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20화
LVNN의 뉴욕지사 앞에서 도혁과 강태오가 거대한 빌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현대적 디자인인 건물의 유리가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걸 본 강태오가 감탄했다.
“우리 LVNN에서 미팅 제안이 들어온 거지?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그룹 LVNN!”
“네. 맞아요. 고작 네 명뿐인 우리가 콜을 받았죠.”
“아우, 나만 떨리냐? 왜 이렇게 담담해?”
도혁이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문 앞의 버튼을 눌렀다.
건물의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 둘을 맞아주었다.
“명도혁 씨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만.”
“디렉터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비서로 보이는 남자의 안내로 이동했다. 중간중간 지문을 찍어 문을 여는 철저한 보안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강태오가 두리번거리며 촌티를 냈다.
“이야, 실내도 엄청나게 화려하네. 우리가 알 만한 명품 브랜드는 다 붙어 있구만.”
“맞아요.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전략을 쓰는 글로벌 기업 중 하나입니다. 이 브랜드도 인수했구나.”
감탄하는 사이 스텔라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피에르가 반갑게 둘을 맞았다.
“오! 명도혁 씨, 이쪽은 그때 보았던 미스터 강?”
“네. 강태오라고 합니다. 두 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짧은 강태오의 인사를 들은 스텔라의 눈에 호기심이 서렸다.
“스코틀랜드 억양을 쓰시는군요. 우리 회사 FW 시즌 주력 아이템을 입으셨구요.”
“네. 가장 즐겨 입는 브랜드입니다.”
“독특하게 소화하셨네요. 스카프와의 조화라니요. 그리고 하얀색 바지의 커팅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그랬구나. 강 국장님이 FW 시즌 주력 상품을 걸치고 다녔구나. 저 할아버지 같은 스카프와 백바지를 대충 가위로 자른 바지가 스텔라의 취향이라니 놀라울 뿐이었다.
도혁은 애써 미소 지으며 스텔라와 강태오를 번갈아 보았다. 역시 크리에이터의 세계란 놀라운 것이다.
피에르가 차를 권하며 운을 떼었다.
“요즘 뉴욕을 뒤집어놓으셨더군요. 게임부터 초콜릿 광고까지 아주 인상 깊게 봤습니다. 뉴욕을 게임 맵으로 바꿔놓지 않나, TT자동차 캠페인도 엄청났죠.”
“인상적이었다고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항아리 기부에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뉴욕 시민들, 특히 어린이들까지 고사리손으로 캠페인에 참여하는 모습이 가슴을 울리더군요.”
연말에 어울리는 따뜻한 캠페인이라며 피에르가 칭찬을 이어갔다. 스텔라가 짧은 눈짓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저는 크리에이터이자 사업가입니다. 무엇보다 저의 동물적인 감각을 믿고 있죠. 그래서 말인데 명도혁 씨와 협업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협업이라면 캠페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몸값이 오르기 전에 잡아놓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모든 사업군이 그렇겠지만 패션 산업은 인적 리소스에 대한 경쟁이 매우 치열합니다.”
미팅에 들어오기 전 조사를 통해 최근 LVNN에서 키워놓은 디자이너 둘이 경쟁사로 이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도혁은 끄덕이며 스텔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디자인의 퀄리티로만 승부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마케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작품도 사장되게 마련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명품 브랜드들이 강태오 국장님처럼 시대를 앞서나가다 보니 대중성에 소홀하게 마련인데요, 크리에이티브하면서도 대중성의 균형을 잡아주는 마케터가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렇군요.”
“우리 명도혁 씨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모셨는데 이렇게 명품의 프론티어를 걷고 계신 강태오 씨까지 계시니 든든하기 짝이 없네요.”
스텔라가 DW애드를 띄워주자 강태오가 빨간 스카프를 매만지며 으쓱해 보였다. 도혁이 감사를 표하면서도 현실적인 면을 언급했다.
