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49화
초고속 엘리베이터였다. 소음도 없이 조용하게, 하지만 무척 빠르게 엘리베이터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이동했다.
화려한 펜트 룸보다 더 높은 곳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텔라의 말처럼 역시 세상엔 예상을 뛰어넘는 더 높은 곳이 있는 법인가보다.
스텔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도혁에게 속삭였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아무나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가면을 벗어주시겠어요?”
“그러지요. 혹시 어떤 분을 만나게 되는 겁니까?”
“보시면 바로 아시게 될 거예요. 모를 수 없는 분이거든요.”
스텔라가 대답하며 눈짓을 보내자 피에르가 커다란 문을 두드렸다. 곧 안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일행을 안내했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한 내실은 어둑한 방이었다. 층고가 높은 천장을 둘러싸고 위치한 책장 속에 책이 빼곡했다.
서재와 같은 풍경에 내심 놀랐다. VVVIP의 파티라더니 책이나 읽자는 건가.
내심 웃으며 도혁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쪽으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 이동하자 커다란 회의실이 등장했다. 곧 기다란 원목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다섯 명의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스텔라의 말대로 한가운데 앉은 남자를 보자마자 한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도혁은 옷깃을 바로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DW애드의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회장님.”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도혁과 인사를 나눈 남자는 바로 LVNN의 회장이었다. 곁에 앉은 네 사람 역시 타임지에서나 볼법한 글로벌 기업의 수장들이었다.
대충 엄청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겠거니 짐작은 했었는데, 막상 마주하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신기하기도 했었고.
TV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들만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 기분이라고나 할까.
도혁이 반듯하게 자리에 앉자 여러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꽂혔다. 도혁은 그 눈빛들을 피하지 않고 번갈아 바라보았다.
LVNN의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띄며 도혁을 보았다.
“그래, 이분이 요즘 뉴욕에 혜성같이 나타난 뉴페이스라고요?”
“세계 3대 광고제를 최단 기간에 휩쓴 인재입니다.”
“어찌나 스텔라와 피에르가 번갈아가며 칭찬을 하던지, 입이 닳는 줄 알았습니다. 하여 얼굴 한번 보고 싶어 이렇게 모셨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회장님. 명도혁 씨가 이번에 고렌느를 물리친 프로젝트를 직접 진행한 장본인입니다. 기억하시죠?”
“그래, 맞아. 고렌느에 크게 한 방 먹였다고 했지?”
스텔라의 말에 회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거 뭐냐, 쪽제비같이 생긴 놈. 그 자식 눕혀 버렸다면서요.”
“아, 브레드요? 지금 정말 몸져누웠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맞아. 브레드 그놈, 한 번 더 나대면 가만두지 않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아주 시원하게 처리하셨습니다.”
“고렌느가 제 발등을 스스로 찍고 있어서 도끼날을 조금 갈아줬을 뿐입니다.”
도혁의 말에 회장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스스로 망하는 집에 불이나 붙여줬다?”
“네. 맞습니다. 회장님.”
“어디 남의 손에 있는 도끼날 가는 일이 쉬웠을까. 듣던 대로 기개가 대단합니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LVNN 회장의 곁에서 유심히 그를 보던 남자가 말을 던졌다.
“우리도 인사 좀 합시다.”
“참, 우리 캠페인 얘기하느라 인사도 못시켰네. 여기도 다들 아는 얼굴일 테니 서로 인사 나누시죠.”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회장들이 번갈아 도혁에게 인사했다. 역시 얼떨떨한 기분으로 한 분 한 분 눈을 맞추며 눈도장을 찍었다.
도혁은 문득 처음 광고를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10만원 짜리 라디오 상품권 광고주를 찾아 거리로 나왔을 때 참 막막했었는데. 광고계에 발을 들인 올챙이 적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글로벌 IT 기업 회장이 술을 권했다.
“그래도 명색이 파티인데 한잔하셔야죠. 젊은 사람들은 죄다 가면 쓰고 놀고 있더라만, 우리 늙은이들은 이리 기력이 없어 뒷방에서 위스키나 마신답니다.”
“위스키 굉장히 좋아합니다. 맥켈란이네요.”
경매에서나 볼 법한 엄청난 가격의 위스키였지만 최대한 촌티를 내지 않고 공손히 술을 받았다.
IT 기업 회장이 고개를 기울이며 도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 안사람이 한국인이라 명 대표 얘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사모님께서 한국인이시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드러내셔서 저도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맞아요. 안사람이 한국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서 명도혁 씨의 활약을 볼 때마다 기뻐하더군요. 대단한 CEO가 나타났다고 칭찬이 자자했어요. 한번 명도혁 대표와 같이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렇게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LVNN에 이은 초대형 광고주들의 등장이었다. 모두 도혁의 캠페인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좀처럼 긴장을 하지 않는 도혁이었지만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곁에 있던 다른 기업의 회장 역시 말을 보탰다.
“저저, 저 사람 욕심 많은 것 보시게. 위스키 한 잔 주고 명도혁 씨를 선점하는 건가?”
“발 빠르게 움직여야 이 험한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지 않겠어?”
“이런, 저쪽은 위스키로 공략했으니 이쪽에선 뭘 드려야 하나. 선입금?”
