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11화
LVNN 뉴욕지사의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실.
입술을 꾹 다문 채 팔짱을 낀 스텔라 필로가 보고를 듣고 있었다. 특유의 차가운 표정과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가 매섭게 빛났다.
그 앞에서 팀장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벌벌 떨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서. 결과는?”
“그, 그게 그러니까 저희 1팀에서 진행했던 캠페인 매출이 저조…….”
“저조, 저조라.”
은색의 단발머리가 훅, 남자의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과 형형한 눈빛이 코앞으로 끼쳐왔다.
“으윽!”
“이게 웬 비명이야. 잡아먹힐까 봐?”
“아, 아닙니다!”
“저조라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봐. 저조라니, 재밌네.”
“그게 저희가 인수를, 하, 죄송합니다.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브랜드이기도 하고 이번에 수석 디자이너가 경쟁사로 스카웃되는 바람에…….”
“그 자식은 짤린 거잖아. 핑계 한번 애처롭네. 응?”
스텔라가 팔을 슬쩍 들어 올리자 남자가 움찔하며 양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어머, 남들이 보면 내가 부하 직원을 때리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
“아, 아닙니다.”
“머리카락에 뭐가 묻어서 떼준 건데. 이렇게 세심하게 직원 머리카락까지 매만져 주는 상사가 흔한 줄 아나?”
스텔라가 남자의 머리카락을 한번 불더니 한 번 더 훅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더 크게 놀란 남자가 겨우 올렸던 손을 내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겁이 많아서 조건반사적으로…….”
“조건반사적으로 매출을 올렸어야지, 가드만 올리나?”
“아닙니다!”
“왜 이렇게 떠는 거야? 이러면 내가 되레 미안하잖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똑바로. 짤린 자식이 넘어간 브랜드보다는 잘나가야 할 거 아니야. 그 자식 승승장구하면 우리 꼴이 우습잖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인수한 브랜드 전성기 때 매출 만들 때까지 내 방에 들어오지 마. 이상.”
남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피에르가 그런 팀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텔라 이 친구, 또 사람 하나 잡았구만.”
“오셨습니까? 팀장이 되도록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기가 힘드네요. 카리스마에 눌리면 진짜로 오금이 저려옵니다. 하아.”
“스텔라가 작정하면 모골이 송연하지.”
듣고 있던 비서가 팔에 돋은 소름을 훑었다.
“두 분은 디렉터님 화난 거 가끔 보시잖아요. 저는 어떻겠어요.”
“그러게. 고생이 많구만. 후우, 나 왔다고 전해줘.”
“네. 놀랍게도 오늘 컨디션은 좋으세요. 물론 다니엘 팀장님 오기 전에 그랬던 거지만.”
비서의 안내로 들어간 피에르가 스텔라의 안색을 살폈다. 미간을 좁힌 채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괜찮아?”
“진통제 먹었어. 이놈의 두통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배신자 디자이너 놈 잘나가서 열 받았구만.”
“브레드. 이 뱀 같은 인간. 뒤통수치고 나간 자식이 승승장구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없던 두통도 생기겠어.”
“디자인도 디자인인데 그쪽은 마케팅의 힘이 크지 않아?”
“그렇지? 디자이너로서 보기엔 이해가 안 갈 정도의 상승세야.”
“현대사회에서 오뜨 꾸뛰르(고급 맞춤복 박람회)가 무슨 의미가 있나. 세상이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박람회)인데.”
“하긴. 마케팅이 디자인만큼이나 중요한 시기가 되어버렸으니.”
씁쓸한 미소를 띠며 무심코 신문 기사로 시선을 돌린 스텔라의 눈이 커졌다.
“이 남자,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 사람 아니야? 한국에서 광고한다는?”
“어! 맞아. 뉴욕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기사가 나오는 건가?”
“피에르가 보기에 어때?”
“도혁? 젊고 탁월하지. 트렌디하면서도 파격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저 나이에 경륜이 느껴져.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오십이 다 된 사람 같아. 동양인이라 그런가?”
