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05화
오래 봐야 알아본다. 자세히 봐야 김철준이다.
정말 그랬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단기간에 변할 수가 있나?
놀라 눈을 끔뻑거리는 도혁을 보고 김철준이 껄껄 웃어젖혔다. 그러더니 덥석 도혁의 손을 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명도혁 대표! 도혁이! 자네 진짜 미국 왔구만. 이렇게 반가울 데가!”
“대표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이렇게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네. 이쪽으로 앉지그래.”
“네. 여기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이랑 양념 세트입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크으. 역시 센스가 넘치는구만. 해외에 거주하면 한국 라면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음식인지 깨닫게 되지. 이쪽의 두 분은 초면인데 누구신지?”
“저희 국장님들이세요. 인사 나누시죠.”
서로 악수를 나누며 명함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고 최민아가 토끼 눈을 끔뻑거렸다.
그걸 본 김철준이 최민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 민아 씨는 태강애드 있을 때보다 엄청나게 아름다워지셨네. 못 알아볼 뻔했어.”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못 알아볼 뻔했어요. 김 대표님 어떻게 된 거예요? 뉴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왜. 회사가 너무 초라해서 그러시나? 태강애드 본사에 비하면 너무 구멍가게지?”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대표님 외모가 너무 달라지셔서요. 제가 알던 그분이 맞나 싶어요!”
최민아의 말에 김철준이 핸드폰을 뒤져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오래전 신문 기사를 찍어둔 사진이었다.
“여길 봐. 어때, 이 남자 잘생기지 않았어?”
“어머! 설마 이 젊은 남자분이 대표님이에요? 잠시만. 이렇게 보니까 지금하고 비슷한 모습이네요! 수염도 길구요.”
최민아의 말에 모두 사진 속 남자에게 주목했다.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나팔바지를 입은 채 기타를 둘러멘 젊은 시절의 김철준이었다.
“젊었을 때는 나도 광고 바닥에서 소문난 괴짜였어. 수염 기르고 집에도 안 가고 말이지. 대일기획 선배들이 아주 골치 아파했었어. 거, 진태가 나한테 명함도 못 내밀었다고.”
“이진태 교수님이요?”
“그럼. 그 친구가 광고계의 괴짜네 어떻네, 할 때마다 코웃음을 친다니까.”
“이진태 교수님도 만만치 않긴 하세요. 그런데 사진 보니까 대표님이 한 수 위십니다.”
광고계의 기인으로 유명한 이진태를 이겨먹을 정도의, 속된 말로 또라이였다니.
냉철한 사업가였던 태강애드 김철준의 모습과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김철준이 도혁을 보며 부연했다.
“진태는 계속 실무를 하다 교수가 됐고 난 아주 일찍 독립하지 않았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회사를 끌어가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이 소중한 수염도 자르고 말이야.”
“아, 그러셨군요.”
흔한 크리에이터의 사회화 과정이었구나. 그제야 조금 김철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전적인 성향의 괴짜 광고인이야말로 조직에 순응하기보단 회사를 차려 나갈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막상 사장이 되어 관리자의 입장이 되면 흔히 말하는 똘기는 사라지고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하게 되는 법이다. 특히 기업이 커질수록 더욱 그렇다.
김철준 대표님도 그런 케이스였구만.
도혁은 그의 입장이 너무 이해되어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명 대표는 공감하는구만. 사장이 회사에서 제일 유능한 AE가 되어야 하잖아. 회사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가 있나. 야생은 내려놓고 인간이 되었지.”
“그렇죠. 대표로서의 책임감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이지, 뉴욕에 오니까 좀 더 자유로워. 한국하고는 풍토도 다르고 이제 시작하는 입장이니까 이렇게 수염도 기를 수 있고 말이야.”
“그렇군요. 정말 보기 좋습니다. 훨씬 기운차 보이세요.”
