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42화
“대표니이이이이이이이임!”
멀리서 이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만해선 평상심을 잃지 않고 정중하게 존대를 하는 그였지만 어지간히 흥분했나 보다.
도혁은 반갑게 한국팀을 맞았다. 한수철이 보자마자 도혁의 어깨에 팔을 둘렸다.
“우리 명도혁 대표님 잘 지내셨습니까? 이야, 신수가 훤하네!”
“올~ 이게 누구야. 배신의 아이콘 새신랑 아니십니까. 신수는 한 팀장님이 훤하십니다만?”
“배신이라니. 하아. 내가 뉴욕 안 따라간 거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냐? 소식 들려올 때마다 머리를 벽에 쿵쿵 박았다니까. 다음번엔 어느 나라로 갈지 모르지만 무조건 같이 갈 거다. 와이프한테도 미리 말해뒀어.”
“한수철한테 와이프, 낯설다?”
투닥거리면서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도성진을 본 서울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똑같이 생겼는데 분위기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군요. 성진 씨가 형이죠?”
“아니요. 무진이 형은 잘 있죠?”
“뭐, 만날 똑같죠. 게임하고 술 퍼먹고.”
“후우.”
도성진의 한숨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한쪽 구석에서는 놀랍게도 탁기준과 차현우가 제일 서로를 반기며 악수를 하고 있었다.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서로 고생 많았다고 공치사 중이었다.
멀찌감치에서 그걸 본 강태오가 장난스레 손날로 둘을 갈라놓았다.
“자자, 인사는 그쯤 하시고, 리조트로 갑시다. LVNN에서 마련한 초특급 리조트라고!”
“오케이. 일단 짐부터 풉시다.”
LVNN에서 미리 준비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리무진에 올랐다. 차에 타자마자 탁기준이 휘파람을 불며 혀를 내둘렀다.
“이야, 이 정도면 성공 신화 아니냐? 우리 명 대표님 성공한 거 다들 느껴지십니까? 뉴욕팀 이런 차 타고 다녔던 거야?”
“아니요. 우리 엄청 구르고 고생했는데요. 로케에서 처음으로 이런 호사를 누려봅니다.”
“맞아요. 뉴욕 스토리 눈물 없이 못 듣는다구요. 이번엔 LVNN에서 모든 부대시설을 제공하니까 호화로운 거라구요.”
“외국 S급 대행사들 사치스럽게 로케 즐긴다는 말, 거짓말이 아니었구만. 돈을 쓰다 못해 버리고 다닌다고 들었거든. 업계에 떠도는 괴담인 줄 알았더니.”
“설마 그 정도일리가요.”
피식 웃는 도혁을 보며 탁기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지. 촬영팀 명단 봤지? 이 바닥에서 이름 들으면 모두 알 만한 스텝인 거. 모델은 당연히 모니카고, 비행기부터 리조트, 부대시설에 로케 출장비까지 어마어마하던데?”
“하긴 출장비 듣고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거기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리조트 말이야. 몰디브에서 제일 좋은 리조트인 거 아시나들? 그중에서도 단독 빌라동이더라고. 프라이빗 비치가 붙어 있는 초호화 빌라 말이야.”
“저, 여기 알아요. 엄청 부끄러운 기억이 있는 곳이라고요.”
최민아가 얼굴을 붉히더니 손등으로 볼을 식혔다.
“대학생 때 돈을 모아서 몰디브 여행을 가려고 했거든요.”
“보통 대학생 때는 몰디브보단 유럽을 가지 않아?”
“저는 고급스러우니까. 아무튼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적금까지 부어서 친구랑 딱 몰디브 여행 숙소를 찾아보고 있었어요. 근데 우리가 지금 가는 리조트 알아보려고 용감하게 전화를 했었더랬죠. 아마 그때 막 이 리조트가 지어졌을 거예요.”
“오, 그랬어?”
