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25화
취향의 시장에서 자웅을 가리는 일은 어렵다.
특히 글로벌 맥주 시장은 주종별로 촘촘히 나뉘어 있어서 저마다 라거의 1위, 북미의 1위 등 1등을 강조하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맥주 시장은 조만간 M&A를 통해 재편되는데, 곧 400여 개의 맥주 브랜드를 하나로 묶을 공룡 기업이 탄생한다. 하이오 맥주는 미래의 글로벌 공룡 맥주 회사에서도 1위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예정이었다.
즉, 현재의 탑 티어이자 미래의 시장까지 거머쥘 글로벌 주류 회사인 것이다. 이걸 알고 있기에 맥주 회사 중 제일 먼저 하이오에 접촉하려 한 거였다.
도혁이 기획안을 넘기며 찬찬히 검토하는 모습을 본 팀장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먼저 기획안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질문했을 때 선제적으로 대응을 해야 해서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먼저 보시죠. 어차피 오늘은 팀장님께 PT를 하려 한 거니까요.”
“감사합니다.”
도혁에게 기획안을 건네받은 팀장의 표정이 차츰 밝아졌다.
“이거, 뭔가 지금까지 보던 제안서와는 많이 다르네요. 와.”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 특히 이 극장 광고 너무 놀라운 제안인데요?”
이번엔 특별히 극장 광고를 추가했다. 옥외와 프로모션 위주로 진행하고 있었지만 이번 하이오를 계기로 영상물을 시도해 볼 작정이었다.
첫 영상물을 TV로 제작하기엔 부담스러운 면이 있어 극장 광고를 제안한 것이다.
다행히 팀장이 극장 광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거 제대로 진행하면 화제성이 엄청나겠는데요? 파격적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장님 마음에도 드셔야 할 텐데 너무 러프한 기획안이라 걱정이 되네요.”
“별말씀을요. 충분합니다. 제 생각엔 좋아하실 것 같아요.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보기보다 과감한 스타일이시거든요.”
하긴, 회귀 전 M&A의 기억을 되살리면 하이오 회장이 과감하게 회사를 정리하긴 했다.
덕분에 노후에 섬 하나를 통째로 사셔서 유유자적 지낸다는 타임지의 기사를 읽었었지.
아무튼 세계적인 유력 주간지에서나 보던 인물을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설레기도 했다. 맨해튼의 한가운데서 일하고 있다는 실감도 났고.
도혁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공장이 우뚝 서 있었다. 아주 독특한 느낌이었는데, 21세기와 19세기가 공존하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섞여 배치되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치 놀이공원이라도 온 듯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안내를 맡은 직원이 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이오 제1공장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판타지와 같은 맥주의 신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촌스럽지만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도혁이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엄청난 규모네요. 현대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분위기가 인상적입니다.”
“아, 현대식 건물은 모두 공장입니다. 영국의 성 같은 건물들은 모두 예전 공장을 개조한 박물관이구요. 들어가시죠.”
정문으로 들어서자 박물관을 견학 중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365일 쉬는 날 없이 박물관을 오픈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마케팅 전략이네요.”
“신선한 맥주를 무료로 맛볼 수 있고, 전통 방식으로 술을 만드는 과정과 현대식 공정을 동시에 볼 수 있어서 관광 상품으로 인기가 아주 높아요.”
팀장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도혁 역시 끄덕이며 공감했다.
체험은 브랜드 충성도를 가장 빠르게 높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하여 많은 주류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지만 이 정도 규모로 박물관까지 지어서 본격 관광 상품을 만드는 곳은 드물었다.
“본관에 회장님의 집무실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어! 회장님!”
“마케팅 팀장이구만. 아, 아까 말했던 그 광고 회사 대표인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술 좀 하시나?”
“못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집무실을 가던 길에 우연히 회장과 마주쳤다. 초면에 주량부터 묻는 것이 주류 회사 대표다웠다.
글로벌 맥주 회사 재벌답게 두둑한 뱃살 위에 손을 얹으며 회장이 손을 까닥했다. 곁에 서 있던 비서가 즉시 달려와 커다란 맥주잔을 가져왔다.
“저기 메인 공장으로 먼저 이동합시다. 손님 오셨는데 잔부터 채워야지.”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엄청난 규모에 먼저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맥아와 홉의 향취가 풍겨왔다.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곡물의 냄새였다.
“한국에서는 주식으로 쌀을 쪄서 밥을 해 먹습니다. 그 밥을 해 먹을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한 느낌의 향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요? 우리 맥주엔 구수한 풍미가 있지요. 자, 얼른 가서 한잔 받아 와보시게.”
회장이 지시하자 비서가 뛰어갔다. 사이버펑크 속 미래처럼 자동화된 공정 속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빈 잔에 맥주를 채워 왔다.
그 모습이 흡사 시골 막걸리 양조장에 술을 받아 오는 것만 같아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저렇게 받아 와도 맛은 일품입니다. 자부하지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음식은 그 자리에서 만든 것이 제일 맛있는 법이다. 당연히 맛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잔에 입술을 대었는데.
오마이갓. 하이오가 이 정도라고?
홉과 보리의 깊은 향이 훅 코끝을 스쳐왔다. 동시에 부드럽게 입속 점막을 스미는 거품과 시원한 단맛이 입안 가득 번지더니 목 안으로 시원하게 빨려 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꿀꺽꿀꺽 커다란 잔을 완전히 비워내자 회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목젖이 보이도록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어허!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하하.”