“이런 제안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만 저희가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LVNN 전반의 마케팅을 함께 진행하기엔 아직 규모 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 다른 광고 역시 옥외와 프로모션 위주로 진행하고 있구요.”
“알고 있습니다. 일단 협력 업체로 등록한 후 특정 브랜드의 옥외 부분만 떼어 전담하면 어떨까 합니다. 점차 실적에 따라 마케팅 전반을 맡는 날도 오리라 믿습니다.”
보통의 대기업에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시기가 조금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기업 이미지 광고를 대대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스텔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도혁을 물끄러미 보았다. 속을 읽는 듯한 짙은 눈빛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명도혁 씨를 선점하고 싶습니다. 다음 시즌 광고까지는 텀이 제법 있지만 미리 계약을 하고 싶다면 욕심일까요.”
“별말씀을요. 저희로서는 영광입니다.”
얼떨결에 결국 도장까지 찍고 나왔다. 당장 진행하지 않을 광고를 이렇게 시안 한 장 없이 계약한 건 한국에서도 없었던 일이었다.
건물을 돌아 나오며 강태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에도 느꼈지만 두 분 다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네. 으. 이제 긴장이 좀 풀린다.”
“하나도 긴장 안 한 것 같던데요, 뭐. 패션 칭찬도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역시 패션을 선도하는 리더들이 내 복색의 가치를 알아본다니까! 봤지? 봤지?”
선도와 리더, 그리고 복색이라는 촌스러운 말을 늘어놓으며 강태오가 가슴을 활짝 폈다.
“아무튼 우리 백지 계약한 거 아니냐? 이야,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믿어주시니 감사한 거죠.”
“미래 가치를 인정한 거잖아. 다음 시즌 광고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그동안 더 실적을 낼 거라고 확신한 거지.”
“옥외 협력 수준이니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가야겠죠. 아무튼 좋긴 하네요.”
“그러니까. 화끈하구만!”
강태오가 고갯짓으로 술 한잔을 권했다.
“백지 계약한 기념으로 한잔할까? 패션 리더가 한잔 사겠다고!”
바람결에 빨간 스카프가 사정없이 나부꼈다. 여전히 범인의 눈에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패션의 선두 주자였다.
* * *
“키야. 거품이 끝내주는구만. 어때? 여기가 맨해튼에서 제일 유명한 펍이라고.”
“네……. 알고 있어요. 조용히 좀 해요. 백지 계약 따 와서 신난 건 알겠는데 다들 쳐다본다구요.”
“내 패션이 멋있어서 보는 거야.”
“으이구.”
일을 하던 차현우와 최민아까지 불러 인근 펍으로 들어왔다. 가볍게 한잔 나누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참, 오후에 서울에서 소식 왔어요. 그 스티커 마케팅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대박 났대요!”
“가게마다 불티나게 팔린다고 하지?”
“네. 편의점 밖에 써 붙여놨다고 하더라구요. 네스티 다 팔렸다고. 물량이 달려서 광고주가 웃다가 울다가 한다는 전언이에요.”
예상했던 상황이라 도혁이 시원하게 잔을 들어 올렸다.
“서울이나 뉴욕이나 잘 진행되고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한잔하시죠.”
“멋지구만. 이야! 이멤버 포에버를 위하여!”
“위하여!”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들이켜는 맥주만큼 기분 좋은 한잔이 있을까. 잔을 마주 댄 직원들의 얼굴에서 뿌듯한 미소가 번져갔다.
단번에 비운 잔을 채우며 최민아가 맥주의 브랜드를 가리켰다.
“여기 하이오 맥주에서 미팅 제안 온 거 아시죠?”
“들었어. 안 그래도 차기 캠페인을 하이오 맥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LVNN에서 들어오라고 해서 당황했었다고.”
“참, LVNN 다녀온 얘기 좀 해봐요. 스텔라 무섭죠?”
