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15화
“자, 한 잔씩들 하시죠. 내돈내산 코코아라고.”
“엥? 대표님이 커피가 아니라 코코아를 샀다구요? 단 음료 안 드시잖아요.”
최민아가 아메리카노에 시럽조차 잘 넣지 않는 도혁이 코코아를 사 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녀가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 들곤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자주 받아본 느낌인데, 제 짐작이 맞나요?”
“역시 예리한 우리 최 팀장, 모두 모여보시죠. 제품 분석 시작합시다.”
“제품 분석이요?”
도혁이 코코아 잔을 들고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국장 둘이 다가와 의아해했다.
“갑자기 제품 분석이라니. 이 코코아는 뭐야.”
“네. 떠오르는 게 있어서 코코아 광고를 뚫어볼까 합니다.”
“헤드 초콜릿이라도 들어가게?”
“글쎄요. 고민 중이에요. 헤드 초콜릿으로 가도 되고, 뭐 초콜릿 찍어내는 회사는 많으니까.”
“가만 보면 DW애드는 광고대행사인데도 우리가 갑 같아.”
차현우가 코코아 잔을 들며 부연했다.
“보통은 대행사가 당연히 을인 입장이잖아. 오죽하면 광고주님이라고 부를까. 근데 명 대표 말 들으면 우리 광고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라는 배짱이 느껴져. 다른 곳에 팔아버리면 그만이라고 항상 말하잖아?”
“맞아. 들을 때마다 아주 짜릿해. 하긴 맞는 말이지. 초콜릿 회사가 거기뿐인가, 안 사면 너네 경쟁사가 사버릴 거다, 이런 마인드 아주 좋아.”
강태오가 맞장구를 치자 도혁이 의자에 몸을 좀 더 깊이 묻으며 덧붙였다.
“갑과 을이라. 저는 흔히 연예인을 예로 들곤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팬과 연예인의 관계는 팬이 맹목적이고 일방적으로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여기잖아요.”
“안 그렇다는 거야? 연예인들이야 뭐, 팬 개개인을 전혀 모르잖아.”
“개인은 모르지만 팬이라는 집단을 놓고 봤을 때 오히려 연예인이 더 불안해하곤 합니다. 오늘 A라는 그룹을 미친 듯이 좋아하다가도 내일은 B라는 그룹으로 갈아타는 게 팬이거든요.”
“오호. 하긴 안티로 전향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그제야 알겠다는 듯 최민아가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선택받는 건 연예인 쪽이네요. 팬들에게 언제나 갑의 입장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맞아. 그걸 아는 스타들은 크게 되는 거고, 아님 방송가의 이슬로 사라지는 거지.”
“그럼 어떤 초콜릿 광고주가 방송가의 이슬이 될지 살펴볼까요?”
최민아가 노트북을 열어 미국 내 초콜릿 시장 조사를 하려 하자 세 남자가 동시에 환호했다.
“올~ 우리 최 팀장, 미국 오더니 AE 다 됐구만.”
“왜 놀리고 이러실까. 기획을 내가 해야 디자인이 더 촘촘하게 나오곤 하는 거 많이 느껴요. 예전 창업 당시 초심으로 돌아갔다고나 할까요.”
“그렇지. 자, 그럼 우리 초심으로 돌아간 최 팀장과 함께 시장조사부터 해봅시다.”
“그런데 대표님, 갑자기 왜 초콜릿에 꽂히셨어요?”
“우연히 구름 속을 산책하는 아이를 만났거든.”
“네??”
최민아의 휘둥그레진 눈을 바라보며 도혁이 핫초코의 구름처럼 부드러운 거품을 머금었다.
* * *
헤드 초콜릿.
세계에서 가장 큰 초콜릿 회사 중 하나로 전 세계에 유통망이 뻗쳐 있는 다국적 기업이다.
뉴욕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도시에 본사와 공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차현우와 최민아가 시장조사를 맡은 사이 강태오와 함께 헤드 초콜릿의 공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뉴욕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운전하기 편하구만. 한적하고 좋아.”
“그렇네요. 드라이브만 해도 힐링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이 길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린다.”
“통화할 때 담당자 말로는 입구 쪽에 들어서면 모를 수 없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고 하던…… 헉! 저게 뭐야.”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도혁이 멀찌감치 보이는 무언가를 보고 소리쳤다. 강태오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에는 거대한 여자아이의 머리 모양 조형물이 두 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철제의 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긴 흑발 머리를 한 쌍둥이 머리가 세워져 있었는데, 초콜릿 색깔의 기괴한 조각이었다.
“으, 섬뜩한 거 나뿐이냐? 뭔가 으스스한데.”
“그러게요. 건물도 오래된 성을 개조한 것 같아요.”
“이래서야 동심 파괴 아닌가? 견학이라도 온 애들 오줌 싸고 도망가겠다.”
“그게 컨셉인가 보죠. 근데 초인종도 없고, 문을 흔들어야 하나.”
근처에 대충 차를 댄 둘이 철제 문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곧 양쪽에 서 있던 여자아이의 눈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더니 톤의 높낮이가 다른 두 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양쪽에서 동시에 나오니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누구십니까?
“헉! 놀라라. 카메라랑 스피커가 설치됐나 봐. 으.”
도혁도 강태오처럼 놀랐지만 가슴을 쓸어내리고 머리 조형물에 자신을 소개했다.
“전화드렸던 광고대행사 DW애드입니다.”
-들어오시죠.”
-들어오시죠.
끼이익, 철제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둘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도 마찬가지로 초콜릿 빛깔을 한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문 앞을 지키던 거대 머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기묘한 조각들이었다.
