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223화 (223/252)

광고 천재 명도혁 223화

“인간은 손이 두 개인데 말입니다.”

강태오가 기막혀하며 회의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성진이 뽑아 온 시안을 살펴보던 차현우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 팀장, 혹시 도성진 씨한테 미리 기획안 보여줬어?”

“네? 기획안이 있어야 보여주죠. 우리 아직 안 만들었잖아요.”

“참, 회의만 했었지? 그럼 우리 컨셉을 말해준 건 아니고?”

“아니요. 그럴 틈이 있었나요. 어머, 정말 그러네요. 도성진 씨 어떻게 우리 컨셉을 알고 시안을 이렇게 잡은 거죠?”

도성진의 시안은 놀랍게도 음주 운전 방지 공익광고였다. 그것도 4가지나 만들고 있는 모습에 최민아가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악! 나 소리 지를 뻔했잖아요. 무려 네 가지라니. 너무 좋다. 이 열정! 이 패기!”

“열정이라기보다는 습관입니다만.”

“열정이나 습관이나 나한테 유리하면 됐죠. 이제 진짜 한시름 놔도 되는 걸까요. 도성진 씨 손이 무진이만큼 빠르다구요.”

의외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도성진이었다. 감격한 최민아와 도성진이 속닥거리는 사이 남자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아이데이션에 집중했다.

4개의 시안을 동시에 만드는 괴물 뉴비에게 안겨줄 기획안을 짜내야 했으니까.

강태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이때가 제일 괴로워. 큰 틀은 있는데 세부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할 때 돌아버릴 거 같다고.”

“모든 광고쟁이가 느끼는 통증 아닐까. 1위 맥주, 음주 운전, 공익광고, 컨셉은 좋다 이거야. 어떻게 구현할 거냐고.”

“아이고 머리야. 현우야 맥주나 줘봐라. 제품이나 마십시다.”

“그럽시다.”

차현우가 공중으로 맥주 캔을 던지고 강태오가 치익 캔을 열었다. 그걸 본 도성진이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며 제 화면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도혁은 멀찌감치 직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역시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그림을 떠올리는 데 고통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뒷목을 주무르며 맥주를 들이켜자 최민아가 놀려댔다.

“우리 대표님도 아이디어 막히나 보네요. 술 찾는 거 보니까.”

“늘 그렇지. 막막하고 갑갑하고. 나라고 뭐 다르겠냐.”

“천하의 명도혁 대표님도 그렇구나. 조금 힘이 나는데요?”

머릿속에 21세기의 모든 광고가 촤르륵 펼쳐지는 회귀자에게도 재창조의 세계는 어렵기만 하다. 새롭고 신선하고 자극적이면서도 감동이 있으면서도 컨셉을 모두 담고 있는 크리에이티브를 생산해야 하니까.

심지어 옥외는 한눈에 컨셉을 모두 담아내야 하는 찰나의 예술 아닌가.

갑갑한 마음에 넥타이를 벗어 던지곤 다시 컨셉을 정돈하고 있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알람이 울려댔다.

“으, 벌써 회의 시작이냐? 환장하겠네.”

“뭐 좀 나왔어?”

흩어졌던 직원들이 한자리에 다시 모였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훅훅 털며 강태오가 소리쳤다.

“자자, 신입부터 해봅시다. 얼마나 아이디어를 잘 뽑아 왔나.”

“아직 구체적으로 기획안이 나오지 않아 대략적인 그림만 잡아봤습니다.”

“오~ 밑밥은 일단 잘 깔았고. 일단 한번 봅시다.”

사실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시안이었다. 한눈에 어떤 내용인지 알아볼 수 있게 직관적으로 만들어 왔으니까.

“첫 번째 시안, ‘어디까지 달리시겠습니까?’입니다.”

맥주병에 발을 달아둔 코믹한 광고였다. 의외로 한국적인 카피에 도혁의 눈이 커졌다.

“이건 카피가 좋은데?”

“아, 감사합니다.”

“좋아, 좋은데…….”

