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51화
[영화배우 전서윤, 오스카 여우 조연상, 신인상 동시 수상 쾌거!]
[프랑스와의 뮤즈 전서윤, 오스카 휩쓸어. 한국 영화계 새바람 일으키나.]
[오스카의 연인 전서윤 뉴욕에서 결혼 발표, 배우자는 3대 광고제 수상자인 광고대행사 대표로 밝혀져.]
[배우 전서윤 LVNN와 웨딩 컨셉 화보 촬영. 스텔라와 콜라보 작업.]
오스카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서윤의 결혼이 발표되었다. 연일 기사가 터지고 도혁은 다시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DW애드의 현관 앞에 죽치고 있는 기자들을 헤치고 출근한 탁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이제 기자들 그만 올 때도 되지 않았어? 하여간 집요한 인간들이야.”
“한국 잡지사 기자들은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더라구요.”
“오늘 명 대표 출국하는데 한발 늦었네.”
“그러게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도 대표님 따라가기 벅찬데 말입니다.”
이진우가 손가락으로 블라인드를 젖히며 건물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오늘 신규 직원들 첫 출근인데 길 막혀서 놀라겠습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아니고 광고대행사에 기자를 뚫고 출근해야 하다니.”
“이야, 우리 DW애드 처음 만들었을 때 생각나는구만. 명 대표가 회사 만들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심장이 뜨끈하더라고. 태강에서 나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고나 할까.”
“대표님께서 그 당시 얘기를 가끔 하십니다. 그때 탁기준 국장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DW애드의 기반을 닦는 데 더 오래 걸렸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으래? 우리 명 대표가 그런 말도 했어?”
턱을 어루만지던 탁기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우리 멤버 중 하나라도 빠지면 섭섭하지. 다들 대단해. 누구보다 명도혁 대표가 최고지. 개성 강한 인간들 데려다 가족처럼 만들어 버렸잖아.”
“돈은 내가 벌 테니 하고 싶은 크리에이티브 마음대로 만들라고 하셨죠. 저는 제작팀으로서 그 말이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
“크으. 지금 들어도 명언이구만.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성과를 낸 대행사가 지구 위에 또 있을까?”
“또 있으면 섭섭하죠. 그나저나 대표님은 잘 도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탁기준과 이진우의 만담을 뚫고 신입 사원 한 명이 출입문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오늘 처음 출근한 신입입니다. 그런데 DW애드가 원래 이렇게 유명했습니까? 셀럽이라도 된 줄 알았습니다.”
“곧 셀럽이 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탁기준의 목소리가 득의양양하게 울렸다.
* * *
같은 시각 인천공항에서는 첩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여자 배우로서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두 가지 분야에서 수상한 전서윤에게 국민적 관심이 모였다. 더구나 열애설과 결혼 발표가 동시에 이루어지다 보니 공항은 북새통이었다.
“제가 먼저 나갈게요. 뒤따라 오세요.”
“누나, 뒷문으로 나가요. 제가 안내할게요.”
“아니야. 굳이 뭐, 죄지은 것도 아니고 축하하러 온 거잖아.”
“기자들이요?”
“팬분들이. 새벽부터 기다리셨다고 하던데 직접 얼굴을 보이는 게 예의인 것 같아.”
“같이 가시죠.”
도혁이 재킷을 들며 나가려 하자 전서윤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 혼자 가요.”
“저 난리 통에 던져놓고 어떻게 갑니까. 같이 가요.”
“아니요. 이건 공인으로서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부분이에요. 기자들이 기사 써내는 건 할 수 없지만 도혁 씨에게 무리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바쁘시잖아요. 저기 끌려가면 며칠을 시달릴 텐데 도혁 씨 업무까지 방해하는 나쁜 여자 만드실 거예요?”
도혁은 LVNN의 아시아권 새 광고 기획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전서윤은 비행기 안에서도 내내 격무에 시달리는 그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전서윤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눈빛을 할 때는 말리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매니저에게 당부했다.
“경호 잘 부탁합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즉시 전화 주세요.”
“저희한테는 일상이니까요. 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다부지게 짐을 챙긴 매니저가 전서윤과 함께 먼저 일어났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불이 켜진 듯 사위가 밝아졌다.
그 화려한 빛 속으로 전서윤이 유유히 발을 옮겼다. 대배우의 남자가 된 걸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전서윤이 무사히 까만 리무진에 올라타는 걸 확인한 도혁이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차 뒤로 기자들의 차가 줄지어 뒤따랐다. 전서윤의 말처럼 며칠을 시달릴 모양이었다.
후우, 한숨을 뱉은 도혁이 천천히 발을 떼었다. 공항에서 차를 탈까 하다가 조금 길을 걸어 나왔다. 한차례 소동이 벌어졌던 공항과 달리 아침의 거리가 한산했다.
도혁은 생수를 사기 위해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편의점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브랜드 편의점이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공항길 편의점]
아주머니는 아침부터 얼굴을 구긴 채 가게의 파리를 거친 길로 쫓고 있었다. 장사가 잘되지 않는지 주인의 한숨이 좁은 가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도혁은 빠르게 가게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꽤 나쁘지 않은 입지였다. 큰길가에 있었고 공항에서도 멀지 않았다. 공항 인근에 위치한 민영 주차장과의 거리도 가까웠고.
도혁은 지폐를 건네며 아주머니에게 툭 말을 던졌다.
“비싼 품목을 모아두시죠.”
