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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203화 (203/252)

광고 천재 명도혁 203화

아, 차인 건가.

전서윤이 도혁에게 호감을 표시한 건 꽤 오래되었다.

광고 일을 핑계로, 세계적 배우가 될 거라는 미래는 알기에 애써 모른 척했을 뿐이지 분명히 좋아한다고 확신했었다.

그게 아니었던가. 센스가 없는 편은 아닌데 헛짚었나.

도혁이 멋쩍게 웃으며 앞머리를 툭 털었다. 그런 그를 전서윤이 귀여운 듯 고개까지 기울이며 바라본다.

아니, 찰 거면서 뭘 또 저렇게 다정하게 웃어주고 저러냐.

도혁이 눈을 가늘게 뜨곤 그녀를 원망했다.

“서윤 씨 보기보다 잔인한데요?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차면 충격이 몇 배로 오지 않겠습니까?”

“어머, 제가 언제 도혁 씨를 찼어요.”

“방금 거절했잖아요. 기다리기 싫다면서요.”

“기다리기 싫다고 했지, 명도혁이 싫다고 했어요?”

전서윤의 말에 도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서윤이 또 새삼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도혁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내가 왜 기다려요. 왜 나 혼자 이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려야 하나요? 나도 앞으로 나가야죠. 저 이번에 프랑스로 진출할까 해요.”

“아, 혹시 프랑스와 감독님과 콜라보 진행하시는…….”

“네? 도혁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세상에.”

놀라는 전서윤보다 도혁이 더 당황했다. 차였다는 충격에 알고 있던 미래의 정보까지 흘려 버린 것이다.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빠르게 말을 주워 담았다.

“뭐 프랑스 가신다고 하니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촉입니다. 그냥. 요즘 프랑스와 감독이 제일 잘나가잖아요. 국제 영화제에서 상도 휩쓸고 있구요.”

“와, 나 소름 돋았잖아요. 아무도 모르는데. 정말 우리 대표님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셨나 해서요. 맞아요. 프랑스와 감독님과 일하게 될 것 같아요.”

전서윤이 팔에 돋은 소름을 훑으며 부연했다.

“가끔 도혁 씨 이럴 때 무서워요. 미래를 보는지 속을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 이렇게 느낀 적이 있었는데.”

“트렌드를 선도하고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일이 직업이니까요. 직업병이라고 해두죠.”

질병이라고 겨우 무마했다. 전서윤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미소 지었다.

“대표님이 미국에서 달리시는 동안 저도 유럽에서 뛰어보려고 해요. 사실 프랑스와 감독님이 새 작품 제안하실 때 조금 망설였거든요.”

“……왜요? 혹시 저 때문에요?”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한동안 못 보는데 누가 도혁 씨 주워 가면 어떡해요.”

“누가 주워 가겠어요. 서윤 씨 정도 천사는 되어야 구제해 주는 거죠.”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씀하시구요. 아무튼 도혁 씨도 마음에 걸렸지만 자신이 없기도 했어요. 프랑스에서는 신인이나 마찬가진데 또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나 싶어서. 주연이라고 해도 인지도도 바닥이고 동양인이잖아요.”

“부담스럽고 힘든 길인 건 맞습니다. 그래도 서윤 씨는 잘할 겁니다. 분명히요.”

전서윤이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 자신에 대한 확신도 있었지만 도혁 씨가 미국 간다는 말 듣고 결심했어요. 새로운 도전을 앞에 두고 망설이지 않고 떠난다는 게 쉽지 않은데. 느낀 점이 많았거든요.”

“인생 뭐 있습니까.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좋아하는 사람하고 살고 그럼 되는 거지.”

“마지막 말은 조금 설레는데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식히는 전서윤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시작해서 미안해요. 진작 고백할걸. 미련한 놈이라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내 마음을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네요. 정말로.”

“그러니까. 마음 받아줘서 고마워요.”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저도 이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갈 거예요. 프랑스 까짓 것, 도혁 씨도 칸 광고제 수상했었잖아요.”

“역시 멋집니다. 서윤 씨 정말 멋있는 거 알아요?”

“알죠. 그러니까 명도혁이 이 시간에 달려왔지.”

“그 자신감도 멋지구요.”

전서윤이 한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해요. 멀리 있지만 응원하기로. 서로 마음 잊지 않기로.”

“그래요. 아쉽지만 악수나 하죠. 당장 미국에 싸 들고 가고 싶지만 참겠습니다. 곧 돌아올 거니까.”

“아 정말, 싸 들고 간데.”

풉, 웃음이 터진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곤 와락 당겨 품속에 가둬 버렸다.

“많이 보고 싶을 겁니다.”

“저도 그럴 거 같아요. 자주 연락해요.”

“진짜 금방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서윤 씨도 무럭무럭 자라서 빨리 와.”

“그래요. 그럴게.”

물을 준 꽃처럼 그녀가 다시 웃었다.

* * *

설레던 어젯밤과 달리 공항에서의 환송은 시끌벅적했다.

[DW애드 코리아 미국 지사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우주최강 지구최강 Do Win!]

공항의 한가운데 펼쳐진 대형 현수막. 이어서 박자까지 맞추어 이름을 한 글자씩 또박또박 호명했다.

“명! 도! 혁! 강! 태! 오! 차! 현! 우!~~~ 최! 민! 아! 파이팅!”

실명으로 뭐 하는 짓이냐.

미국팀은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플랫폼을 가로질렀다.

연예인이라도 나타났냐며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몰려들었다. 직원들의 정성은 갸륵하다만 진심 민망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 빨리 보내려고 꾸민 계략 아니냐?”

