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24화
“정확한 의도를 모르겠군요.”
도혁은 브레드를 찬찬히 훑어보며 그의 속내를 살폈다.
스텔라를 미친 여자라고 지칭하는 걸로 보아 이 남자는 스텔라를 혐오하고 있다. 그리고 도혁이 스텔라와 계약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저와 LVNN의 관계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건 지 궁금하네요. LVNN에는 수백 개의 협력사가 있는 만큼 보안이 철저할 텐데 말입니다.”
“LVNN 안에 제 사람이 많으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보기보다 허술한 게 유일한 장점인 회사가 바로 LVNN입니다.”
“흠, 그렇습니까?”
“저 역시 명도혁 씨의 캠페인에 관해 마케팅팀을 통해 전해 듣고 관심을 기울이던 차였습니다. 솔직히 CD가 이렇게 광고회사를 찾아 나서는 경우는 드문데 스텔라 얘기가 들려오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겁니다.”
역시 경쟁심에 불타올라서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스텔라와 엄청난 악연으로 엮인 것이 분명했다.
말을 끊은 브레드가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연했다.
“저는 이제 디자인도 마케팅의 시대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디자이너들의 세상에서 겉도는 디자인만 하고 있을 겁니까? 고객의 고객을 위한 고객의 옷을 만들어야죠.”
“대략적으로 동의합니다. 광고인이니까요.”
“어떻습니까? 명도혁 씨에게 글로벌 대세인 고렌느의 협력 업체가 되어주시길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계약 조건은 맞춰드리겠습니다.”
“흠, 글쎄, 저희로서는…….”
“명도혁 씨 같은 젊은 사업가는 고렌느와 같은 트렌디한 브랜드와 훨씬 잘 어울립니다. LVNN은 지는 해입니다. 곧 망할 회사라고요.”
여기까지 들은 도혁은 속으로 피식할 수밖에 없었다.
LVNN은 앞으로도 글로벌 명품 대표 브랜드로서 쭉쭉 뻗어갈 예정이었다. 회귀 전 마지막으로 본 통계에서는 세계 5대 재벌에 들어갔을 정도로 위상이 공고했단 말이지.
반면 고렌느는 도혁의 머릿속에 뚜렷한 인상이 없는 브랜드였다. 심지어 남의 회사에 사람을 심어 정보를 빼내고 있다니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도혁이 결심을 굳히고 최대한 예의를 차려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저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앞서 계약한 기업과의 관계를 돈 때문에 끊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후회할 겁니다. 스텔라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순간 브레드의 실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거절에 대한 당황보다는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부당한 대우가 있다면 저희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계약을 파기할 문제입니다. 제3자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스텔라와 브레드, 두 분의 경쟁 구도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두 분의 감정을 이용해 계약 조건을 올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허,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요. 생각해 보겠다, 정도로 유예기간을 버는 편이 사업가다운데, 아직 젊어서 그런지 사업할 줄 모르는구만.”
애송이 취급을 하며 브레드가 몸을 일으켰다.
2회차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공손히 대답했다.
명도혁은 사업할 줄 아는 사장이니까.
“아닙니다. 저도 고렌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제 고지식한 성격 탓에 먼저 계약한 신의를 저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더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흠, 명도혁 씨 같은 분은 우리와 먼저 인연이 닿았어야 했는데 무척 아쉽네요.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신의를 버리지 않는 태도와 더 배우겠다는 마음가짐까지 선보이며 더 광고주를 아쉽게 만들었다. 브레드가 쩝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꼭 연락 주실 날이 올 거라 믿고 있습니다. 스텔라가 곧 본색을 드러낼 거니까요.”
도혁 역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명함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브레드가 여전히 아쉽다는 눈빛을 보내며 겨우 발길을 돌렸다.
브레드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최민아가 총총 뛰어왔다.
“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브레드가 우리 회사에 직접 나타날 줄이야. 이게 무슨 일이에요.”
“최 팀장은 알 것 같은데. 저 인간이랑 스텔라, 무슨 관계야? 철천지원수라도 되나?”
“찰떡처럼 붙어다니다가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죠. 브레드가 스텔라 제자잖아요. 그것도 수제자요!”
의외의 말에 도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브레드가 배신한 건가?”
“뭐, 결과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근데 스텔라가 어지간히 갈궜다는 말도 있고, 뭐 노예처럼 부렸다고 하더라구요. 여동생을 소개했는데 모델이랑 사귀고 있어서 거절했다는 썰도 있고. 그래도 가족처럼 믿고 아낀 유일한 제자였는데 뒤통수 맞은 것만은 사실이에요. 디자인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사건이라구요.”
“아니, 그럼 원수랑 계약한 걸 알고 나한테 일 같이하자고 찾아온 거야?”
“헐, 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협력 업체 제안한 거예요?”
“거절했어. 우리가 LVNN와 계약한 걸 아는 것도 찜찜하고 조금 불쾌하기도 해서. 미팅할 땐 둘의 관계를 몰랐지만 썩 내키지가 않더라고.”
도혁의 대답을 들은 최민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잘하셨어요.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딱 좋은 일이에요. LVNN가 마음먹고 고렌느 쓸어버리려고 작정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때는 조금 쪼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다 키운 제자가 독립했다고 복수하는 꼴이니까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네.”
“근데 봐봐요. 뒤에서 칼 찌르고 다니네. 무섭다, 무서워.”
“진실을 아무도 모르지.”
도혁이 말을 끊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살벌한 기업판에선 선과 악이 공존하니까. 브레드의 말처럼 스텔라가 제자 앞길 막는 미친 여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브레드가 배신하고 뒤통수 치는 건지도 모르고.”
“하긴. 그렇죠. 곁에서 지켜본 사람조차도 누가 잘못했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거예요.”
