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245화 (245/252)

광고 천재 명도혁 245화

고렌느의 시즌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화면 가득 벚꽃 비가 내리고 게이샤가 사박사박 꽃길을 걸어간다. 근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핑크빛 비주얼과 동양풍의 화면구성이 인상적인 깔끔한 광고였다.

게이샤로 등장한 모니카가 인형처럼 무미건조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스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모니카의 서양적인 신비로움에 동양의 미를 더해 아름다운 비주얼을 완성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영상물을 돌려보던 브레드가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젖혔다. 그 곁에서는 홍보팀장이 손바닥을 비비며 함께 웃고 있었다.

“고렌느의 모니카라니. 스텔라가 배 아파서 쓰러지는 모습이 벌써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야. 아마 커피 마시고 있었으면 컵이라도 던져 버렸을걸? 하하.”

“맞습니다. 모니카가 누굽니까. 무려 LVNN의 뮤즈이자 상징 아닙니까! 제가 입장 바꾸어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솟을 일입니다. 정말 속이 시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 저기, 모니카가 기노모 입고 걷는 걸 볼 때 얼마나 화가 날까 생각하면 나 역시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야. 너무 신나서 말이지. 하하.”

“대단하십니다. 누가 이 대단할 일을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역시 브레드 디렉터님이십니다.”

눈물이 나도록 껄껄 웃던 브레드가 뚝, 웃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것이다.

“그래, 모니카랑 LVNN 쪽 동향은 계속 체크하고 있지?”

“네. LVNN에서는 모델을 빼앗긴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형상입니다. 보고드렸다시피 모니카가 몰디브 로케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우리 쪽에 붙은 걸 모르니까 모니카를 모델로 계속 썼겠지?”

“맞습니다. 특히 모니카는 오랫동안 LVNN의 모델로 활동해 왔으니 전혀 의심하지 못한 눈치입니다. 스텔라의 식구나 다름없다고 들었습니다.”

“식구 같은 소리하네. 모니카도 빨리 정신 차려야 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브레드가 미간을 좁히자 홍보팀장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기, 모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모니카가 이중 계약 상황이라 추후 소송이 우려됩니다. LVNN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거야 모니카가 이중 계약한 부분이지, 우리가 문제 될 일은 없지 않나?”

“네?”

“우리 계약서 찬찬히 읽어봐. 위약금 물어준다는 내용 따위는 없어. LVNN 쪽 계약서에 이중 계약 관련 조항이 있겠지. 그걸 어긴 건 모니카 자신이고 말이지.”

“아…….”

홍보팀장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는 그를 보며 브레드가 혀를 찼다.

“이런, 홍보팀장도 마음이 약하구만.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야. 알아서 잘살겠지. 모니카 돈도 많은데.”

“네. 뭐, 돈이야 많겠지만……. 디렉터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도 재결합도 하시고, 다음 시즌 우리 고렌느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모니카의 이중 계약 문제를 정리하시는 게 깔끔해 보입니다만.”

“재결합이라니. 나랑 모니카 말인가?”

브레드가 코웃음을 치며 일어섰다.

“재결합도 안 했고, 다음 시즌 모니카랑 함께 작업할 생각도 없어.”

“네?? 한 시즌 만에 결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언제 적 모니카야. 거기다 LVNN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이번엔 한 방 먹이려고 활용한 거지만 우린 고렌느만의 새 얼굴 찾아야지, 왜 엊그제 파티에서 만난 샤틴 있지? 그쪽 기획사 컨택 넣어봐.”

홍보팀장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감추느라 입속의 살을 꾹꾹 씹었다.

창가로 고개를 돌린 브레드가 맨해튼 거리에 걸린 모니카의 광고를 보고 다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우리 모니카, 기모노가 아주 잘 어울리는구만. 한 시즌 즐기기 딱 좋은 비주얼이야. 하하.”

홍보팀장이 낮은 한숨을 삼켰다.

* * *

DW애드의 사무실이 분주했다. 평소에도 바빴지만 뉴욕에 온 이후 가장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부터 카운트다운이지? D-3. 최종 스케줄 점검하고, 강 국장!”

“…….”

“강태오 국장!”

소리치는 차현우를 보며 최민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쉿, 그냥 내버려 두세요. 지금 광인 모드라구요.”

“아, 가끔 저 자식 컨셉이 부러워. 뭘 해도 미친놈이라고 아무도 안 건드리잖아. 우리도 미쳐가고 있구만. 나도 광인이라고!”

“우리도 광인은 맞죠. 광고인.”

도혁이 커피를 내밀며 툭 사장님 개그를 던졌다. 최민아가 어이없어하며 타박했다.

“서울팀 가서 서운했지만 탁 국장님 아재 개그 안 듣는 건 좋았는데 이럴 거예요?”

“분위기 풀려고 일부러 농담한 거라고. 까칠하기는.”

“까칠은 저어기, 찐광인 강 국장님이 까칠하시죠. 어제부터 우리가 묻는 말도 무시하고 온종일 뭐 씹은 얼굴로 저러고 있다니까요?”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강태오의 폐인 모드였다. 도혁이 흐뭇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강 국장님 저럴 때 엄청난 거 나오잖아. 기대해 보자고.”

“컨펌까지 완료한 시안인데 디테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거잖아요. 강박이 어마무시해요.”

“맞아. 강 국장님이야말로 진짜 프로지. 아니, 프로를 넘은 예술인, 크리에이터, 비주얼 장인. 아, 이번엔 사운드 장인인가?”

“그러게. 이번 캠페인 사운드 예술이더라.”

도혁의 말을 듣고 있던 차현우가 맞장구를 쳤다.

“서울에서 발굴했다는 팀인데 미국으로 아예 데려오고 싶어. 기본기도 탄탄하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끝내주지 않아?”