살이 빠지고 수염조차 희끗했지만 김철준의 얼굴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그렇다고 꽃길은 아니야. 이국땅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뉴욕은 기회의 땅이야. 우리 젊은 친구들은 나보다 더 일찍 시작했으니 더 날아다니겠지. 각오들은 되어 있겠지?”
“네! 그럼요.”
김철준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활로를 뚫고 있었다. 그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간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주었다.
“어머, 벌써 우리가 알 만한 브랜드도 있네요?”
“이제 제법 괜찮은 수주도 따고 있어. 지금은 모두 출장 중이지만 AE들이 활약을 잘해주고 있다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물론 이렇게 큰 회사들의 메인 대행사가 된 건 아니야. 규모를 보면 알겠지만 아직은 메인 대행사의 협력사 정도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어.”
“원래 그렇게 키워 나가는 거잖습니까. 프로모션 따고, 홍보물, 옥외 순으로 활로를 뚫어가는 거죠.”
“맞아. 키워서 잡아먹는 재미지. 하하.”
한국에서도 맨주먹으로 시작해 남부럽지 않은 회사를 키워낸 노하우가 있었다. 무려 대리 때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독립했던 김철준이 아닌가.
도혁은 패기 넘치는 노익장에게 조금 더 구체적인 노하우를 물었다.
“지금이야 영업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지만 시작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영업의 물꼬를 튼 건 바로 이 지역신문이야. 여기 한 줄 광고로 시작했어. 어우,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 처음엔 고전을 면치 못했지.”
“그래도 빨리 자리 잡으셨네요.”
“우린 하나 물면 안 놓으니까. 처음 했던 지역의 작은 샌드위치 가게가 대박을 터뜨렸어. 그러면서 소문이 나고 업계에 알려지고 그렇게 키워 나가고 있는 거야.”
“기존 광고주는 가져오신 거죠? 예를 들면 태강에서 진행하는 한국 광고주의 해외 지사 같은 곳 말입니다.”
“그 부분은 생각보다 별도 법인이 많고 대행사가 별도로 있어서 쉽지는 않아.”
김철준이 한숨을 내쉬며 냉수를 들이켰다.
“본사랑 규모 차이가 있다 보니 못 미더워하는 부분도 있지. 그래도 PT는 참여할 수 있으니까 그것만 해도 어딘가. 기회가 있는 거니까.”
“맞습니다. 김철준 대표님이시니 곧 현지법인도 원활하게 수주하실 겁니다. 참, 제작은 어떻게 진행하십니까?”
김철준이 픽 한번 웃더니 도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 짧은 시간에 빠르게도 정보를 얻어가는구만. 아주 명 대표다워.”
“아, 염탐하러 온 건 아닌데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에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기특해서 그러지. 참, 뭘 물어봤더라.”
“제작 여쭈었습니다.”
“그렇지. 제작. 사실 제작이 제일 문제야. 모든 광고쟁이들이 공감할걸, 아마.”
김철준이 최민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최 디자이너 여기에 떨궈놓고 갈 생각 없나?”
“그럴까요? 하하.”
“어머! 이 대표님들 좀 봐. 물건처럼 떨궈놓다니요!”
최민아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황당해했다.
“우리 최민아 팀장이 연봉에 아주 쎄서요. 거기다 한 성질 합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그럼. 실력 있는 디자이너만 영입할 수 있다면 내 수염이라도 팔아서 연봉을 마련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수염 필요 없거든요? 두 분 정말 이러실 거예요?”
씩씩대는 최민아를 보고 김철준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명 대표가 내놓을 리가 없지. 뉴욕까지 데려온 걸 보면 최 팀장에 대한 애착이 엄청날 텐데. 나도 하나 데려왔어야 했는데.”
“제작 국장님 같이 오셨잖아요. LA 출장 가셨다면서요.”
“그 친구는 실무 놓은 지 오래되어서. 그래도 요즘은 온라인이 잘 구축되어서 본사에서도 도움을 받고 있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네요.”