“트렌드와 경륜의 조화라. 멋있네.”
“아무튼 영 앤 스마트, 리치한지는 알 도리가 없고.”
“일단 좀 더 지켜봐야겠어. 뉴욕에서 어떤 행보를 이어갈런지.”
스텔라의 시선이 인터뷰 기사에 실린 도혁의 사진에 머물렀다.
* * *
“TT자동차 한국 캠페인은 해외 광고 느낌이 나지 않았어?”
강태오가 TT 자동차 캠페인을 훑어보며 운을 떼었다.
“우리가 진행한 광고 중에선 글로벌한 편이죠. 일단 해외에 본사가 있고 한국지사 광고주 성향도 젊은 데다 트렌디해서 사실 국제광고전에 나가봄 직하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생각했어요.”
“맞아. 명 대표 말처럼 TT가 제법 괜찮았단 말이지. 국내 광고를 조금 바레이션해 보면 어떨까?”
강태오의 말에 차현우가 미간을 좁혔다.
“국내 광고는 이미 방영한 지 제법 되었고 TV CF라서 옥외와는 맞지 않아. 옥외는 서사를 쌓을 수가 없어. 한눈에 팍! 꽂혀야 한다고.”
“한눈에 팍! 이라. 흠…….”
고민하던 강태오가 TT의 장난감 자동차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붙잡았다.
“TT야. 들었지? 팍 꽂혀야 한단다. 흠. 아이디어 신이 강림을 해야 할 텐데.”
“자동차 옥외광고는 거의 브랜드 위주이지 않아요? 국내에서는 사실 로고 박혀 있는 것밖에 못 봤어요. 미국 와서도 자동차 옥외광고는 눈에 띄는 게 없었구요.”
“그 어려운 걸 우리가 해내자는 거지. 그러려고 뉴욕까지 온 거잖아?”
도혁이 대답하자마자 최민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깊어서 광고쟁이가 됐을까. 이게 무한 반복이에요.”
“무한 반복?”
“봐요. 게임 광고 만들 때 머리가 쪼개지도록 고민하다가 딱 완성하면 뭔가 해낸 것 같고 뿌듯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샴페인을 따서 다 마시기도 전에 다음 미션이 주어지죠.”
“우리 최 팀장 호강이 넘치는구나.”
차현우가 최민아에게 다가와 현실을 알려주었다.
“해마다 광고 회사가 얼마나 많이 생기고 사라지는 줄 알아?”
“그건 그렇죠. 흠.”
“그리고 잘나가는 회사도 광고주 하나 챙기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데. 우린 회사 문 열고 난 뒤로 한 번도 위기가 없었어. 일복이 터진 게 얼마나 다행인데.”
“하긴. TT 같은 글로벌 기업의 광고를 뉴욕에서 할 수 있는 건 큰 복이죠. 내가 잘못했네.”
“그런 뜻은 아니고. 푸념하는 게 당연하긴 해. 나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긴 하니까.”
최민아를 타박하면서도 차현우 역시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TT 자동차에 대한 자사 분석, 경쟁사 분석 모두 머릿속에 있으니까 기본 기획 방향은 아실 겁니다. 정말 아 이 디 어만 내면 돼요.”
아이디어 네 글자에 방점을 꾹꾹 찍어 강조하며 도혁이 차현우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이번엔 각자 고민하는 시간을 조금 가져볼까요. 일단 이틀 정도 생각을 정리해서 다시 모이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새 아이템도 아니니까요.”
“오케이! 그럽시다.”
그렇게 각자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흩어졌다.
그리고 이틀간 펼쳐진 광경에 도혁은 헛웃음이 터져 버렸다.
회사가 커진 이후엔 이미 국장과 팀장이 되어버린 미국팀 직원들에게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하여 이렇게 필사적으로 아이디어를 짜내는지는 몰랐다.
차현우는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 나오지 않고 밥도 먹지 않은 채 두문불출했다. 햄버거라도 넣어주려 그의 방에 들어간 도혁은 경악하고 말았다.
