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52화
“저는 실패자입니다.”
알 수 없는 말에 청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도혁이 예상했다는 듯 끄덕였다.
“LVNN의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날 밤. 악몽을 꾸었습니다. 저는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고 그 속에서 저는 완벽한 실패자였습니다.”
“아! 꿈 말이었구나.”
“마치 전생과 같은 기시감에 꿈속에서조차 소스라쳤습니다. 그 꿈속에서 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광고를 하고 있었고, 현실처럼 무척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참히 버려졌고 실패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삶이었죠.”
회귀 전 첫 번째 인생에 대한 소회를 전하고 싶었다. 도혁은 꿈에 빗대어 전생의 실패한 삶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평생을 바쳐 일한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장면쯤에서 저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꿈이었지만 너무 생생해 소름이 끼쳤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거 혹시 나의 전생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 저의 생과 꿈속의 인생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똑같이 열심히 살고 있는 두 가지 인생이었는데 결론이 너무도 달랐거든요.”
도혁이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여기 두 가지의 인생이 있습니다. 죽으라고 앞만 보고 달려온 과정은 같았지만 한쪽은 정리 해고를, 그리고 다른 한쪽은 성공 가도를 이어가고 있어요.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두 번의 생에 걸친 진심이 담긴 말에는 힘이 있었다. 모두 숨죽여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도혁은 청중의 반응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똑같이 열심히 앞을 보고 달렸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존재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패배하는가.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삶이죠. 이 명제에 대한 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바로 ‘나’라는 존재 말입니다.”
청중을 한번 둘러본 도혁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꿈속의 실패한 인생에서 저의 시선은 온통 바깥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지향점이 나 자신의 반대편이었던 겁니다.
목표도 관점도 방향도 모두 외부로 향해 있었죠. 남들의 시선, 광고주의 바람, 소비자의 니즈, 상사의 컨펌,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만들고 싶은 광고에 대해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건 제가 나빠서도 게을러서도 아니었습니다.”
졸업생들은 조용히 선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저 관점이 남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져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너무 바쁜 일상에 그 방향성이 잘못됐는지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거죠. 꿈속에서 저는 밤새워 일했던 적도 많았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렸어요.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데도 망해 버리는 인생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에 달리기 전에 어디로 뛰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이죠.”
회귀했던 첫 번째 날을 떠올리며 도혁이 계속 연설을 이어갔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꿈속의 실패한 삶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목표점을 분명히 바라보되, 삶의 관점만큼은 나 자신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독단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무엇보다 나답게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심호흡한 도혁이 청중을 둘러보았다.
“앞서 사회자가 저에 대해 소개한 여러 타이틀을 기억하실 겁니다. 각종 시상식의 그랑프리, 돈, 명예, 광고주, 소비자의 열광적인 반응까지. 저는 어쩌면 이 나이에 감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성공은 바로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집중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답게 일한다는 것의 즐거움을 비로소 깨닫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도혁의 말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이 졸업생들을 돌아보며 연설을 이어갔다.
“오늘 졸업과 동시에 여러분을 보호하던 방패막은 모두 사라집니다. 부모님, 학생이라는 테두리는 없어지고 그 속에서 보호받던 여러분에겐 이제 자신의 삶과 사회를 짊어지고 갈 책임이 주어질 겁니다. 그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를 보호했던 대학은 배신을 할 겁니다.”
진지하게 연설을 하던 도혁의 눈에 짧은 장난기가 돌았다.
“지금까진 누군가에게 K대라고 소개하면 공부 잘했나 보다, 부모님이 자랑스러우시겠다는 칭찬을 들어왔겠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어이, K대 나왔으면 똑똑할 거 아니야, 이것도 해봐 저것도 해봐, 업무만 와장창 주어지겠죠.”
객석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졌다.
“더불어 질책도 이어질 겁니다. K대 안 되겠네, K대생이 이것밖에 못 하냐? 간혹 교수님의 얼굴에 먹칠도 하겠죠. K대에서는 뭘 가르쳤길래 이 모양 이 꼴이냐. 너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냐.”
교수석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도혁이 미소 지으며 마이크를 다잡았다.
“사회란 이토록 메마르고 팍팍한 곳입니다. 물론 이런 군제화된 사회 분위기를 넘어 더 나은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저를 비롯한 많은 CEO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잔혹한 법이죠.”
꼰대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기업 문화가 조금이라도 바뀌려면 아직 요원한 시점이었다. 도혁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런 기업 환경이 더더욱 개인의 시선을 밖으로 두도록 만듭니다. 타인의 인정과 관심 그리고 끝없는 타인과의 비교가 결국 나를 잊고 남을 위해 일하는 현실을 만드는 거죠.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호구로 전락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호구라는 말에 졸업생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은 경쟁이 치열한 곳입니다. 전쟁터와 다름없는 이 거친 사회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나답게 일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세요. 내가 바로 서면 비로소 시선을 밖으로 두어 남을 도울 여유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내 사업이 잘되고 내 광고가 잘 팔려야 어려운 소상공인을 돕는 광고도 만들 수 있고 사회에 기여하는 공익광고도 제작할 수 있습니다. 호구가 어떻게 남을 돕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졸업생들이 하나둘 끄덕이며 공감했다. 도혁이 마지막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오늘 호구로 살았으면 내일 그렇게 살지 마세요. 매일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인생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이상 인생을 조금 더 산 대학 선배의 잔소리였습니다. 졸업 연설은 원래 잔소리가 제맛이거든요.”