“천하의 스텔라가 내 패션을 인정해 줬어. 굉장히 마음에 든다고 표현했다고.”
“네? 시안이 아니고 패션이요?”
“그렇다니까. 명 대표 말을 좀 해봐.”
놀랍고 믿게 힘들었지만 사실이었기에 도혁이 끄덕이며 긍정했다. 최민아가 놀라 소리쳤다.
“세상에. 극과 극은 통하는구나.”
“언젠가는 나의 스타일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믿었는데, 역시 스텔라야. 암.”
“패션 말고 사업 관련한 얘기는 없었어?”
차현우가 묻자 도혁이 백지 계약에 관해 말해주었다.
“차기 시즌 광고 중 옥외 부분을 진행하자고 했어요. 브랜드는 아직 특정하지 않았구요. 최신 광고를 집행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와, 그럼 시안 한 장 안 보고 도장을 찍어 왔단 말이야?”
“뭐 아직 작은 협력 업체 중 하나이지만 어쨌든 계약한 건 맞습니다.”
도혁의 겸손한 말에 강태오가 손을 내저었다.
“우리 명도혁 대표님 몸값 오르기 전에 잡아놓을 거라고 말하는 걸 내가 똑똑해 들었어. 도장부터 찍고 보자는 느낌이었다니까?”
“이야, 역시. 스텔라가 보는 눈이 있구만. 그러니 LVNN 그룹을 이렇게 키웠겠지만.”
“이제 시작인걸요. 아무튼 잘된 일이긴 합니다.”
“이거, 미국팀도 인원 보강을 좀 해야 하나?”
차현우가 빈 잔에 맥주를 채우며 걱정했다.
“외주에도 한계가 있고, 이번 헤드 초콜릿 광고를 집행하면서 통해서 느낀 거지만 점점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규모로 커지고 있어.”
“하긴. 기부 캠페인으로까지 번질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직원을 늘릴 때이긴 한 것 같습니다. 차 국장님이 현지 채용 진행해 주세요.”
차근차근 계획대로 미국지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직원들을 바라보며 술을 추가로 주문하려던 때였다.
“어이! 그럼 이만 일어납시다. 거, 차 열쇠가 어디 있더라.”
“저기 손님. 오늘은 술을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운전은 안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택시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에이, 이 정도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이래?”
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장면이었다.
땅이 크고 넓은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대리운전이 대중적이지 않다. 보통은 일행 중 D.D(Designated Driver)를 지정하고 술을 먹지 않은 D.D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만취 상태로 술을 마신 음주자들의 음주 운전은 심각한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차현우가 미간을 좁히며 유감을 표했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한국이면 상상도 못 할 일 아닌가?”
“한국에서야 대리운전이 흔하고 중간중간 교통경찰들 단속도 잦으니까 어지간하면 음주 운전은 안 하려고 하죠.”
“저러다 사고 내면 처벌은 또 한국보다 강력하더라고. 인식과 법의 간극이 크다고나 할까?”
인식과 법의 간극이라. 차현우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옴과 동시에 도혁이 컵을 탕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성큼성큼 만취한 남자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건넸다.
남자는 도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용히 차 키를 안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택시를 불러 남자를 보낸 바텐더가 도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 하셨길래 손님이 고집을 꺾은 걸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저분, 음주 운전이 습관이시거든요. 벌써 두 번이나 처벌받은 전력이 있어서 말린 겁니다.”
“곧 광고로 만나게 되실 겁니다.”
광고라는 말에 최민아가 눈을 끔뻑이며 다가왔다.
“광고라니요. 저 남자한테 광고를 말해줬다는 거예요?”
“맞아. 카피 한 줄 말해줬지. 그리고 그건 우리가 진행할 다음 캠페인이기도 해.”
도혁이 손가락으로 마시던 맥주의 브랜드를 가리켰다.
“하이오 맥주, 가닥을 잡은 것 같다. 인식과 법의 간극, 캠페인으로 메울 수 있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