도혁이 말을 이으려 하자 차현우가 피식거렸다.

“난 우리 대표님이 좋다고 할 때 제일 무서워.”

“나도!”

“저도 동감입니다.”

직원들의 말에 도성진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당황했다.

“좋아, 좋은데, 이 뒤로 지적이 붙잖아요. 안 좋다는 소리지.”

“아니, 정말 그런 뜻이 아니야. 좋긴 분명히 좋아. 좋은데 말이지.”

“네. 그럼 뒷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최민아가 양손을 공손히 모아 시안을 가리켰다.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판 깔리니까 민망하긴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는데 카피가 의외로 한국적이라 좋았고, 그래서 모호했어요.”

“아, 그렇습니까?”

“달린다는 말. 영어로는 썩 와닿지 않으니까. 한국에서는 술 먹고 달린다고 말하지만 미국은 아니잖아요.”

“아, 처음부터 카피를 영어로 적을 걸 그랬습니다. 한국분들이 계시다 보니 저도 모르게 한글로 작업을 했네요.”

교포답지 않은 말을 하며 도성진이 다시 땀을 닦았다. 도혁이 마우스를 잡고 카피에 동그라미를 쳤다.

“하지만 한글 카피 자체는 상당히 마음에 들어요. 한국에서 집행하는 공익광고에 꼭 넣어보고 싶을 정도로 괜찮았습니다.”

“이건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당연히요.”

도혁이 웃으며 다음 시안을 클릭했다.

“오! 이거 제법 괜찮은데요?”

이어진 두 장의 시안은 같은 컨셉이었다. 자동차가 그려진 두 개의 캔. 하나는 따지 않은 새 맥주 캔이고 다른 쪽은 다 마시고 찌그러진 캔이었다.

찌그러진 캔을 따라 자동차가 구겨진 모습이 음주 후 운전의 위험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시안은 가득 찬 맥주병과 텅 빈 맥주병이 깨어진 모습을 표현했다. 역시 깨진 병에 그려진 자동차가 망가진 모습으로 음주 운전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 시안 너무 좋지 않아요? 술을 다 마시고 나면 차가 찌그러진다는 걸 너무 잘 표현한 시안이에요. 난 한 번에 확 꽂히는데요.”

“최 팀장 말에 동감. 이거 상당히 괜찮은데?”

“옥외로도 괜찮고, 인쇄하면 더 와닿을 것 같아요.”

최민아의 도성진이 가슴을 쓸며 도혁의 표정을 슬쩍 보았다. 그걸 도혁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도성진 씨,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첫인상은 냉철하고 이지적이었는데 의외의 모습이네요.”

“출근 첫날이고 시안을 처음 선보이는 자리라 그런지 제법 긴장이 되네요. 그리고 무진이 형과 달리 좀, 소심한 성격입니다.”

“무진이도 소심해요. 시안 통과 못 하면 얼마나 삐지는데요.”

“그래요? 무진이 형도 그렇다니 아주 조금 위안이 됩니다.”

도혁은 다시 땀을 닦는 도성진을 보며 초보 광고인이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두 번이나 사는 바람에 너무 먼 옛날이었지만 떨렸던 감각만큼은 생생했다.

“하긴 타인 앞에 날것의 아이디어를 보인다는 건 언제나 긴장되는 일입니다.”

“네. 철저하게 준비하고 발표하는 형식이 아니라서 더 당황했습니다. 항상 그렇게 완전한 형태로 과제를 제출하고 공모전에 참가해 왔거든요.”

“실전에선 처음부터 철저하게 할 수가 없어요. 아이디어가 정돈되어야 퀄리티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곧 익숙해질 겁니다. 잘하고 있는데요, 뭐.”

“감사합니다!”

우렁찬 도성진의 대답과 동시에 다음 시안이 화면 위로 펼쳐졌다.

“에그. 이건 버리자.”

“너무 무서워. 이 사람 보기하고 또 다르네. 그로테스크한 거 좋아하는구나.”