사방의 벽면과 데스크톱 컴퓨터에는 색색의 포스트잇과 손 메모, 그리고 TT자동차 관련 자료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차현우가 앉은 공간을 제외하곤 온통 종이로 뒤덮여 징그러울 정도였다.
“설마 저게 전부 포스트잇이에요? 으.”
“아직 덜 붙였어. 난 왜 기억이 조각조각 나는 걸까.”
“메모를 쪼개 붙여서 그런 건 아닐까요. 아무튼 뭐라도 좀 먹고 해요.”
“현대인은 이틀 먹지 않는다고 죽지 않아. 햄버거 따위 필요 없어.”
“일단 먹고 해요. 탄수화물이 있어야 머리도 돌아가지.”
“그, 그럴까?”
차현우가 도혁이 내민 햄버거를 먹으며 다른 손으로 포스트잇을 떼어 다른 곳에 붙였다. 아이디어의 배열을 달리한 것이다.
도혁이 흥미로운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엇! 포스트잇에 쓰는 게 이런 장점이 있구나.”
“그렇지. 툭 떼서 다른 곳에 이으면 또 새롭게 보이거든. 보자, 안정성이란 단어는 어디다 붙여볼까, 여름 옆에?”
이거 진짜 괜찮은데? 광고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다. 유에서 유를 조합하는 일이지.
하지만 그 조합이 골치가 아프단 말이지. 새롭되 낯설지 않아야 하고 6살짜리가 들어도 알아먹을 수 있어야 하며, 한눈에 팍 꽂혀야 한다. 옥외는 특히 그렇다.
그런 점에서 툭툭 떼어 새로운 곳에 여기저기 조합해 볼 수 있는 포스트잇 아이디어는 신선한 스토리텔링의 좋은 시작점이 될 것이다.
마치 차현우의 거대한 아이디어 노트를 들여다본 느낌이 들었다.
문득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져서 얼른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차현우가 뭘 이런 걸 찍냐며 민망해하면서도 브이를 그려주었다.
얼른 포스트잇 세상을 찍은 도혁이 다음 아이디어 창고로 이동했다. 최민아의 방이었다.
“어머, 집에서 웬 카메라래요?”
“그러게. 이 방은 평소 최 팀장 사무실이랑 똑같은데? 집에서도 이렇게 입고 있어?”
“그렇진 않은데 저는 회사 온 것처럼 앉아 있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잘 안 떠올라요. 일하는 분위기를 내야 한다고나 할까요.”
최민아의 방은 단정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디자이너들의 책상이 가장 지저분하게 마련인데 예전부터 깔끔함의 비결이 궁금하긴 했다.
“가만 보면 진짜 부지런해. 깨끗하고. 우리 창업 초창기에 내기한 적도 있었어.”
“무슨 내기요?”
“최 팀장이 퇴근했는지 아닌지. 책상 위가 늘 깔끔하잖아. 화장실 갈 때도 치우고 가고.”
“아, 정반대로 알고 계시네요. 부지런한 게 아니라 게을러서 그런 거예요. 아무것도 없어야 치울 것도 없죠. 애초에 물건 자체를 두지 않아요.”
“오호, 그럼 이렇게 텅 빈 상태에서 아이디어가 잘 나오나?”
“맞아요.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나야말로 이해가 안 돼. 책상 위가 엉망진창이면 머릿속도 어지럽지 않나요?”
도혁은 메모로 가득해 정신이 없던 차현우 방을 떠올리며 최민아의 모습을 찍었다. 그녀 역시 웃으며 손가락을 모아 하트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진짜 혼돈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태오 방이야 익히 정신없는 걸 알고 있어서 각오하고 열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부적까지 붙은 방 안에 카메라를 들이밀어 고뇌하는 강태오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한국으로 사진을 전송했다.
‘본사 사람들은 어쩌고 있나. 사장 없다고 신났으려나.’
도혁은 키보드 위에 손을 얹어 타닥타닥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짧은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