“에이, 대표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십니까! 저기 신입들 우는 거 안 보이십니까?”

“어흐흙 대표님. 국장니이임.”

오버하며 울먹이는 직원들과 달리 이진우는 말이 없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한민국과 회사는 제가 잘 지키겠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래. 네가 있어서 제작팀 걱정 안 하고 간다. 진심이야.”

빈말이 아니라 든든했다. 항상 돌봐줘야 할 대상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오늘따라 우직한 그의 말투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탁기준과 한수철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둘이 쭈뼛거리더니 도혁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우리 직원들 정성이다. 가서 꼭 승리하고 돌아와.”

“같이 못 가서 정말 미안. 우리 몫까지 잘하고 올 거라고 확신한다. 네 분 파이팅입니다!”

“파이팅! 파이팅! 명도혁! 강태오!”

“으! 얼른 출발하자. 다녀올게!”

황도준과 도무진의 텐션이 더 오르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차현우가 몸서리를 쳤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멀쩡하다가도 하나 꽂히면 막 덤벼들어. 칸 광고제 때도 그렇고 상 받을 때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제 송별회 술이 덜 깼나 보지. 술김에 똘기가 승천한 게 아닐까?”

“하긴 인수인계에 송별회까지 정신없긴 했어.”

“그래도 저는 다행인 거 같아요.”

최민아가 자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촌스럽게 공항에서 울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요.”

“울긴 왜 울어. 입대하냐?”

“입대라. 뭐 비슷하지 않아요? 군대는 어디로 가는지 알기라도 하지. 우리 미국 땅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거잖아요.”

세 남자의 눈동자가 최민아에게 동시에 꽂혔다.

군대. 그제야 도전의 심각성을 제대로 실감한 것이다.

최민아가 허공에 손을 휘이 저으며 질색을 했다.

“부담스럽게 동시에 쳐다보고 그래요. 입대와 다름없는 비장한 각오로 임한 거 아니었어요?”

“끔찍하게 왜 이래, 민아야. 우리한테 왜 이러세요.”

“지금까지 그런 각오가 아니었다면 지금부터 각오를 다지세요. 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스무 살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라고요. 스무 살이면 막 훈련소 들어갈 때 아닌가?”

“으아!”

“으아악!”

역시 회귀는 제대 전으론 하는 게 아니다.

도혁이 급히 말을 주워 담으며 수습했다.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스물두 살로 합시다. 제대 직후. 우리가 광고 바닥 딱 들어갔을 때요.”

“오케이! 그래야지. 당연하지!”

“명 대표. 재입영만 아니면 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든지.”

“클리오고 칸이고 다 덤비라고 그래.”

최민아가 강태오를 보곤 의아해했다.

“참, 국장님도 군대 갔었어요? 아, 어머니 때문인가?”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 안 갈 수도 있는데 자원입대했지. 스무 살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불타올랐다고나 할까.”

“와, 애국자이시네요. 대박.”

“왜 그랬을까…….”

애국자 강태오의 눈빛이 너무 애잔해 아무도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아무튼 명도혁의 수동 회귀를 스물두 살로 급히 수정하곤 계획안을 펼쳤다.

“이번 회귀, 아니, 미국 진출 기반을 닦는 기간은 일 년에서 일 년 반 잡고 있습니다. 미국과 전 세계의 광고 공모전과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맞춤형으로 접근합니다.”

“벌써 기획 시작하는 거? 하긴 시간이 없긴 하네. 일 년 안에 기반을 닦는다니 가능하겠어?”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을 해보세요. 공항에서 탁 국장님 아련했던 눈빛 기억 안 나십니까?”

공항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흔들던 탁기준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넉살도 장난도 없이 묵묵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남았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아.”

“맞아. 대공감.”

차현우의 말에 강태오가 세차게 고개를 주억였다.

“너무 부담스럽잖아. 사실 이젠 탁 국장이 명 대표 대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지. 거기다 국장도 한 명만 남았잖아.”

“그래도 탁 국장은 잘할 거다. 관리에 제일 적임자이긴 해.”

“맞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미국행의 가장 적임자이죠.”

도혁이 딱 잘라 말했다.

전생을 통해 이미 그의 저력을 알고 있는 차현우. 국제적 크리에이티브 감각을 선보이며 한국 땅이 얼마나 좁은지 매일 실감하게 만드는 강태오.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태오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안정적인 디자이너 최민아.

이 정도 최정예 멤버라면 미국 시장이든 공모전이든 각개격파가 가능할 거다.

“뭔가 성과를 만들어가야 면이 설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으시구요.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아이디어가 딱딱할 수 있어요. 일단은 시장 동향부터 파악하고 천천히 접근해 보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긴 비행 일정이었다.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곤 안대로 눈을 가린 강태오가 먼저 눈을 감았다.

남은 직원들도 하나둘 눈을 감기 시작했다.

도혁은 안대를 손에 든 채 가만히 창밖을 보았다. 선뜻 잠이 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구름 속을 가르며 끝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도혁은 비행기의 날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좌절. 실패. 회귀. 그리고 성공.

두 번의 인생 동안 겪은 경험을 딛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한다.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쓰디쓴 실패를 맛볼 수도 있겠지만 그 고통마저도 도전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쓴맛이기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한다.

어느덧 비행기의 창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나둘 실내의 등이 꺼지고 고요하게 사위가 가라앉았다.

도혁은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여러 생각과 광고 전략을 물리치고 눈을 감았다.

몇 차례의 짧은 숙면이 반복되고 비행에 지쳐갈 때쯤 도혁이 잠에서 깨어났다.

안대를 들어 올렸을 때 비행기는 JFK 공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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