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212화 (212/252)

광고 천재 명도혁 212화

[각자도생(各自圖生)]

같은 시각. 한국의 DW애드코리아 본사에도 뉴욕지사와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막 출근한 직원들이 휴게실에 모여 앉아 티타임 중이었다. 탁기준이 커피 잔을 홀짝이는 디자이너들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각자도생을 가리켰다.

“저 벽에 붙은 문구를 항상 가슴에 새기라고. 리더가 없을 때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법이야. 알겠냐?”

“넵! 잘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 뭐시기냐, 건설 회사 시안 꼼꼼하게 챙기고. 어?”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커피만 마저 마시면 안 될까요?”

말은 각자도생이라고 하면서도 새벽같이 업무를 파악 중인 탁기준을 보며 한수철이 피식거렸다.

“각자도생할 틈을 좀 주시고 캐치프레이즈를 붙이시죠? 너무 책임감에 짓눌리신 거 아닙니까?”

“하, 너도 내 입장 돼봐. 아주 정신이 나갈 것 같다. 국장일 때랑 또 달라.”

“컨트롤할 광고주가 워낙 많으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명 대표는 뇌가 쪼개져 있나. 이 많은 광고를 하나하나 다 챙기지 않았어?”

“어! 뇌 쪼개진 남자한테 메일 왔는데요?”

무심코 노트북을 열던 한수철이 도혁에게 온 메일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첨부 파일을 열어본 한수철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환해진 그의 얼굴을 본 탁기준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확인했다.

“이야, 미국팀 다들 얼굴 좋구만. 우린 서울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말이지. 뉴욕 관광하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그렇다고 하기엔 차 국장님 방이 너무 지옥인데요? 어우, 강 국장님은 여전하시고…….”

“어? 강 국장님이요?”

멀찌감치에서 듣고 있던 도무진과 황도준이 강 국장이라는 말을 듣고 뛰어왔다.

“어!!! 최 팀장님이다!! 팀장니이이이이임!!!!!!!”

“엉엉. 최 팀장님 없어서 죽을 맛이라고요. 도대체 언제 오냐고요…….”

최민아의 얼굴을 보고 오열하는 두 디자이너 사이에서 이진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표님 사진은 없습니까?”

“그러게. 명 대표 사진만 없네. 수철아 명 대표도 사진 보내라고 답장 써.”

“알겠습니다. 와, 오랜만에 보니까 다들 너무 반갑네요.”

“그러니까. 어! 이거 DW애드 관련한 기사 아니야?”

탁기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일에는 뉴욕에 설치한 게임 광고와 현지 기사 반응 등 근황이 담겨 있었다.

“대박. 대에박. 곧 한국에 기사 나오겠는데?”

“맞아요. 엑슨 본사에서 보도 자료 뿌리겠죠. 이야, 뉴욕의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게임 맵을 만드셨다! 맨해튼 한가운데 달러도 흩뿌리고.”

“미쳐 버리겠다.”

감탄한 탁기준이 탕탕 테이블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우리가 한국에서 징징댈 시간이 없구만! 한 팀장, 최근에 피티 의뢰받은 회사들 목록 정리해서 들어와!”

“넵 알겠습니다. 전투 의욕이 불타오르는데요?”

“그러취! 정신 차리고! 자, 업무 시작합시다!”

낮과 밤을 번갈아, 뉴욕과 한국의 직원들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힘을 내고 있었다.

* * *

“내 사진은 왜 보내래. 잘생긴 얼굴이라 보고 싶나?”

-보고 싶은가 보죠. 나도 그렇고.

전서윤과 통화 중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되도록 자주 연락하고 있었다.

“서윤 씨 밤새워 촬영한 건가? 몸도 약한데 걱정이네.”

-곧 들어갈 거예요. 피곤하긴 하다. 도혁 씨도 몸 잘 챙기고 그, 직원들도 잘 챙겨주세요. 객지에서 다들 고생이 많네.

“서윤 씨도 마찬가지잖아. 얼른 들어가서 자요.”

-왜, 나 자면 셀카 찍게요?

“어떻게 알았어.”

