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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238화 (238/252)

광고 천재 명도혁 238화

뉴욕 외곽의 후미진 골목. 가로등이 닿지 않는 어두운 길 끝에 위치한 낡은 건물의 지하 바에서, 두 남자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렌느의 마케팅 팀장과 LVNN 상무 비서실의 과장급 인사였다.

모자를 푹 눌러쓴 두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정도면 안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올 때마다 심장이 쫄깃하네. 후우.”

“아무래도 그렇지. 인근에 CCTV가 없지만 보는 눈이 어디에 박혀 있을지 모르니까.”

“다음에는 브로클린으로 나가든지 해야겠어. 아예 지하철역에서 접선하는 것도 좋겠지. 그건 그렇고, 자네 얼굴이 왜 그래?”

“한 5킬로 빠졌어. 표시 많이 나나?”

LVNN 쪽 남자가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물었다.

“요즘 고렌느 잘나가던데 문제 있어? 마케팅 팀장 얼굴만 보면 곧 부도라도 날 것 같은 표정이야.”

“말도 마. 브레드는 역시 스텔라의 제자라는 걸 매일 깨닫고 있으니까. 환장하겠다, 아주.”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갑질도 당해본 사람이 더 잘하는 법이라는 뭐, 그런 소리지. 후우.”

고렌느 쪽 남자가 담배 한 대를 꺼내어 물며 대꾸했다.

“하긴, 브레드도 한 성깔 하잖아. 그래서 스텔라가 더 좋아했었고.”

“아들이라고까지 했었지. 들으면서 웃겼어. 아들 같은 소리 하네. 서너 시간 재우고 부려먹었으면서.”

“스텔라는 가르친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걸? 그마저도 서로 하겠다고 안달 나 있었고.”

“하긴. 그 당시 스텔라가 제자 양성에 진심이긴 했어. 어쩌면 이런 게 바로 동상이몽일지도.”

두 남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어쨌든 둘이 갈라선 덕분에 우리는 굿이나 보고 돈이나 벌어서 좋지, 뭘 그래?”

“그래도 힘든 건 힘들어. 브레드 새끼 언젠가는 내가 뒤통수 쳐버릴 거야. 스텔라한테 한 짓 본인도 똑같이 당해야 인생 공평하지 않겠어?”

“그래도 스텔라나 브레드가 인간 갈구는 강도는 높아도 확실히 밀어주는 건 있어. 나같이 라인 못 탄 놈은 골치 아프지만.”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브레드한테 딱 붙어 있어. 지금은 사람과 정보가 필요한 시기이라 팽당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이거.”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브레드에게 전해줘. 다음 시즌 자료 전부 담았어.”

“다시 전쟁인가.”

“맞아. 지난 두 번의 시즌에 걸쳐서 브레드가 선전포고한 거나 마찬가지니 이번 여름, 아주 볼만할 거야.”

“우리야 뭐 이쪽저쪽 정보 흘리면서 돈이나 주워 먹으면 그만이니까. 전쟁하라 그래.”

“그렇지. 애초에 라인 갈라치기 한 인간들 업보 아닌가?”

산업스파이질의 죄책감을 스텔라와 브레드에게 돌리며 남자는 빈 술잔을 가득 채웠다.

“자자! 위스키나 마시자고. 누가 이기든 우리한텐 아무 문제 없을 테니.”

“이 맛에 양다리 걸치는 거 아니겠나. 그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읍시다.”

“그럽시다!”

부딪치는 글라스의 소리가 쨍하게 고요한 사위를 울렸다.

* * *

다음 날 아침, LVNN 신사업 기획안을 최종적으로 건네받은 브레드의 한쪽 입매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노친네들 발악을 하는구만. 미국에서 컨셉으로 밀릴 것 같으니 동양으로 발을 뻗으시겠다.”

“동양 명품 시장은 확대일로를 걷고 있고 매출이 꾸준히 우상향 중입니다. LVNN이 동아시아에서 1위 자리를 공고히 하고 싶은 듯합니다.”