“좀 더 지켜보고 현지 디자이너를 뽑아야지. 최 팀장처럼 유능한 친구 뽑히도록 기도해야겠구만.”
일행을 번갈아 보며 끄덕이는 김철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갔다.
“아무튼 뉴욕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네. 웰컴투 뉴욕! 이 죽일 놈의 맨해튼 아주 재밌어. 매일이 짜릿해.”
“네. 활력이 넘치십니다. 저희보다 더 열정적이세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카피도 있지 않나. 숫자 정도는 이겨야 뉴욕 생활을 버틸 수 있지 않겠어? 내 DW애드도 진심으로 응원할 테니 같이 힘내보자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선배의 따뜻한 격려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 최민아가 빵 웃음이 터졌다.
“생각할수록 웃겨요. 태강애드에서 김철준 대표님 생각하면 지금 저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저 정도 야생을 사시던 크리에이터였을 줄이야.”
“딱 봐도 나하고 비슷한 과로 보이시더만, 태강에서는 어땠는데 그래?”
강태오의 말에 도혁과 최민아가 마주 보고 웃었다.
“엄숙 근엄 진지하셨죠. 냉철한 사업가의 모습이었다고나 할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가까이 가기 꺼려질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었어요.”
“맞아요. 세상에 강태오 국장님이 그렇게 살아갔던 거잖아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러게. 뉴욕으로 잘 오셨네. 짧은 기간에 자리도 제법 잡으시고. 더불어 한국 본사도 잘나가는 것 같더라고.”
“우리도 그렇게 돼야지. 아니, 더 잘돼야지.”
차현우가 눈빛을 빛내며 의욕을 불태웠다.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뉴욕 시내의 옥외광고와 간판, 배너를 계속 훑어 내리며 눈 속에 담고 있었다.
“우린 미리 한국 광고주들 해외 지사에 발 빠르게 영업을 해두었으니 태강보다는 나을 겁니다. 광고제 일정은 제가 모두 정리해 뒀구요. 차근차근 밟아나갑니다. 그리고 일단은, 밥부터 먹을까요?”
“그럴까? 김철준 대표님도 식사 같이하셨으면 좋았을걸.”
“미팅이 산더미같이 있던데요. 계속 뉴욕에 있을 거니까 따로 약속을 잡아보도록 할게요.”
드디어 뉴욕에서 먹는 제대로 된 첫 식사였다.
도혁은 미리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저기, 잠시만 대표님. 우리 이렇게 먹으면 파산해요.”
“그래. 여기는 좀 과한 듯한데. 딱 봐도 비싸 보여.”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 정도는 먹어야죠. 든든해야 일도 하는 법이니까. 들어갑시다.”
웃으며 문을 연 곳은 맨해튼에서도 한가운데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내일부터는 강행군일 겁니다. 여기까지 와서 여행도 못 하고 일만 해야 하니까 미안해서 사는 거예요. 와인도 하나 고르시죠.”
“일단 먹고 보자. 이야, 메뉴 보소. 어이쿠 가격 보소.”
강태오가 너스레를 떨며 메뉴판을 들었다.
막 주문을 마치고 와인을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낯익은 얼굴이 도혁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잠깐만. 혹시 미스터 명? 명도혁 대표님?”
“반갑습니다. 이런 인연이 다 있군요.”
“그러게나 말이야. 뉴욕에서 다시 자네를 만나다니. 이런!”
도혁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온 남자는 바로 칸에서 만났던 피에르였다.
“한국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가. 아무튼 정말 반갑구만.”
“네. 그러네요. 칸에서 인터뷰 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곁으로 한 여자가 다가왔다.
풍성한 은발 머리에 도도한 인상을 한 여자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에르. 이분은 누구시죠?”
순간 최민아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손을 떨었다.
“대표님, 저분…….”
도대체 누구길래 호들갑인가. 인사를 나누던 도혁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