밤샘 촬영을 마친 전서윤에게 굿나잇 인사를 전하고 셀카 모드에 돌입했다. 쑥스러워 평생 안 할 짓이었지만, 멀리 있는 이들에게 생존 신고로는 얼굴 보여주는 것 이상이 없었으니까.

‘도대체 얼굴톡은 언제 상용화되는 거냐. 갑갑하구만.’

언제든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플로 얼굴을 보며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곧 열리겠지만 아직은 요원한 시점이었다. 영상통화가 있었지만 아직은 너무 비쌌고 화질도 좋지 않았다.

도혁은 투덜거리면서 얼른 사진을 찍어 가족들과 전서윤, 그리고 직원들에게 제 얼굴을 전송했다.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도 오글거려 손가락이 저절로 말렸다.

“뭐 해요, 대표님?”

“어, 어? 그게, 큼.”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도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는 최민아를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랑, 직원들한테 얼굴이라도 보여 드려야 할 거 같아서.”

“서윤 씨도 말이죠?”

“그렇지, 뭐. 아이디어는 잘 풀리냐?”

애써 말을 돌리는 도혁을 보며 최민아가 싱긋 웃었다.

“그럼요. 커피 싸 들고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요. 나 감이 좀 왔어요.”

“나도.”

“나도 콜.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한번 해본 광고주가 편하긴 하구만.”

그렇게 각자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아이디어를 짜냈던 뉴욕팀이 다시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차현우가 커피를 돌리며 도혁에게 물었다.

“난 명 대표가 사무실 따로 얻을지 몰랐어. 그냥 아파트에 다 같이 틀어박혀서 머리 굴릴 줄 알았지.”

“저게 무슨 돈지랄인가 하셨겠네요.”

“어떻게 알았어.”

피식대는 차현우를 보며 강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인간은 사무실 없으면 안 돼. 정말 폐인 된다고.”

“인정. 강 국장 생각하면 사무실이 따로 있긴 해야 돼.”

“강 국장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도 그래요. 일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산만하더라구요.”

차현우의 말을 받아 도혁이 부연했다.

“그리고 뉴욕지사는 계속 키워갈 건데 아파트에서 할 수는 없죠.”

“올~ 꿈을 크게 키우시겠다.”

“그럼요. 자, 돈지랄했으니까 아깝지 않게 아이디어 좀 짜봅시다. 세 분 뭔가 나왔다고 했으니까 말씀을 들어보기로 하죠.”

“나부터 할까?”

차현우가 노트북을 당겨와 기획안을 열었다.

“나의 컨셉은 꼭대기야.”

“오! 꼭대기. 탑온 더 월드의 개념인가?”

강태오가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차현우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 탑온 더 월드 디자이너들이 있어서 내놓기가 참 민망하구만. 손으로 슥슥 그렸는데 말이지.”

“에이, 프로끼리 왜 이래? 말만 해봐. 바로 만들어줄 테니까.”

“이렇게 표현해 봤어.”

러프한 그림에는 에베레스트로 보이는 산꼭대기에 TT자동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걸 하늘에서 내려다본 구도로 그린 것이다.

“알아보겠냐?”

“당연하지. 산허리 쪽부터 쭉 구름 두르고, 어? 이거 괜찮은데?”

“그러게요. 그런데 누가 내려다보는지 알 수 있으면 더 좋겠어요. 구도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까요.”

“흠, 그래?”

의견이 모이며 아이디어가 차츰 확장되고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자면 올림푸스의 신들이 내려다본다거나…….”

“비행기 한쪽 날개만 표현하는 건 어때? 왜 여행할 때 가장 위에 있는 건물들이 비행기에서 보이잖아. 난 그게 그렇게 신기하더라고.”

“오! 그거 좋은데?”

“헬기 조종사가 내려다보는 모습도 괜찮아 보이고 말이지.”

차현우가 빠르게 메모하며 의견을 갈무리했다.

“좋아, 이쯤 해서 내 건 정리하기로 하고, 강 국장은?”

“보~~~자, 차 국장 아이디어가 더 좋아 보이는~데.”

말에 리듬을 넣으며 너스레를 떨던 강태오가 시안을 열어 보였다. 순간 모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저거 설마 이끼예요?”