“촌스럽고 낡은 디자인으로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노력은 가상하네. 인정.”

비꼬듯 툭 말을 뱉으며 브레드가 건네받은 유에스비를 노트북에 꽂았다.

“이게 시안 초안이라는 건가? 벌써 나왔다고? DW애드인지, 그 명도혁이라는 사람이랑 계약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그렇게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명도혁 대표의 작품이라는데 업계에서 손 빠르기로 정평이 나 있더군요.”

그 말을 들은 브레드가 짧게 끄덕였다. 한국인들이 성격이 급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열 배는 더 빠른 DW애드였다.

뉴욕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브레드가 기억하는 광고만 해도 벌써 몇 개인가 말이다. 심지어 그 캠페인으로 뉴욕페스티벌까지 장악하지 않았던가.

상식 밖으로 초안이 빨리 나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브레드는 차게 웃으며 화면을 열었다. 내리는 마우스를 따라 입술이 실룩거렸다.

“이거 괜찮은데? 클래식하고.”

턱을 어루만지며 흐뭇하게 마케팅 팀장을 바라보았다. 함께 미소 짓는 두 남자의 얼굴에 확신에 찬 미소가 번져갔다.

* * *

며칠 전 LVNN의 디렉터실. 미팅차 방문한 도혁을 바라보던 스텔라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살짝, 흘리자고요? 그것도 일부러?”

도혁의 제안에 스텔라의 눈이 커졌다.

“네. 캠페인 컨셉, 특히 완성된 시안을 그쪽에 슬쩍 보여주는 겁니다. 우린 이런 방향이다, 미리 알려주는 거죠.”

“흠…….”

“어차피 동양풍으로 진행할 거라는 정보는 이미 가져갔다고 들었습니다.”

도혁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보탰다.

“어딘가 있을 누군가가 이미 컨셉을 물어 갔다면 다른 쪽으로 시안을 흘림으로써 물꼬의 방향을 비트는 거죠.”

“물꼬의 방향을 비튼다라…….”

“바로 클래식입니다. 고렌느의 차별성은 클래식을 넘어선 혁신에 있습니다. 시장도 알고 소비자도 알고 모두 아는 부분이죠.”

“네. 맞아요. 디자인 혁신, 지겹게도 외쳐대고 있죠. 그런 고렌느가 클래식 전략을 쓰려고 할까요?”

“할걸요? 우리가 브레드의 눈을 멀게 할 거니까요.”

도혁이 가짜로 흩뿌릴 시안을 선보였다.

순간 스텔라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 시안 좋네요?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하고, 동양풍도 잘 어우러지는. 솔깃한데요?”

“이건 미끼 시안에 불과합니다. LVNN의 뉴 캠페인인데 이것보단 퀄리티를 몇 배 더 올려야죠.”

도혁의 자신에 찬 말에 스텔라가 짧게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든든하네요. 아무튼 이걸 일부러 그쪽에 흘릴 거라는 말이죠?’ ”맞습니다. 시안은 기획안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한번 보면 머릿속에 각인되고 벗어나려고 해도 이미지가 따라다니죠. 특히 따라 하고자 마음먹은 표절쟁이에게는 좋은 함정이 될 겁니다.”

표절쟁이라는 도혁의 말에 스텔라가 실소했다.

“표절쟁이라니, 브레드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군요. 아주 마음에 드는 단어예요.”

“그렇기에 고렌느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악수를 둘 수 있도록 유도가 가능할 겁니다.”

“악수라면!”

“브레드는 LVNN을 이기는 일에만 사활을 걸고 있어요. 조금은 눈이 먼 상태라고나 할까요.”