“맞아. 결국 기업의 선과 악은 결과론이야. 끝까지 살아남는 회사가 착한 거야. 적어도 직원들은 먹고살게 만들어주잖아?”
“매정한 현실이네요.”
한숨짓는 최민아의 어깨를 툭 치며 덧붙였다.
“그럼 매정한 현실을 뚫고 우리도 살아야겠지? 시안은 대충 나왔어?”
“어우, 틈을 안 주시네. 넵!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좋아. 맥주 광고판에서 살아남아야지. 난 착하니까.”
둘이 마주 보고 웃고 있는데 멀리서 차현우가 소리쳤다.
“뉴욕 페스티벌 일정 떴어! 당연히 참가할 거지?”
“그럼요!”
“끝나면 바로 클리오 이어질 거라네.”
“오 마이갓, 일정 빡빡하네요.”
“그래서, 하이오 맥주, 언제 미팅이라구요?”
고래 등에서 내려와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와 분주해진 사무실이었다.
* * *
“드디어 광고제 시즌 시작이구만. 피가 끓어오르는데?”
일정을 정리하며 차현우가 조바심을 내며 손가락을 말았다. 평소 침착한 모습과 달리 고무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그의 곁으로 강태오가 다가왔다.
“올~ 차현우 각 잡았네. 제안서 잘 좀 뽑아봐.”
“걱정 마시고! 맥주까지 진행해서 넣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클리오까지 맥주 외에 두 개 정도 더 진행할 생각인데요?”
곁에서 듣고 있던 도혁이 끼어들었다. 두 국장이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 두 개? 잠깐만 클리오까지 일정 몇 달 남지도 않았어.”
“몇 달이면 뭐, 두 개 금방 하죠.”
“아니, 우리 아직 맥주 광고도 광고주 미팅조차 안 했잖아.”
이 말을 듣고 놀란 도성진 역시 고개를 들어 도혁을 바라보았다.
“헉! 맥주 광고 광고주 미팅을 안 했다고요? 맨땅에 헤딩 중이었던 겁니까?”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우리 스타일이라고. 뭐 광고가 다 맨땅에 머리 박는 거지. 답이 어디 따로 있나?”
“와, 보기보다 과감한 스타일이시군요. 도무진 형이 왜 그렇게 대표님 칭찬을 늘어놨는지 알 거 같아요.”
도무진 얘기가 나오자 도혁이 만족한 듯 웃으며 생색을 내었다.
“무진이가 나를 좀 좋아하지. 왜, 칭찬 많이 했어요?”
“네. 인생관을 바꿔놓은 분이라면서 입에 침이 말랐죠. 네 인생도 바뀔 거라면서 지원하라고 며칠 동안 추천했고요. 아마 DW애드 지원하던 주에 태어나서 제일 자주 통화했을 겁니다.”
“다들 들었지? 내가 무진이 인생관을 바꾼 사람이야, 어?”
“그리고 상식도 바꾸는 분이죠. 광고제 전에 캠페인을 두 개나 더 진행하자니요.”
“우리 유능하신 도성진 디자이너 계시잖아.”
“아니, 어떻게 따 올 예정이냐구요. 가능하겠어요?”
“언제 안 되는 거 봤냐? 열심히 시안이나 그리고 있어. 아빠가 돈 많이 벌어올게.”
“악!오글거려!!!”
오글거린다고 소리치면서도 최민아가 도혁의 재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힘내서 잘 다녀오세요. 제작 스케줄은 어떻게든 맞춰볼게요.”
“역시 든든하구만. 파이팅!”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핸들을 잡았다. 서울에서 몰던 것처럼 좋은 차는 아니었지만 이 또한 새롭고 벅찼다.
“그럼 하이오 뚫으러 가보실까, 러프 시안 괜찮게 나왔는데 말이지.”
콧노래를 부르며 도착한 하이오 맥주 본사 건물로 들어섰다.
마침 미팅을 잡았던 마케팅 팀장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뭐가 바쁜지 무척 분주한 발걸음이었다.
“오늘 뵙기로 한 명도혁 대표님이시죠?”
“네. 금방 알아보시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DW애드의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혹시, 우리 하이오 메인 공장에서 PT를 대표님과 함께 봐도 되겠습니까?”
“네? 대표님이요?”
“네. 회장님께서 오늘 예정 없이 메인 공장을 잠깐 방문한다고 하세요. 일정 체크하시면서 명도혁 대표님 브리핑이 있다는 걸 확인하시고 함께 보고 싶어 하십니다. 초콜릿 광고를 인상 깊게 봤다고 하시면서 명 대표를 알고 계시더라구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미리 약속을 잡기는 했지만 첫 미팅이었고, 시안도 러프 정도였다. CEO에게 바로 보여주기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시죠. 첫 미팅이라 완벽한 시안은 아닙니다만 제가 충분히 설명드리고 PT 진행하겠습니다.”
“잘됐습니다. 저도 첫 미팅이라고 말씀드리니 감안하고 보시겠다고 하셨어요. 이쪽으로 오시죠. 저걸 타고 갈 겁니다.”
밖으로 이동한 팀장이 멀찌감치에서 오는 커다란 버스를 가리켰다.
버스를 보는 순간 도혁은 눈을 의심했다. 19세기 고전 만화영화에서나 볼 법한 고풍스러운 2층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버스가 멋있죠? 우리 제1공장은 더 멋있습니다. 맥주 박물관도 겸하고 있거든요. 시장 1위 기업으로서 회장님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곳이죠.”
시장 1위의 자부심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네.
도혁은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슬쩍 기획안의 표지를 열어 제목을 확인했다.
[글로벌 1위 기업의 자부심, 하이오 맥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