“네. 그때 카피가 아직도 기억나요.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몰디브’였었죠. 아무튼 무려 국제전화로 직접 연락해서 숙박비를 물었더랬죠.”
“얼마였는데?”
“네 자리라는 거예요. 무려 네 자리.”
“그 당시에 천만 원대? 일박에?”
강태오가 놀라며 되묻자 최민아가 끄덕이며 풉 웃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뭐랬냐면 분양 가격 말고 숙박비가 얼마냐고 되물었지 뭐예요.”
“하하, 미치겠다. 우리 민아 촌티 냈구나.”
“돌아온 답변이 더 가관이었어요. 그게 두 명 숙박할 때 가격이래요. 한 명 추가되면 오버차지 할 거라고 딱 잘라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뭘 어떡해요. 바로 끊어버렸죠, 뭐.”
모두 웃음이 터지고 최민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그때의 한을 푸네요. 여기가 이 리조트에서도 제일 비싼 빌라동이라면서요.”
“맞아. 분양가 좀 알아봐 줘?”
“대표님. 놀리지 마세요!”
흘겨보던 최민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드디어 리조트의 입구가 보인 것이다.
“와!!!! 대박! 어머, 세상에!”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창으로 쏠렸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하고도 이국적인 리조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일하러 온건데 설레는 거 나뿐이냐?”
“정상이십니다! 이거 설레면 안 되는데, 아이데이션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이디어가 저절로 샘솟겠구만 뭘, 끝내주는데?”
몰디브에서도 VVIP만 주로 묵는다는 초특급 리조트였다. 프라이빗한 공간 확보로 헐리우드 스타들도 즐겨 찾는다는 소문이었다.
모두 감격한 표정으로 리무진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데, 가이드가 싱긋 미소 지었다.
“선착장으로 이동하실게요. 몰디브에 계시는 동안 묵으실 리조트 빌라동은 여기서 수상비행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수상비행기!!!”
“섬이라고!”
입을 틀어막고 호들갑을 겨우 삼키는 그들의 앞에 귀여운 수상비행기가 나타났다. 푸른 산홋빛 바다 위로 빨간색 비행기가 떠올랐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아름다운 풍광에 저절로 경탄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리조트에 도착했을 땐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거대하고 웅장한 리조트의 전경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도착했습니다. 24시간 대기 중이니 언제든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친절한 매니저의 안내와 함께 객실로 이동했다. 로비부터 복도, 그리고 버기카를 타고 빌라동으로 이동하고 드디어 객실의 문이 열렸다. 두리번거리던 직원들이 하나둘 입을 떼기 시작했다.
최민아가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숙박비로 분양가를 부를 만하네요.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어마무시한데요?”
“VVIP의 세계란 이런 것인가. 역시 돈은 많이 벌고 볼 일이야.”
“크으, 진짜 끝내주는구만. 그래서 명품 해외 광고주와 일하고 나면 돌아오기 어렵다고들 하잖아.”
탁기준이 말을 던지자 도혁이 한쪽 눈썹을 치켰다.
“돌아오기 어렵다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 로케 때마다 돈 뿌리고 호화로운 파티에, 사치스러운 생활까지 그들의 일상에 젖어드는 거지. 하긴 그 정도 되는 글로벌 기업이랑 계속 일하면 그들과 어울릴 만큼 부를 축적하게 되겠지만 말이야.”
“아, 그렇기도 하겠네요.”
“당장 우리도 봐. 광고주가 명품 브랜드 LVNN으로 바뀌니까 우리 숙소부터 수준이 달라지잖아. 이야, 우리도 글로벌 대행사 반열에 드는 건가!”
“설레발은 별론데요.”
턱을 어루만지며 도혁이 대꾸했다. 삼키는 입맛이 영 씁쓸해 미간이 좁혀졌다. 그걸 본 탁기준이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명 대표는 표정이 왜 그래. 설마 우리 욕심 많은 대표님, 이 정도로도 만족 못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후우, 아닙니다.”