도혁의 말에 스텔라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찰나였지만 짙어진 눈매에 걸린 그늘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장 믿었던 직원에게 배신당하는 일은 어떤 무게일까. 그리고 그로 인해 남아 있는 직원 중 누군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스텔라가 조직의 리더로서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자 명치끝이 뻐근해졌다. 도혁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고렌느는 우리의 전략과 컨셉을 자신들이 미리 공개해 찬물을 붓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여 가짜 컨셉을 만들어 흘리는 겁니다. 또한 차별화된 클래식 전략은 대부분의 명품에서 쓰고 있으니 이번 시안에 관해 의심하지 않을 거고요. 물론 정통 클래식에 동양풍 느낌을 한 스푼 섞어놓았죠.”

“브레드의 의심을 피해 우리의 가짜 컨셉을 일부러 보여주자?”

“맞습니다. 그걸 브레드가 보게 만들고 우린 TF팀을 별도로 꾸릴 겁니다. 스텔라가 믿을 수 있는 최소 인원으로요. 그리고 DW애드 이외엔 진행 사항을 극비에 부칠 예정입니다. 고렌느에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시즌 광고가 진행된 이후 빛의 속도로 집행 준비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다만…….”

스텔라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 순간 노크 소리가 울리고 피에르가 들어왔다.

“미팅이 길어지는 바람에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도혁이 피에르에게 가짜 컨셉을 흘리자는 제안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피에르가 눈을 반짝이면서도 스텔라의 눈치를 보았다.

“이거, 아이디어는 좋은데 괜찮겠어?”

“글쎄. 어디까지 믿을 사람이고 누구는 아닌지, 솔직히 확신이 없어. 이 방에 있는 사람 정도는 믿을 수 있겠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보안이 문제야, 보안이.”

“어쩌다가 천하의 LVNN이 이렇게 됐는지.

스텔라의 자조 섞인 말에 피에르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사실 브레드야말로 최측근 중에서도 가장 가까웠지. 스텔라의 아들 소리 듣던 놈이었으니.”

“…….”

“그런 인간에게 배신을 당하고 보니까, 솔직히 이제 비서실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브레드 저 자식, 왜 저렇게까지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지 모르겠네, 정말.”

“나도 이제 비서실 안 믿어. 임원들도 의심스럽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뚫고 스텔라가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주먹을 불끈 쥔 채였다.

“그 자식이 왜 그러는지는 관심 없고, 이번에야말로 꼭 이겨야겠어. 두 시즌이나 털린 거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저쪽에서 컨셉을 빼돌리고 먼저 집행해 버리니 연속으로 당했던 거잖아.”

“그러니까 더 잠이 안 온다고!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로 승부 보는 바닥인데, 이게 무슨 X같은 경우인지.”

“솔직히 아무도 못 믿겠어. 지금도 누군가 듣고 있을 것만 같고. 악!!!”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며 스텔라가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총체적 난국이구만.

도혁은 저절로 새는 한숨을 삼켰다.

전쟁으로 따지면 사령관실에서 정보가 새고 있다고나 할까. 최측근 핵심 관계자가 심어놓은 사람이다 보니 스텔라의 가장 측근의 누군가가 정보를 빼돌릴 확률이 매우 높았다.

보안을 유지하기 가장 힘든 경우였다. 특히 광고나 디자인 분야처럼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고 아이디어의 속도가 생명인 업계에선 이 같은 상황이 치명적일 수 있었다.

도혁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그리고 간결하고 단호하게, 둘을 안심시켰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슬쩍 흘리더라도 그 뒤에 진짜 컨셉과 시안을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팔로우 업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드러날 수밖에 없을 텐데요.”

“당연히 방법을 생각해 왔습니다. 여러 개의 트릭으로 고렌느를 다각적으로 속일 생각입니다.”

“오!! 가짜 컨셉 외에 또 트릭이 있는 걸까요?”

기대에 찬 눈동자가 도혁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네. 당연히 방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트릭은 여기서 만들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진행하지 않는다니, LVNN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요. 미국 말입니다.”

도혁의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이번 광고는 미국 밖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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