위협 소구를 강조한 교통사고 컷이었다. 최민아가 기겁하며 화면을 덮었다.

“얼른 닫읍시다. 저는 두 번째 세 번째가 좋네요. 고생 많았어요.”

“휴우, 드디어 끝났네요.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고식 대만족인데요?”

“역시 DW애드 신입다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도혁의 말에 모두 끄덕이며 동감했다. 그가 일어서며 막 자신의 시안을 펼쳐 보이려던 순간이었다.

“계십니까? 여기가 DW애드 맞나요?”

한눈에 보기에도 명품으로 휘감은 중년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자를 본 최민아가 입을 틀어막으며 커다래진 눈으로 도혁에게 속삭였다.

“브, 브레……. 저기 대표님. 저분…….”

“안녕하십니까. 고렌느의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브레드라고 합니다.”

* * *

의외의 손님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얼른 봐도 고가인 최고급 슈트와 시계, 구두로 휘감은 부자라는 것과 고렌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것. 그리고 최민아가 한 번에 알아볼 정도의 유명 디자이너라는 사실 정도가 전부였다.

도혁은 대표실로 그를 안내하며 빠르게 남자를 스캔했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이었지만 중년 남자답지 않게 화장을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옆으로 길게 찢어진 실눈을 따라 그린 아이라인이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가뜩이나 뱀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더 예리하게 강조한다고나 할까.

남자 역시 도혁을 물끄러미 관찰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명도혁 씨.”

“반갑습니다. 고렌느 브랜드는 알고 있습니다만 디렉터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영광입니다.”

남자가 실눈을 가늘게 뜨자 섬뜩한 기분이 밀려왔다. 퍽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사전 정보가 없었지만 LVNN과 고렌느가 경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도혁은 천천히 드립 커피를 내리며 여기까지 찾아온 남자의 의도에 의문을 가졌다.

브레드는 도혁이 건넨 커피를 받아 들고 입술을 잠깐 대더니 만족감을 표했다.

“아주 좋은 커피군요. 향도 맛도 명품이에요. 바리스타 출신이라고 느낄 정도로 말입니다.”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말입니다. 어디를 가든 커피 맛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네일이나 미용을 위해 샵에 들러도 반드시 커피부터 확인해요. 커피 맛이 없는 집은 감각이 없거든요.”

실눈이 빠르게 도혁을 훑었다. 빙빙 돌려서 말하는 스타일이 조금은 거슬렸다. 도혁이 먼저 운을 떼었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왜 왔는지 물어보시는 거군요.”

의도를 물었음에도 다시 뜸을 들이며 브레드가 커피 잔을 들었다. 느긋하게 등을 의자에 기대고 다리까지 꼬고 있다.

‘염탐하러 온 건가. 여기까지 왔을 때는 목적이 있을 텐데.’

계속 이리저리 도혁을 관찰하는 것이 조금 짜증 나려던 순간 남자가 툭, 본심을 드러냈다.

“혹시 LVNN과 일하십니까?”

“이미 알고 오신 듯하군요. 그렇습니다.”

“얼마 제안하던가요.”

이번엔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온다. 빙빙 돌리다 훅 찌르는 모습이 전략적이고 교묘한 남자다. 짧은 미팅이었지만 오랫동안 사업가를 상대해 온 직감이 스쳐 갔다.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구체적인 계약 사항을 알려달라는 말씀이신데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점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를 줬든지 50% 더 드리죠.”

“네?”

뜻밖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계약금이 얼마인 줄 알고 50%를 더 준다는 건가.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심지어 초면이구요.”

“비즈니스에서 돈 더 준다는데 초면이 무슨 상관입니까? 망설일 필요 없이 저와 함께하시죠. 위약금은 당연히 이쪽에서 부담할 겁니다.”

“글쎄요. 갑자기 파격 제안이라니 조금 당황스럽네요.”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저에게는 당연한 일이니까요.”

말을 끊은 브레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명도혁 씨를 뺏을 거거든요. 그 미친 여자 밑에서 빼주겠다고요. 이 브레드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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