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44화
[낯선 신화와의 조우, 그리고 LVNN.]
제목을 또박또박 읽어내려간 강태오가 3편의 연작임을 전제로 깔았다.
“총 3편의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시리즈물을 제작해 보겠습니까? LVNN에서 책정한 예산이 남아돌더라고.”
강태오는 장난스레 말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콘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동양의 신화를 활용하여 낯선 세계를 몽환적으로 그려봤습니다. 스토리텔링에 주목해 주세요.”
화면 속에서 쓰개치마를 입고 물 위를 걷는 모니카가 나타났다. 마치 심청이를 연상케 하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걸어 바다를 향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곧 하늘 위에서 고고한 학 세 마리가 날아오고 고개를 돌린 여자가 쓰개치마를 내리자, 그녀의 곁으로 연꽃잎이 만개하듯 피어났다. 연분홍 꽃잎이 바람에 낱낱이 흩어지며 하늘 위로 흩뿌리듯 흩날린다.
“두 번째 스토리는 시공간을 미래로 이동해 펼쳐집니다.”
강태오의 말과 함께 사이키델릭한 미래의 배경으로 콘티가 전환되었다. 어둡고 다소 전위적인 배경 속에서 기이한 모습을 한 가상의 인간들이 기계처럼 움직인다. 카메라가 그들의 눈과 귀, 그리고 손을 클로즈업한 후 롱샷으로 멀어진다.
“콘티로 설명하자니 쉽지 않지만, 두 번째 스토리텔링에서는 다소 전위적인 미래로 모델이 이동함으로써 시공간적 거리 두기를 시도합니다. 명품에서 흔히 쓰이는 전략적 기법이지만, 1편에서 선보인 동양풍 색감과 사운드를 이어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할 생각입니다.”
세기말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트릿의 한가운데를 다시 한복을 입을 모니카가 걸어간다. 이번엔 쓰개치마를 벗지 않은 뒷모습인데, 다크한 배경 속에서 홀로 연분홍빛을 빛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순간 하늘에서 다시 고고한 학이 날아들며 그녀의 쓰개치마를 벗기고, 양팔을 벌려 아름다운 천을 펼치는 여자의 뒷모습이 환상적으로 표현된다. 곧 화면은 3편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는 뉴욕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 첫 번째가 범접할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두 번째가 가상의 시공간을 창조해 대중과의 거리를 두며 차별성을 부여했다면, 마지막 광고는 뉴욕 시가지라는 현실 속에서 신화적 전설을 조우함으로써 낯섦과 설렘을 보여줍니다. 배경을 지금, 여기. 바로 뉴욕으로 설정했기에 앞선 두 창작물보다 훨씬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미국의 지하철 역사의 한가운데 역시 한복을 입은 모니카가 선 채로 돌아보고 있다. 이번엔 쓰개치마를 내린 채 카메라를 응시하며 지금까지의 무표정과 달리 미소 짓는 모습을 보인다.
이윽고 지하철이 도착하고 열린 문 속으로 발을 넣자 바닥이 바다로 변하고, 그 물속을 참방이며 모니카가 걸어 들어간다.
순간 지하철 역사가 세 편의 연작광고에서 메타포로 쓰였던 바다로 변한다. 천장에서 학이 날아들고 연꽃이 흩날리던 첫 번째 광고의 화면으로 돌아간다.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색감과 신비로운 동양풍 사운드를 곁들여 단아한 동양풍 비주얼을 품격 있게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런, 콘티로 보여주니 정말 갑갑하구만.”
“정말 그러네. 이건 콘티가 아니라 직접 영상물을 봐야겠는데?”
“맞아요. 강 국장님이 만드신 최종본 엄청 기대돼요.”
직원들의 기대에 찬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역시 고개를 끄덕인 도혁이 강태오에게 몇 가지 포인트를 짚었다.
“하이엔드 브랜드의 거리 두기 전략을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낯섦과 익숙함을 잘 섞은 연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고.”
“특히 한복의 쓰개치마와 연꽃이 몽환적이면서도 화려하게 표현되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서양의 명품 브랜드들이 일본풍을 자주 차용했는데, 이번 기회에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보지.”
“콘티만으로도 어떻게 만들어질지 기대 만발입니다.”
“비주얼과 사운드는 무조건 기대하는 것 이상을 보여줄 거니까 걱정 말고, 혹시 추가할 내용이 있나?”
“흠, 이 부분을 이렇게 방향을 틀어보면 어떨까요?”
두 팀의 아이디어에 디테일을 더할 시간이었다. 아침 녘에 시작한 아이데이션은 노을이 질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할 무렵, 촬영팀이 소식을 전해왔다.
“모델분 도착하셨습니다!”
* * *
모니카가 도혁을 찾아왔다.
그간 조금 수척해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도혁이 미간을 좁히며 근황을 물었다.
“얼굴이 안 좋으십니다.”
“네. 살이 좀 빠졌는데 촬영에는 지장 없도록 메이크업팀에 말해두었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광고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닌걸요. 혹시 그 뒤로 브레드가 더 찾아오거나 괴롭히진 않았습니까?”
“왜 아니었겠어요. 다시 잘해보자면서 술이라도 먹자며 엄청 들이댔어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모니카가 털썩 주저앉았다.
“브레드가 찾아오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강박이 생겼다는 거예요. 누가 들을까 봐, 몰래 볼까 봐 혹시 미행이라도 붙었나. 매일 점검하고 신경 쓰고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제가 몰래카메라랑 도청기 찾아내는 기계까지 샀다니까요.”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세상에 내 심정 아는 사람 스텔라뿐일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스텔라도 참 안 됐어요. 이제 비서도 못 믿는 처지가 되었으니.”