농담처럼 툭 말을 던진 남자는 사과폰의 창시자였다. 전생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함께 대화를 나누는 현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과폰 회장은 잠깐 손가락을 까딱여 비서를 부르더니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곧 네모반듯한 트렁크 하나가 도혁의 앞에 놓였다.
“명도혁 씨, 열어보시죠.”
“저 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아무렴 위스키 한 잔보단 나을 겁니다.”
트렁크 속엔 놀랍게도 그의 말처럼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단도직입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으로 유명했던 그다운 행동이었다.
LVNN 회장이 끌끌 소리를 내어 혀를 끌어 찼다.
“명색이 파티인데 사람 초대해 놓고 계약할 생각이나 하고 말이지. 이 사람들 언제 철이 들는지.”
“인재는 보이는 곳에서 즉각 영입하는 것이 저의 전략입니다. 언제까지 LVNN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죠. 회장님이야말로 유능한 인재 독식하려는 욕심 좀 놓으시지요.”
“이런, 속내가 들킨 건가. 하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화가 날카로웠다. 그 화제의 중심에 도혁이 있었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모두 소중한 DW애드의 광고주로 만들 작정이었으니까.
역시 가재의 마음은 게가 아는지, 도혁의 기색을 눈치챈 피에르가 분위기를 전환했다.
“자자, 말씀하신 대로 오늘은 오랜만의 파티이니 편안하게 인사들 나누시고 추후에 각각 미팅을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럴까? 홍보팀에 가까운 날로 미팅 잡으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도 지시해 놓겠습니다.”
“회장실로 직접 오세요. 저는 중요한 일은 즉시, 즉각 처리하는 편이라서요.”
회장들이 앞다투어 홍보팀과의 미팅을 권유하는 가운데, 사과폰 회장은 마지막까지 도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강조했다.
“우리 쪽에 제일 먼저 오셔야 합니다.”
도혁은 그러마 짧게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회장님, 이 중에서 제일 잘나가게 되실 거거든요.
도혁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연했다.
“한 분 한 분 직접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이번 생에는 꼭 건재한 모습으로 오래 함께 일했으면 하는 진심이었다.
* * *
다시 돌아온 파티장은 부산했다.
VVIP 내실을 나와 가면 무도회장을 벗어난 후 직원들이 모여 있는 파티 현장으로 돌아왔다.
‘어째, 여기가 제일 화려하네.’
아이러니하게도 독서 모임처럼 소박하게 칵테일이나 홀짝이고 있던 VVIP실의 분위기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었다.
위층의 테라스에 기대어 파티장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강태오와 차현우는 벌써 술이 거나하게 취해 무어라 어깨 동무를 하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탁기준은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모니카와 함께 모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진우의 모습도 보였다.
TV에서 볼 법한 셀럽들과 어울려 파티를 즐기고 있는 직원들을 보자 가슴이 벅차왔다.
동시에 VVIP룸에서 앞다투어 도혁을 영입하려던 회장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사과폰 회장이 돈 상자까지 내밀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동안 꿈꿔왔던 마케터로서의 성공. 그리고 3대 광고제를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크리에이티브와 화려한 뉴욕의 생활까지.
꽃길만이 펼쳐진 맨해튼의 밤이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무언가를 잊은 듯 허전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도혁은 얼마 전부터 느꼈던 이 정체 모를 공허함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만 눈감았던 아릿한 심장의 울림이었다.
화려한 파티의 조명 사이로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진행했던 동네 빵집의 광고가 겹쳐 보였다.
빵을 반죽하던 장인의 투박한 손, 아이를 위해 건강한 빵을 손수 만들던 엄마의 정성, 그리고.
LVNN의 화려한 로케 촬영 현장과 달리 초라하기 그지없던 빵집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이 동시에 떠올랐다.
-어유, 대표님이 훤칠하구만. 이쪽으로 앉으시우.
-이거 우리가 만든 빵인데 가져왔어요. 거, 김 사장은 안 왔는가?
좁은 빵집 안에서 테이블 몇 개를 붙여 만든 PT 자리였다. 갈라진 손끝으로 의자를 빼며 앉으라고 권하던 사장님들, 삐, 소리를 내며 마이크를 테스트하던 사장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방송국 뒷골목의 꽈배기집 할머니의 얼굴도 동시에 떠올랐다. 도혁에게 비법을 전수하겠다는 할머니를 겨우 말리며 도망치듯 뛰어나왔었지.
소박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소상공인들,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 그리고 전서윤의 투명한 미소와 말간 눈동자를 떠올리자 명치끝이 뻐근해졌다.
도혁은 자세를 바로 하며 벌컥 생수를 들이켰다. 그런 그의 곁으로 최민아가 다가왔다.
“대표님, 여기 계셨네요? 이렇게 높은 곳에 있으니 우리가 못 찾았죠.”
“민아야.”
“네?”
최민아가 토끼 눈으로 도혁을 올려다보았다. 뉴욕에 온 이후로 도혁이 최 팀장이 아닌 민아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나 조금 무서워지려고 해요.”
“민아야. 나 이제 내려오려고 한다.”
“네? 내려온다구요?”
“높은 곳에 있으니 못 찾겠다면서.”
알 수 없는 말에 최민아의 고개가 기울었다. 여린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갔다. 도혁은 시원한 밤의 공기를 맞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파티 끝나고 내일 아침에 모두 회의실로 모여. 할 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