“자동차 전체에 이끼가 낀 건가? 이건 나무도 자랐네. 신선한데?”

강태오가 손가락으로 화면 속의 나무를 툭툭 두드렸다.

“요즘 TT가 친환경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더라고. 역시 공모전은 공익 아니겠어?”

“하긴. 그렇죠. 공익성이 있으면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환경 컨셉을 잡아봤지. 자동차에 이끼가 생길 만큼 자연 친화적이다. 나무도 키울 수 있다.”

“과장의 미학이네요. 아주 좋습니다.”

도혁의 말에 모두 끄덕이며 수긍했다. 한눈에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광고였다.

“다만 TT에서 친환경 사업을 주력으로 세울지에 대해서는 광고주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맞아. 나도 이 광고 만들면서 그게 우려되긴 했어. 신사업보단 주력을 밀고 싶을 테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어느 회사에서건 사 갈 광고긴 합니다. 자동차 산업에서 친환경은 시대가 지날수록 강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린 사업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기도 해. 나, 자연주의자라고.”

“익히 알고 있죠.”

도무진과 함께 DW 애드 코리아에서 가장 자연인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최민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웃긴 게 강 국장님이나 무진이나 매일 자연인 외치지만 막상 인터넷 안 되고 게임 못 하면 미치는 사람들 아니에요?”

“하, 그런가?”

“현대적 의미의 집시 정도로 포장해 드리죠.”

디지털 노마드(디지털 장비를 가지고 떠돌며 창의적 생산을 하는 유목민)라는 말이 아직 널리 사용되기 전이었지만 DW애드에는 이미 여럿 실존하고 있었다.

도혁은 디지털 노마드 강태오의 시안에 관해 메모하며 계속 회의를 진행했다.

“강 국장님 아이디어는 일단 킵해놓고, 다음은 최 팀장이 얘기해 볼까?”

차례가 돌아온 최민아가 쭈뼛대며 제 시안을 슬쩍 내밀었다.

“저도 만들어 오긴 했는데 국장님들과 진검승부는 역시 부담스러워요. 하아.”

“어젠 자신감이 넘치더니. 빨리 내놔봐.”

강태오가 고개를 기울이며 최민아의 노트북을 훔쳐보는 척했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시안을 오픈했다.

자동차를 탄 동물의 합성사진이었다.

타이어는 코뿔소의 다리. 그러니까 코뿔소가 자동차를 짊어지고 오프로드의 험준한 강을 건너는 모습이었다.

“TT는 단단하고 안전성이 높기로 유명해요. 특히 우리가 진행했던 SUV 라인이 현재 주력 상품이구요.”

“오호! 그래서 몸집이 튼튼한 코뿔소조차 오프로드를 다닐 땐 우리 차를 이용한다?”

“맞아요.”

“기발한데? 난 겁나 마음에 들어.”

강태오가 최민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한눈에 팍, 컨셉이 꽂히잖아. 안정성을 강조한 데다 동물이 차에 탄 모습이 낯익으면서도 신선해서 눈에 띄기도 하고.”

“괜찮은가요? 카피는 못 썼어요.”

“카피야 명 대표가 알아서 얹겠지.”

또 슬렁슬렁 도혁을 지목하며 강태오가 물었다.

“우리 대표님도 뭐 하나 가져오셨을 텐데. 얼른 보여줘 봐. 아까보다 기대하고 있다고.”

“그러게요. 대표님 이번엔 또 어떤 그림을 만들어 오셨을까.”

도혁이 매직으로 머리를 긁으며 일어섰다.

“나도 차 국장님처럼 그리는 재주는 없어서 기획만 가져왔어.”

“그건 당연하고요. 빨리빨리 풀어주세요!”

“이걸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사실 내 머릿속에만 있는데 말이지.”

도혁이 펜의 뚜껑을 열지 않은 채 비어 있는 하얀 벽면을 툭툭 두드렸다.

“여기를 찢어볼까 합니다.”

“네??”

“벽을 찢으려고요. 뜯는다고 해야 하나, 먹는다고 해야 하나.”

“벽을? 자동차가 벽을 뜯는다고? 아니, 먹는다고요?”

도혁을 제외한 이들의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동시에 회의실의 빈 벽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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