폐가와 같은 분위기의 정원을 둘러보며 강태오가 후드득 몸을 떨었다.
“우리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는 거냐?”
“왜요. 무서워요?”
“명 대표는 안 무섭냐? 내가 쫄보인 거야? 그, 뭐시기냐, 공포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라고!”
“제품이 초콜릿이니까, 장르를 공포 동화라고 해둡시다.”
“힉!”
강태오의 외마디 비명에 도혁이 고개를 돌렸다. 건물 속에서는 문 앞의 헤드와 똑같이 생긴 무표정한 쌍둥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헤드초콜릿 공장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헤드초콜릿 공장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나 같은 말로 인사를 꺼내며 동시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높낮이가 다른 두 아이의 목소리에 두 남자 다 매우 놀랐지만 애써 담담한 척 함께 인사했다.
“아저씨께서 기다리십니다. 따라오시죠.”
“아저씨께서 기다리십니다. 따라오시죠.”
제발 한 사람만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끼이익 역시 철재로 만든 현관문이 열리고 이 층에서 비쩍 마른 남자 하나가 걸어 내려왔다.
역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입이 쭉 찢어진 광대 분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강태오는 욕이 나오려고 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곤 억지웃음을 지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도혁 역시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린 듯 어색한 미소로 예의를 갖추었다.
“반갑습니다. 전화드렸던 DW애드 명도혁입니다. 이쪽은 강태오 국장이구요.”
“네. 처음 뵙겠습니다. 광고대행사라면 광고 쪽 업무일 텐데 일 얘기를 하기 전에 공장 한 바퀴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네?”
“여기까지 오셨는데 우리 초콜릿 공장을 직접 보여 드리고 맛있는 초콜릿도 함께 먹어보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우린 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강호의 도리라면 할 수 없겠지만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다. 도혁이 선뜻 대답하지 않자 광대 남자가 새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 공장에 발을 들인 이상 초콜릿을 먹고 가야 한답니다. 우리 회사의 오랜 전통이지요. 빈손으로 손님을 보내지 말라.”
“빈손으로 손님을 보내지 말라.”
“빈손으로 손님을 보내지 말라.”
저 긴 흑발의 쌍둥이가 한 명만 말을 해도 훨씬 마음이 가벼울 거라고 생각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냈다.
다행히 눈 앞에 펼쳐진 장르는 동화였다.
공장의 안쪽으로 들어서자 침침했던 입구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명랑하고 경쾌한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동화 시스템에서 초콜릿을 쭉쭉 뽑아내고 있었다.
중간중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위생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우주인처럼 완벽하게 몸과 얼굴을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혁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했다.
“저는 위생을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렇게 우주복과 같은 복장을 하고 초콜릿을 만들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매우 밝네요.”
“흠, 다음 방으로 이동하시죠. 연구실입니다.”
연구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래된 항아리와 냄비 따위를 들고 씨름 중이었다.
“방금 보셨다시피 우리의 제작 설비는 세계적 수준입니다. 현대적이고도 완벽하죠. 다만 제품 연구만큼은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광대 남자의 표정에 기묘한 미소가 서렸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항아리에 숟가락을 넣어 초콜릿을 퍼 올렸다. 그러곤 흙으로 만든 조그만 그릇에 초콜릿을 담아 두 남자에게 건넸다.
초록색이 감도는 묘한 빛깔이 매우 불길했다.
“직접 맛을 한번 보시지요. 민트와 초콜릿을 섞은 시도를 해봤습니다. 저의 오랜 야심작이에요.”
“민트, 초코요?”
이것이 시대의 흐름인가. 도혁은 미래에서나 맛보던, 아니, 썩 맛까지는 보고 싶지 않았던 초콜릿을 말없이 내려보았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초콜릿을 받아 든 도혁과 달리, 편견이라곤 없는 강태오가 덥석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한입 초콜릿의 맛을 음미한 강태오가 기쁜 표정으로 광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거 신선한데요? 저는 취향에 딱 맞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대중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강태오 국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미래의 민초파시구만.
도혁은 쩝 입맛을 다시곤 슬쩍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걸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섬뜩했지만 뭐, 내 손으로 민초를 집어 먹는 쪽은 아니라서 말이죠.
“……이쪽 분의 반응을 보니 아직 연구를 더 해야겠군요.”
“개인적으로 저의 취향은 아니지만 매출은 제법 괜찮을 거라고 전망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입맛이 있고, 나와 다른 취향도 존중되어야 하니까요.”
“마이너하지만 시장성은 있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제품군에 대해선 선두 기업이 나서는 게 여러모로 그림이 좋지요.”
도혁의 말에 만족한 남자가 끄덕이며 대꾸했다.
“전문가다운 분석이 흥미롭군요. 그럼 제 방으로 올라가서 자세한 말씀을 나누어보시죠.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제안을 하고 싶으시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공장을 모두 둘러본 도혁의 머릿속에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 추가되었다.
“여기를 관광 명소로 만드실 생각, 없으십니까? 어린이들을 위한 컨셉을 잡아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공포 동화라거나.”
“공포 동화라구요?”
“공포 동화라구요?”
더없이 공포스러운 무표정으로 두 쌍둥이가 동시에 소리쳤다. 광대 남자가 입매를 끌어 올리며 턱을 어루만졌다.
“어린이를 위한 초콜릿 공장이라. 민트앤드초콜릿도 실컷 먹을 수 있는 견학 프로그램을 마련해 봐도 좋겠군요. 크하하.”
“그, 그렇습니다. 하하.”
도혁이 공장에 들어설 때와 같이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그린 듯 함께 따라 웃었다.
어색한 미소가 천천히 번져가는 기이한 미팅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