“네??”
놀란 아주머니의 눈이 커졌다. 도혁이 눈을 곱게 휘며 설명했다.
“저기, 아주 비싼 아이스크림이 있지 않습니까? 해외브랜드의 초콜릿도 있구요.”
“그, 그렇죠.”
“그걸 가급적 한군데 모아두고 근처엔 저렴한 상품을 진열해 보세요.”
브랜드 편의점에서 흔히 쓰는 전략이다. 비싼 상품을 모아두면 그 상품의 수요층이 찾기 쉬울 뿐 아니라 고급 상품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게 된다.
또한 일반 소비자에게는 가격을 대조함으로써 옆쪽에 진열된 상품이 더 저렴해 보이는 효과를 주는 것이다.
아, 라는 탄식이 아주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혁이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관광 상품을 조금 같이 팔아보시죠. 초콜릿 같은 간단한 품목으로요. 저도 방금 공항에서 나왔는데 이 편의점이 가장 가까웠거든요. 주차장까지 가는 관광객에게 좋은 미끼 상품이 될 겁니다.”
짧은 조언을 남기고 도혁이 가게 밖을 나섰다. 창으로 비친 아주머니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도혁은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해 먼저 DW애드 본사로 향했다.
“대, 대표님!!!!”
“이게 무슨 일이야. 명도혁 대표님이닷!”
한바탕 난리가 났다. 돌아온다곤 했지만 정확한 날짜를 말해주지 않았기에 갑자기 나타난 도혁을 보고 모두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습니다. 엊그제 오스카랑 결혼 기사 보고 한동안 미국에 계시나 했거든요.”
“오기로 한 거 하루라도 빨리 와야지. 성격 급한 거 모르냐? 잘들 지냈지?”
“그럼요! 대표님! 대표니이이이이이임!”
황도준과 도무진을 필두로 직원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회사 대표의 귀환이 아닌 출장 간 아빠인 듯 기뻐하는 직원들을 보며 정말 돌아오긴 했구나 실감했다.
“대표님, 당장 업무 시작하십니까?”
“얼굴들만 잠깐 보려고 들른 거야. 이제 집에 가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행기 안에서 계속 작성했던 LVNN의 기획안을 건넸다.
“이거 검토해서 이틀 내로 분석 자료 내도록. 팀장급, 아니지 이제 대리급 이상 회의할 거니까 준비 철저히 해.”
“넵! 알겠습니다!”
“이틀 뒤에 본격 아이데이션 회의 들어간다. 그리고 조만간 승진 발령 있을 거니까 그렇게들 알도록. 이상.”
“내일 당장 안 하시구요?”
도혁의 성격이 급한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황도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 도혁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내일은 가볼 곳이 있어.”
* * *
“이게 누구신가. 세계 3대 광고제를 석권하고 뉴욕을 제패했으며 급기야 오스카의 여왕 전서윤 배우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 천재 DW애드 명도혁 대표님이 아니신가.”
“장황하네요. 카피는 간결해야죠.”
“이런, 만나자마자 한 방 먹었구만. 하하.”
도혁이 방문한 곳은 모교였다. 은사의 연구실을 찾은 그를 맞으며 이진태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청출어람이야, 청출어람. 이런 대기업인이 우리 학교, 우리 과에서 나오다니 영광이지, 암.”
“초대해 주셔서 제가 영광이죠.”
“그래, 준비는 잘했지? 졸업 연설이라니 내가 다 떨리는구만.”
얼마 전 이진태와 대학 총장이 도혁에게 졸업 연설을 부탁해 왔다. 아직 그럴 주제가 못 된다 거절했지만 이진태의 반응은 완고했다.
“원래 완곡히 거절하려 했는데 교수님 얼굴 보고 하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미래의 광고인을 보고 해야지. 말했지 않나, 성공하는 광고인, 마케터가 늘어야 우리 업계가 좀 더 발전하지 않겠어? 우리 광고주님들도 인식을 달리하고 말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성공한 광고인으로서 더 승승장구해야지. 명도혁의 앞길이야 물론 창창대로겠지만 말이야.”
“사고 안 치고 모범을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 암, 그럼 천천히 자리를 이동해 볼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이진태가 재촉했다. 졸업식이 거행될 대강당에는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대학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총장과 인사를 나누고 강당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졸업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학을 두 번이나 졸업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저절로 웃음이 새었다. 도혁은 미리 준비해 둔 연설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덮어버렸다.
“다음으로 자랑스러운 선배님의 졸업 연설이 있겠습니다. 최근 세계 3대 광고제를 제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신 분이에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광고인이자 마케터이시죠. DW애드의 명도혁 대표님.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고 도혁이 단상 위에 올라갔다.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 때쯤 그가 마이크를 앞으로 당겼다.
“안녕하십니까. DW애드의 대표이자 여러분의 선배, 광고홍보학과 명도혁입니다.”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도혁은 한 손을 들어 연설문을 보여주었다.
“총장님께 졸업 연설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무척 설렜습니다. 저에게는 성공의 상징과 같은 일이었거든요. 하여 밤을 새워 열심히 연설문을 준비했습니다. 무려 12페이지네요. 아마 다 읽으면 몇몇 분은 졸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중에 짧은 웃음이 터졌다. 도혁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연설문을 읽지 않을 겁니다. 여기, 바로 이 강당에 들어서는 순간 꼭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거든요.”
심호흡한 도혁이 청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짧지만 저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실패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