웃음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도혁이 웃으며 화답하곤 총장을 보며 물었다.
“총장님 잔소리하라고 부르신 것 맞으시죠?”
졸업 연설 뒤 축사가 뒤에 이어질 예정이었으므로 총장을 소환했다. 그가 껄껄 웃어젖히며 일어섰다.
“맞습니다. 이어서 제가 잔소리를 해볼까요?”
마이크를 잡은 총장의 잔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지만 연설의 여운은 가시지 않았다. 도혁의 연설은 대학가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 * *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대한민국 파티셰의 은인 명도혁 대표님 아닙니까!”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고석구 베이커리였다. 고석구가 창문 너머로 도혁을 발견하자마자 문 앞으로 달려 나와 그를 맞았다.
“모두 잘 지내셨지요?”
“그럼요, 그럼요. 명 대표님 오신다는 말 듣고 우리 제빵협회 사람들 모두 모였습니다. 얼른 들어오시죠.”
빵집 안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빵 냄새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도혁은 사장님들과 한 명 한 명 손을 맞잡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다들 이제 지역에서 제법 유명해졌습니다. 요즘은 입소문이 인터넷으로 나드만. 아주 멀리에서도 찾아오고 인증샷인지 찍고 난리가 났어요.”
“테이블 한두 개 있는 작은 가게들이 오히려 더 인기라니까요. 여기 심 사장네 양파스콘은 만날 오전에 품절입니다.”
“하하, 이게 다 명도혁 대표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내 며칠 전에 뉴스 보니까 유명인 다 되셨던데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시고 정말 반갑습니다.”
앞다투어 제 앞에 도혁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던 사장들이 도혁에게 각자 시그니처 빵을 내밀었다. 도혁은 하나하나 조금씩 떼어내 맛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빵은 대한민국 빵이 최고입니다. 뉴욕에 유명한 파티셰들 빵 아무리 먹어도 우리 사장님들이 최고라니까요.”
“아이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손맛은 동네 숨은 장인들을 따라갈 수가 없지요. 이렇게 맛있는 빵을 먹었는데 저도 보답을 해야죠. 이거 받으시죠.”
[사람사랑 in DW애드]
도혁이 내민 명함에는 ‘사람사랑’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고석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명함의 앞뒤를 훑어보았다.
“회사명이 사람 사랑입니까? DW애드 이름도 있고요.”
“제가 새로 만든 중소업체 전문 홍보 레이블입니다. DW애드 소속이지만 팀을 따로 꾸렸습니다.”
“오! 그 브랜드명이 사람사랑이군요.”
“네. 제가 팀장으로 팀을 꾸려갈 겁니다. DW애드 내에서도 다른 대기업 수주 팀과 경쟁해야 하니 당연히 전력투구할 거구요. 제가 지는 걸 좀 싫어해서요. 사장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지요. 보자, 사람사랑이라. 광고 회사치고는 이름이 뜨끈합니다!”
“잘 보셨습니다. 작은 사람들이 작은 사업을 사람답게 꾸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입니다. 동네 빵집 연합의 사례처럼 대기업과 무조건 다투고 소송하는 대결 구도가 아닌 상생의 방향을 찾아가며 서로 발전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오래된 저의 꿈입니다. 이제 그 소박한 꿈을 실천해 보려구요.”
“소박하다니요.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한걸요.”
“이야, 역시 명 대표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이여. 안 그렇소?”
심 사장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도혁을 추켜세웠다.
“미국에서 제일 큰 회사들이랑 일하고 엄청나게 큰 상을 받고 뭐, 그랬다고 들었구만. 그렇게 성공했으면 우리 같은 사람 돌아보지도 않을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맛있는 양파 스콘을 어떻게 외면합니까!”
“하하, 고것은 맞는 말이긴 하구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심 사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대단하시오. 뭔가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이 든달까요. 우리 동네빵집 연합도 세계로 뻗어가는 거 아닙니까!”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빵을 만드시는 분들이니 가능하시죠.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런 말만 들어도 좋구만!”
“제가 일 벌이는 걸 워낙 좋아해서 말입니다. 근처에 어려움 겪는 소상공인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이거 동네 골목 사장들이 슈퍼맨을 얻었구먼. 하하.”
화기애애한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도혁은 한층 밝아진 사장님들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잔잔히 웃었다.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세상에 둘도 없는 가족 같은 회사를 꾸리며 개인적인 행복까지 얻었다. 이 축복과 같은 두 번째 생에서 과거의 정보를 가지고 소상공인을 돕는 일은 그에게 또 다른 의미를 안겨줄 것이다.
어느 제품군이 어떻게 교묘하게 죽어 나갔는지 모두 알고 있거든.
도혁은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며 작은 빵 하나를 집었다. 창가에 든 고운 햇살을 타고 따끈한 빵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새로운 의미의 성공을 가져다줄 세 번째 생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