였지?
다시 한번 정해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영문 모를 곳에 떨어진 지도 사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집에 돌아가 그 녀석 등짝을 때리고 말겠다고 오늘도 다짐했다.
* * *
그래, 정해영의 악행에 대해 말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 녀석이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는지?
그 녀석이 얼마나 내 몸과 마음을 괴롭혔는지?
정해영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내게 도움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녀석이 태어난 걸로 인해 내 인생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말하려면 24시간도 부족하다. 그러니 이에 대해서는 추후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다.
정해영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 일어난 사태만 보아도 그렇다.
……그래. 이 일에 대한 이야기만 먼저 해 보자.
2개월 전 즈음, 정해영은 드라마 하나에 빠졌다. 친구 없는 정해영은 날 붙잡고 드라마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야 아, 쟤가 친구가 없어서 오빠를 붙잡고 저러는구나. 하고 안쓰러워서 들어줬지, 그것도 한두 번이다.
정해영이 빠진 드라마는 16부작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목요일, 드라마가 끝나는 12시가 되면 내 방에 득달같이 쳐들어와서 짱알짱알 떠들어 댔다.
‘오빠, 오빠. 들어 봐. 오늘 내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니 새끼고 내 새끼고 알 바 아니다.
나의 무관심 속에서도 정해영은 꿋꿋하게 떠들어 댔다.
‘하, 내 새끼 미쳤나 봐. 뭘 먹고 그렇게 잘생겼지? 50분 동안 내 새끼가 숨만 쉬는 드라마 찍어 줬음 좋겠다.’
그쯤 되면 한 마디를 안 할래도 안 할 수가 없다.
‘미친 건 너겠지.’
‘케이블 드라마라서 CG가 좀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내 새끼가 살아 숨 쉬는 CG인데 뭐가 더 필요할까?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 정해영. 좀, 제발 닥치고 꺼져라. 어?’
물론 내가 정해영이 죽고 못 살던 그 드라마에 들어오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들었을 거다.
그래도 하나 아는 건 있다.
이 드라마의 15화에서 주인공을 제외한 모두가 죽는다.
“국가공인 초능력인증기관은 각 광역시와 자치도, 행정도에 하나씩 있습니다. 서울에만 예외로 세 군데 입니다.”
드라마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그건 기억한다. 정해영이 지랄을 떨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미쳐서 학살했다며 두 시간 내내 욕했다. 잘 거라고 방에서 쫓아내지 않았으면 밤새 내 귀에 대고 욕했을 것이다.
그때 정해영이 뭐라고 했더라. 기억해 내라, 내 머리. 넌 할 수 있어. 정해영처럼 멍청하지 않잖아.
‘한두 명 죽인 것도 아니고 서울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니까? 진짜 미친 거 아냐? 왜 갑자기 몰살루트인데!’
……기억해도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살아남는 건 정해영이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내 새끼’뿐이다.
“우리 새날은 1975년부터 국가와 협업하여 초능력자들의 인증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음. 이에 관해서는 지난 이틀 동안 충분히 이야기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강사, 백성찬이 말했다. 강사라고는 해도 회사 소속의 초능력자라고 첫날 소개했다. 백성찬이 손에서 뿜어내는 불꽃을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새날’이라는 회사가 드라마에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왔다면 여동생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 안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새날’은 내가 본래 최종합격한 회사 이름이니까. 드라마에 등장하는 회사와 이름이 같다면 걔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자, 오늘 나눠 드린 프린트를 보세요.”
강사의 말에 나는 책상 위를 보았다. 두툼한 책자가 있다. 이게 프린트라고?
“이제 여러분들은 초능력인증기관에서 일하게 되었잖습니까? 엮일 수 있는 모든 법률 내용입니다.”
난 질린 눈으로 책자를 보았다.
“어차피 관련된 법적 절차는 회사 법무팀이 처리하게 되니까 하나하나 다 외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만 기억하세요. 하지 말란 건 안 하면 된다.”
백성찬은 칠판에 큼지막하게 글을 썼다.
‘뇌물’. ‘부정청탁’.
그리고 그 위에 커다랗게 X표 쳤다.
“아는 사람이 각성했는데 등급을 좀 잘 받고 싶다네. 그런데 마침 내가 초능력인증기관에서 일하네? 받은 것도 있는데 한 등급만 올려 줄까?”
백성찬은 단호하게 말했다.
“초능력자 관련 범죄 형량이 장난 아닌 거 다들 아시죠? 벌금 최소 1억부터 형량은 10년 단위입니다. 특별법이라 변호사 잘 불러도 안돼요.”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책자를 팔랑팔랑 넘겨 봤다. 얼핏 봐도 보이는 숫자들이 단위가 크다.
“속으로 이런 생각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까짓것 안 들키면 그만 아닌가? 그렇죠. 안 들키면 그만이죠.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하세요. 안 들킬 것 같아요? 몇 번 비상벨 울려서 출동해서,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움직이다 보면 다 보여요. 아, 쟤 뽀록이구나.”
백성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신고하면 포상금이 2억이거든요. 저도 한 번 받아봤습니다. 선착순이라서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니까 하지 마세요. 다 들키니까. 그리고 보통 현장까지 오지도 않아요. 등급 산정이나 훈련 때 들키거든요.”
백성찬은 칠판을 지우며 말했다. 깨끗해진 칠판 위에 백성찬은 숫자를 써 내려갔다. 1, 2, 3…… 10.