“제 생각에도 뉴욕이 더 잘 맞을 것 같아요. 사운드 디렉터가 원래 뉴욕에서 유학했었대요.”

“그렇구나.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사운드를 맞춰내다니 빨리 데려오고 싶다. 그 팀 디렉터가 정말 찰떡같이 컨셉을 알아듣더라고.”

사운드까지 완벽하다며 도혁이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곤 뉴욕과 서울의 일정을 꼼꼼히 체크하기 시작했다.

“스케줄에 차질은 없죠? 차 국장님이야 강박적으로 챙기시니 문제없을 거고, 서울 쪽은 어때요?”

“내가 확인했어. 그리고 서울 직원들도 한 강박 하잖아? 탁 국장이 업무적으로 정확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한중일, 그리고 동남아 동시 오픈이다 보니 신경이 쓰이네요. 뉴욕과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요.”

“역시 LVNN, 스케일이 달라요. 그쵸?”

최민아가 전체 캠페인 캘린더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순간 출입문이 열리며 성큼 누군가가 들어왔다.

“점심들 드셨습니까! 함께 식사나 같이하시죠.”

“어! 피에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캠페인 막바지에 최종 점검차 들렀습니다. 겸사겸사 우리 고생하신 분들과 식사도 함께하고요.”

피에르의 시선이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스케줄표에 고정되었다.

“이제 며칠 뒤면 결판이 나겠군요. 고렌느 시즌 광고는 벌써 나왔던데 말입니다.”

“네. 퀄리티 괜찮더군요. 일본풍을 고급스럽게 잘 버무렸더라고요.”

“일본풍이 너무 소비되는 경향이 있어 딱히 신비롭진 않았습니다. 비평도 썩 좋진 않아요.”

피에르가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건넸다. 중간쯤 고렌느의 시즌 광고에 대한 비평이 실려 있었다.

“방금 나온 주간지입니다. 모호한 컨셉과 과소비된 동양풍이 의도를 알 수 없는 광고라는 평이에요.”

“혹평이네요. 저는 나쁘지 않게 봤는데.”

“저도 뭐 무난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비평가들은 원래 까다롭지 않습니까? 브레드 그 자식은 꿈쩍도 안 하겠지만요.”

피에르가 코웃음 치며 브레드를 비판했다.

“그 자식은 우리가 손썼다고 생각하겠죠. 고렌느 망가뜨리려고 보도 자료라도 뿌린 줄 알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발전이 없을 텐데요. 비평은 아프지만 성장 동력이 되니까요.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 점이 바로 브레드의 한계겠죠. 모니카 말로는 자기합리화 끝판왕이라고 하던데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마음대로 해석한다고.”

“그런 사람들이 있죠. 참, 최종 시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어차피 오픈 직전에 한 번 더 가져갈 생각이었지만요.”

“컨펌 끝난 것 아니었나요?”

피에르가 놀라며 묻자 도혁이 강태오 쪽을 가리켰다. 어두운 편집실에서 혼자 손을 빠르게 놀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기, 구석에서 디테일 만지고 있는 분이 계셔서요.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픽스된 원본 틀은 유지할 겁니다. 자기만족으로 세세한 완성도를 꾀하는 거죠.”

“대단한 분이네요. 전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죠.”

“저분 때문에 DW애드 광고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에요. 최종 매체사 넘길 때까지 광고주 컨펌을 받곤 합니다. 당연히 마지막 시안이 가장 완성도가 높고요.”

피에르가 혀를 내두르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이거 점심 안 드셔도 든든하시겠습니다. 솔직히 이 작은 회사에서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스텔라와 둘이 걱정한 적도 있긴 했는데 협업하다 보니 그런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모두 유능한 직원들 덕분이죠.”

“아니, 그건 리더가 탁월해야 가능합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피에르의 눈가에 주름이 팼다.

“탁월할 뿐 아니라 그릇이 커야죠. 사람을 오래 겪어보니 능력 있는 인재일수록 개성이 강하더군요.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리더의 자질이 무엇인지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리더의 자질이라…….”

“이번 브레드 사건으로 우리도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강태오 씨를 비롯해 여기 계시는 유능한 직원들이 진심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 바로 명도혁 씨의 강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저희 인원이 적은데 믿어주셔서 감사하구요.”

“별말씀을요. 최종안의 퀄리티는 그동안 함께했던 어떤 대기업보다 훌륭했습니다.”

“사실 대기업 대행사 시스템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전 직원이 붙는 것이 아니라 팀별 과제라서 말이죠. 물론 팀이라고 생각해도 저희 인원이 현저히 적은 편이지만요.”

도혁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자 피에르가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요. 몰디브에서 서울팀까지 함께 작업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감사해야죠. 유능한 글로벌 팀과 함께 작업하게 되어 오히려 저희가 영광입니다.”

“이렇게 띄워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럼 공치사는 이쯤에서 접고 식사부터 하실까요. 나가시죠.”

도혁의 안내에 따라 막 발을 떼려던 참이었다. 감지 않은 더벅머리를 툭툭 털며 강태오가 편집실 밖으로 나왔다.

“끝났어. 명 대표 최종 컨펌받으러 가야……. 어?”

“반갑습니다. 강 국장님!”

피에르가 악수를 하려다 슬쩍 손을 말고 고갯짓으로 대신했다. 노숙자와 같은 행색에 놀란 것이다.

“어이구, 광고주님 오셨네요. 그런 줄도 모르고 편집실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럼 오신 김에 같이 보실까요?”

편집실로 피에르를 안내하는 강태오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가 자신 있는 음성으로 부연했다.

“단언컨대 올여름은 LVNN의 시즌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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