“술 마실 때 바닥 깔아 본 적이 없어서요. 잔이 크기는 하네요.”
아저씨 같은 말을 하곤 함께 껄껄 웃었다. 곁에 있던 비서가 다시 빈 잔을 채워 오고 세 번 정도 잔을 비우고 나서야 겨우 집무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기획안 발표하면서 실수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음주 PT는 처음이라서요.”
“술 먹고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안 그렇습니까? 내 3천 CC 맥주 마신걸 감안하고 볼 테니 걱정 말고 시작하시죠.”
“네. 그럼 저희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제안서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첫 미팅부터 회장님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놀랍게도 전혀 취하지 않은 회장과 도혁이 마주 보았다. 곁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던 팀장은 어느덧 취기가 돌아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도혁이 준비했던 휴대용 음주측정기를 입속에 넣고 불었다. 그걸 본 회장과 팀장이 놀라 발표에 집중했다.
“그게 뭡니까? 처음 보는 물건인데요?”
“한국에서 사용하는 음주측정기입니다. 한번 측정해 보시죠.”
음주측정기의 마우스피스를 갈아 끼운 도혁이 회장에게 측정기를 건넸다. 회장이 도혁이 하던 것을 흉내 내어 훅 숨을 불어넣자 측정기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다음으로 측정한 팀장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였다.
PT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미리 준비했던 소품이었지만 진짜 음주를 했기에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도혁이 측정기의 숫자를 가리켰다.
“저와 같이 높은 수치가 나왔습니다. 팀장님의 혈중 알콜 농도도 비슷하네요.”
도혁이 다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화면을 전환했다.
“회장님과 저는 술에 강한 편입니다. 하여 3천 CC의 맥주를 마셨지만 겉으로 보기엔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팀장님은 조금 얼굴이 빨개지셨구요.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으시나요?”
“뭐, 충분히 즐긴다고 생각합니다만 두 분에 따르지 못하는 거죠. 대단들 하십니다.”
회장과 도혁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건강 해치고 허세 넘치는, 쓰잘데기없는 술부심이었지만 오늘은 회장의 술부심을 이용하기로 했다. 도혁이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운전을 한다면 어떨까요? 회장님과 저 그리고 팀장님 모두 혈중알코올농도가 비슷합니다. 지금부터 가상의 시나리오로 PT를 이어가겠습니다. 저 명도혁은 평소에도 술이 쎈 편입니다. 보통 친구들과 술을 먹을 땐 Designated Driver, 일명 DD를 지정해서 운전할 사람을 정해두지만 오늘은 아니었습니다. 혼자 술을 마셨거든요.”
회장과 팀장이 귀를 기울였다. 현재 PT 속의 상황처럼 술을 먹은 상태였으므로 더 집중해서 듣는 모습이었다.
“회사에서 힘든 일로 고통받다가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신 명도혁은 조금 망설이다가 자동차 열쇠를 손에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술이 쎈 편이었고 말짱했거든요. 술이 취했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기에 운전대를 잡습니다.”
도혁이 리모컨을 클릭해 화면을 이어서 전환했다.
“한참을 한적한 길을 가던 도혁은 조금 졸렸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운전에 집중합니다. 술을 마셨기에 평소보다 더 조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차선을 급히 바꾼 트럭이 갑자기 끼어들어 옵니다.”
-끼이익.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커다란 도표가 펼쳐졌다.
“음주 운전 시 사고 현황입니다. 보시다시피 평탄한 직진 차로에서는 큰 문제가 없지만 곡선 구간의 일차로,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는 사고 확률이 평소보다 급격하게 올라갑니다.”
“자신만만하다지만 아무래도 알코올이 인지에 영향을 주겠지요.”
회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술 회사에서 듣기에 썩 유쾌한 얘기들은 아니었으니까.
도혁이 곧바로 메인 컨셉을 화면 위에 한 글자씩 찍었다.
[1위의 자부심, 왕관의 무게를 공익으로 승화하다.]
왕관이라는 글자를 본 회장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주목하는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글로벌 1위 기업은 할 일이 많습니다. 욕도 많이 먹고요.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는데요, 이렇게 바꿔서 말하고 싶네요. 매출 많은 회사, 욕 안 먹는 날이 없다고 말입니다.”
“하하, 재밌는 말이네요. 사실이지요.”
“특히 술, 담배와 같이 과하게 사용하면 사회적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기호 상품에는 더 오명이 붙게 마련이구요. 그렇기에 우리는 공익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공익이라. 하긴, 인류애를 보이는 캠페인을 펼칠 때도 되었죠.”
“맞습니다. 1위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사회적 환원의 의미를 담은 광고가 바로 공익광고입니다. 또한 미국은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과 법의 간극이 매우 큽니다. 사고만 안 나면 그만이라는 음주 운전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처벌은 무척 무겁거든요.”
도혁의 말에 공감한 회장이 크게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이 그의 자부심에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제왕의 위엄을 보여줄 좋은 계기가 될 겁니다. 물론 공익광고를 본 이들의 머릿속에 하이오라는 브랜드를 팍팍 문신처럼 새겨줄 좋은 캠페인이라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오호, 문신 같은 공익광고라. 계속해 보시죠.”
회장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