“오늘은 여러분들의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겁니다. 초능력자 등급이죠. 옛날에는 알파벳 표기를 사용했었어요. F부터 S까지. S가 제일 높았죠. 그런데 지금은 아라비아 숫자 표기법을 사용합니다. 왜 그런지 아시는 분?”
강의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손을 들었다. 난 모르지만 눈치가 보여서 같이 손을 들었다. 나보고 말하라고 하면 안 되는데.
“다 아시네요. 맞아요, 알파벳 표기는 일곱 등급밖에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그걸로도 충분했지만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부족해졌습니다. S급 위로 SS급, SSS급 등이 생겼죠. 그것도 부족해서 플러스, 마이너스…….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백성찬은 열의가 넘치는 강사였다. 목소리에 아주 힘이 넘쳤다.
“그래서 1998년부터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해 등급을 나누었습니다. 1등급이 제일 아래고 숫자가 커질수록 높아집니다. 지금은 10등급이 최고지만 조만간 11등급이 탄생할 거라 얘기가 나오고 있죠.”
“박서원…….”
강의실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백성찬도 그걸 들었는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서원 씨가 유력한 후보자죠. 새날 소속입니다. 회사에 자주 나오진 않지만 가끔 출몰하니 만나면 사인이라도 받아 두세요. 30년 뒤에 제법 비싸질지도 모르니까요. 저도 세 장 정도 받아 놨습니다.”
뭐라는 거야, 저 사람.
“그리고 이 숫자 표기법이 좋은 이유가,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표현하기 애매했던 등급도 정확히 매길 수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보통 정수로만 얘기하지만 속사정은 다르거든요. 완전 난리에요. 예시로 제 면허를 가져왔습니다. 4년 전 거니까 지금은 좀 달라요.”
칠판 옆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에 면허증이 떠올랐다. 주민번호는 야무지게 지워져 있었다.
[백성찬(890621-1******)]
[K-SNA-150492a339sc1]
[5.8급]
[MAIN : 4.3]
[SUB : 2.8]
“여기서 메인은 메인 능력, 서브는 서브 능력입니다. 전 두 개 궁합이 좋아서 총 등급이 오른 케이스고요.”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입사 동기가 될 놈들의 눈이 번쩍번쩍 빛나는 게 보였다.
내가 이력서를 낸 새날은 이렇게 큰 회사가 아니었는데 도대체 그 드라마는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하긴 드라마에서 초능력이니 요괴니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 무슨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에서 그게 뭐야?
나는 정해영이 보여 준 화면을 떠올렸다. 오빠가 하는 게임이랑 비슷하다며 보여 준 드라마 캡처 화면이었다. 솔직히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잠실 타워를 휘감고 올라가는 용.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발치에 엎드려 있는 해태.
그리고 초능력.
……그러고 보니 그때 봤던 짤 중에 불 쓰는 애도 있었는데 그게 저 강사일까? 얼굴이 하얗긴 하지만 배우라고 할 만큼 잘생기진 않았는데.
“강사님의 다른 능력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랑 같은 방을 쓰는 김석준이 손을 들었다. 불이랑 궁합이 잘 맞는 능력이라. 바람?
“바람입니다.”
역시.
“화력은 역시 메인 능력이 세죠. 하지만 서브 능력을 잘 쓰면 위력을 더 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저한테 문자가 엄청나게 날아옵니다. 불조심하라고.”
“하하하…….”
연수생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백성찬은 정색했다.
“진짜요.”
“네…….”
이런 부분에선 쓸데없이 현실적이다. 아니지, 현실이긴 한가?
이 어이없는 세계에서 눈을 뜨기 전 나는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고대하던 첫 출근이었고 그 전까지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다.
그런데 누가 내 어깨를 툭 쳐서 눈을 떴다.
내 어깨를 친 사람은 김석준이었고 나는 영문 모른 채 그 녀석에게 끌려다녔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강의실에 앉았을 때도 난 이게 무슨 정해영 같은 꿈인가 싶었다.
강의실 TV 화면으로 잠실 타워를 감싸고 있는 용을 찍은 뉴스를 보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정해영한테 하도 드라마 얘길 들었더니 별 희한한 꿈을 꾸고 있다고.
그러나 꿈에서 잠이 들어도 계속 꿈이었다.
오늘, 세 번째 아침을 맞이하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쳤네, 진짜.”
옆자리에 앉은 김석준이 의아한 눈으로 날 보았다. 난 뻔뻔하게 백성찬을 보았다. 김석준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강의에 집중했다.
초능력자들의 사건 사고와 법률, 주의사항, 등급 산정 방법, 인증 절차, 새날 소속 초능력자들…….
듣고 있으니 역시 정해영이 떠올렸다. 걔는 이런 곳에 오면 오히려 좋아하겠지? 속없는 녀석.
정해영이 떠오르자 역시 그 드라마가 속을 썩였다.
내가 그 드라마를 단 한 편이라도 봤다면 이 정도로 욕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그 드라마 이름이라도 알았더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테다.
내가 정해영이 좋아하는 그 드라마에 대해 아는 건 딱 세 개.
드라마의 줄임말이 ‘빌더쓰’라는 것과,
드라마 15화에 몰살엔딩을 맞이한다는 것.
살아남는 것은 주인공 뿐.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시고, 내일 봅시다.”
시간은 정확히 여섯 시.
이 영문 모를 드라마 세계에 떨어지고 사흘 째.
서울시가 파괴되는 엔딩만큼은 피하고 싶다. 나는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정해영 등짝을 때리기 위해서라도.
그걸 위해 제일 먼저 주인공을 찾기로 결심했다.
얼굴도 모르는 주인공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