도혁이 따끈한 차를 내어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캐모마일입니다. 시간이 늦어서 차로 준비했는데 괜찮으십니까?”
“네. 좋네요. 요즘 잠을 잘 못 잤거든요.”
“푹 주무셔야 내일 메이크업 잘 받으실 텐데요. 여기까지 손을 쓰진 못 했을 테니 안심하고 쉬세요. 믿을 만한 사람들로만 팀을 꾸렸습니다.”
“고맙습니다. LVNN은 뉴욕에 알려진 대행사가 아니라 DW애드와 일한 것이 신의 한 수 같아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니카가 부연했다.
“알 만한 대형 기획사에는 이미 고렌느 사람들이 포진해 있을 거예요. 고렌느도 만만치 않은 규모니까요. 이 바닥 은근히 거기서 거기거든요.”
“그렇죠. 패션계도 그렇고 광고계는 더 좁습니다.”
“갑자기 혜성처럼 클리오에 명도혁 씨가 나타나서 행운이었어요. 계속 잘 부탁드려요.”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에게 콘티를 들이밀었다.
“푹 쉬시라고 해놓고 들이밀어서 죄송합니다. 미리 메일로 컨셉과 기획안은 보내드렸지만 오늘 세부안이 확정되어서요. 그리고 이건 서울팀에서 만들어 온 광고입니다.”
“어머, 벌써 완성본이 있다구요? 궁금한데요?”
모니타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곱게 휘었다. 광고 영상을 보고 크게 만족한 그녀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이 광고 정말 마음에 드는데요? 고요하고 단아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워요.”
“좋은 말은 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모니카 같은 광고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죠.”
“하여간. 광고하시는 분들 말로는 못 당해요.”
“심지어 카피라이터 출신입니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모니카가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정식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어요.”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영광이죠. 모니카와 함께 작업한 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어머!”
놀란 모니카가 토끼 눈을 뜨고 도혁을 바라보았다.
“왜 떠날 사람처럼 그렇게 말씀하세요. 우리 계속 작업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만큼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놀랐잖아요. 오래오래 같이 일하면 좋겠어요. 스텔라도 명도혁 씨를 깊이 신뢰하고 있더라구요. 종신 계약해서 묶어놓고 싶다고 하던데요?”
“묶는다고 묶일 저는 아닙니다만.”
피식 웃으며 도혁이 머리카락을 한번 털어냈다.
“아무튼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믿어주시는 만큼 끝까지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도요. 잘 부탁드릴게요.”
손을 내민 모니카와 악수를 나누었다. 도혁이 농담을 툭 뱉었다.
“이 손도 씻지 말아야겠습니다. 무려 모니카와 잡은 손 아닙니까!”
“한국식 개그인가요?”
“네. 하하.”
한국에서도 부장님들이 하는 개그라는 진실은 차마 말해주지 못하고 도혁이 미소 지었다.
다음 날, 새벽같이 촬영이 시작되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모인 촬영팀이 일출의 씬을 찍기 위해 해변에 모였다.
연출팀부터 촬영팀, 조명팀, 분장팀에 이르기까지 바쁘게 움직이는 새벽이었다.
도혁과 DW애드 직원들은 촬영장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해도 안 떴는데 벌써 더워지려고 하네요. 커피 아이스로 준비했습니다.”
“올~ 우리 이 팀장 센스 터지는구만. 잘 마실게.”
“고마워.”
“저쪽에도 커피를 가져다줄까 합니다. 모니카가 커피를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 음료는 안 마실 것처럼 생기셔서 말입니다.”
이진우의 말에 모니카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파라솔 아래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모니카의 얼굴에 열심히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모니카를 바라보던 서울팀 직원들이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실물 모니카를 처음 영접한 소회는 역시, 이 세계 엘프였다. 도혁이 입을 떡 벌린 탁기준을 놀렸다.
“우리 탁 국장님 입을 못 다무시네. 희주 선배한테 이를 겁니다.”
“어허, 모니카가 예뻐도 우리 희주 못 따라가긴 한다고 꼭 전해줘.”
“진심이십니까? 탁 국장님 거짓말하실 때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요.”
이진우가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쭉 뺐다.
“정말 멋지긴 하네요. 저는 여자 얼굴을 크게 따지는 편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분을 보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럼 가서 말이라도 붙여봐.”
“그럴까요? 콘티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헉!”
당당하게 모니카를 향해 걸어가는 이진우를 보고 모두 놀랐다. 탁기준이 마시던 커피를 뿜으며 소리쳤다.
“진우 대박인데? 언제부터 저렇게 호기로웠나?”
“글쎄요. 설마 모니카 번호까지 따 오는 거 아닙니까?”
도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그들을 보는데, 정말 이진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모니카가 웃으며 이진우의 핸드폰에 제 번호를 찍어주는 모습이 포착됐다.
“미친! 우와! 나도 가볼까?”
“탁 국장님께서 그런 짓 하시면 민사소송 고발당하시는 거 아닙니까?”
“민사고 형사고, 이건 사건이다, 사건. 이진우 그렇게 안 봤는데 직진남이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탁기준과 달리 도혁은 심장이 울컥했다. 오래전 소심하게 맞고 다니던 관심병사 이진우의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이다.
저렇게 멀쩡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이진우가 기특하고 든든했다.
아련한 심정으로 이진우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물결 위로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먼바다 위로 오늘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도혁은 다시 콘티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