“에이, 캠페인 걱정하는구만. 일단 짐부터 풀자고.”
“네. 멀리 왔으니 오늘은 휴식을 취하면서 각자 구상하고 내일부터 일정 진행하도록 하죠.”
멀찌감치 웅장한 건물과 실내를 둘러보며 감탄하는 직원들이 모습이 보였다. 도혁은 그들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분명 오랫동안 꿈꾸던 장면이었지만 무언가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광고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에게 성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에 명치가 뻐근해졌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더 답답한 마음이었다.
도혁이 한숨을 내쉬는데, 밖에서 한수철과 최민아가 동시에 도혁을 불러댔다.
“대표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프라이빗 비치가 끝내줘요.”
“빨리 와봐. 바다 색 예술이야.”
“모래가 산호인 것 같은데. 하얗다 못해 투명하다고!”
손짓하는 둘을 향해 도혁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답이 없는 고민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더구나 여기는 몰디브 아닌가. 내일부턴 다시 폭풍 같은 일정이 몰아칠 것이다.
도혁은 부질없는 생각을 덮고 몰디브의 푸른 바다와 직원들의 천진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다 내음을 머금은 물기 어린 바람이 부드럽게 스쳐 갔다. 주홍빛 노을이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살며시 빛을 내렸다.
도혁은 바다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갔다.
* * *
하룻밤의 달콤한 휴식이 끝나고 리조트의 테라스에 모여 앉았다.
느긋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늘 아래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한수철이 감탄했다.
“커피 한잔을 마셔도 이런 곳에서 마셔줘야지. 이게 얼마만의 여유야.”
“뭐, 아이디어 때문에 마음은 바쁜데 몸은 편하구만.”
“몸도 바쁜 사람 저기 있네.”
탁기준이 강태오와 이진우를 가리켰다. 퀭한 눈을 비비며 둘이 무언가 속닥거리고 있었다.
최민아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둘은 어제 콘티 그리다가 밤새운 거 알아요?”
“진짜? 몰디브까지 와서, 첫날부터?”
도혁이 놀라서 묻자 최민아가 아이스커피를 쭉 빨아 당겼다.
“못살아 진짜. 대표님만 일중독인 줄 알았더니 저쪽은 한술 더 뜨고 있다구요. 비교되게.”
“비교는 무슨. 놀아야 아이디어도 잘 나오는 법이라고.”
탁기준이 대꾸했지만 떨떠름한 입맛을 삼켰다. 아이데이션에서는 모두 라이벌인 만큼 향상심과 경쟁심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혁이 정신을 차리고 회의를 시작했다.
“쉬는 것도 업무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떠오르는 영감이 있다면 그걸 죽이고 놀 필요도 없고요. 아무튼 다들 회의 준비는 철저히 해 오셨겠죠?”
“당연하지. 저긴 아직 안 끝났나 봐?”
탁기준이 강태오를 경계하며 특유의 허세를 부렸다. 그게 반가워 뉴욕팀 전체가 반색했다.
“탁 국장님 너스레 들으니까 정말 우리가 모여서 아이데이션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데요?”
“그러니까. 얼마 만이냐. 저 근거 없는 자신감.”
“에헤이! 근거 있는 자신감이지.”
아저씨 같은 에헤이, 소리조차 반가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도혁이 탁기준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탁기준이 노트북을 들고일어섰다.
“한국팀부터 시작하지. 한수철 팀장, 준비하고. 저저, 배신자 이진우 어? 강태오 도와주고 있는 진우 팀장도 이제 이쪽으로 붙지 그래?”
“콘티만 좀 그려달라고 하셔서. 네! 알겠습니다.”
자리 정돈이 끝나고 탁기준이 간단한 PT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동아시아 시장에서 백 년은 군림할 LVNN의 여름 시즌 캠페인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사위를 울렸다. 화면 위에는 한국팀에서 준비한 LVNN의 컨셉이 천천히 떠올랐다.
[삶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