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02화
결혼이라니.
한수철이 DW애드 임원팀에서 거의 유일하게 꾸준히 연애를 하긴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의 언질도 없이, 아무런 기색도 없이 결혼이라고?
도혁이 배신감에 치를 떨며 급히 한수철을 잡아 왔다. 그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대표는 말이야, 어? 하나라도 광고 수주 더 하고 가려고 앞만 보고 달리는데, 연애도 모자라 결혼을 해?”
“그게 말이지. 하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혼자 베프였냐고. 와, 실망이다.”
“내가 진작 말하려고 했거든. 진짜야. 아니, 이렇게 빨리 미국 갈 줄 짐작이나 했겠냐고.”
그를 타박하면서도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한수철 없이 일한 적이 없다는 걸 방금 깨달았거든.
“너 없으면 허전해서 어떡하냐. 부적처럼 붙이고 다녀야 일이 술술 풀리지, 인마.”
“나라고 미국 안 가고 싶겠냐고요. 공모전에 환장하는 거 몰라? 근데 신혼이라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그건 그렇지.”
도혁이 무심결에 청첩장을 넘겨보았다. 그러곤 눈이 접시만큼 커졌다.
“아니, 잠깐만, 이 이름!”
“맞아. 아는 사람이지. 광고주님이랑 어쩌다 보니. 뭐 그렇게 됐다.”
신부는 AT텔레콤의 홍보팀장이었다. 자주 만나고 그쪽에서 먼저 연락하고 그랬다고 주장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수철이 민망한 듯 떠듬떠듬 변명을 해댔다.
“여친이 광고주님이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어.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을 거고 괜히 오해받기도 싫었고.”
“그래도 인마, 제수씨 될 분인데 나한테는 보여줄 거지?”
“당연하지. 제일 먼저 말하려고 했어. 조만간 셋이 한번 보자.”
얌전한 고양이가 어쩌고 하는 속담을 입에 담기도 전에 한수철이 선수를 쳤다. 회사 핑계를 댄 것이다.
“아무튼 회사 지킬 사람도 필요하잖아? 탁 국장님이랑 나, 유부남 둘이서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지구 정복 잘하고 와라.”
“이야, 이 나쁜 놈, 능력 좋은 놈.”
“너도 장가 빨리 가야지. 미국에서 구해오던가.”
“없던 여친이 미국 간다고 생기냐?”
“그럼 구해서 가든가.”
실없는 소리를 남기고 한수철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몰려오는 적막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도혁은 빵 쪼가리를 입속에 넣으며 한숨지었다.
“빵이나 먹자. 이건 왜 이렇게 딱딱해!”
딱딱한 게 당연한 바게트 빵이었다.
* * *
DW애드 코리아가 분주해졌다.
남는 팀과 떠나는 팀 모두 인수인계와 출국 준비로 바빴다.
학생 때처럼 유학이든 여행이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인수인계의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하나부터 천까지 강박적으로 정돈해서 넘긴 최민아의 서류를 받아 든 황도준이 혀를 내둘렀다.
“디자이너란 자고로 헐렁하면서도 크리에이티브하고 그러면서 좀, 천재적으로 번뜩하는 아이디어를 내는 인간들 아닙니까?”
“난 둔재라서. 이렇게 기록해 두지 않으면 몰라.”
“최 팀장님. 기만도 자꾸 들으니까 지치네요.”
역시 각종 매체 계획에 단가표까지 꼼꼼하게 정돈한 차현우가 매체 팀장에게 파일을 건넸다.
도혁과 마찬가지로 기획 제작 가릴 것 없이 올라운더로 뛰어오던 차현우였지만 옥외와 매체만큼은 총괄했었다.
“자, 우리 매체팀 살림 밑천이야.”
“어이구, 국장님이 무슨 단가표까지 가지고 계십니까. 어? 근데 이거 금액이 다른데요?”
“네고 가능 가격을 적은 거지. 맞춰달라면 윗선 결재받아 와서 맞춰주는 가격?”
“이야. 이걸 따로 표까지 만들어두셨다구요.”
“김 팀장. 광고는 곧 매체야. 집행비의 대부분이 매체 집행비잖아.”
“그렇죠. 늘 강조하시지 않습니까. 비용 절감은 매체다.”
“특히 TV 광고. 힘들겠지만 광고공사 쪽 신경 많이 쓰고. 여기 영업2팀장은…….”
광고 공사와 신문사를 비롯한 각 매체의 담당자들 성향까지 정리해 놓은 파일까지 꼼꼼하게 건넸다.
반면 날치기도 있었다.
“이 광고주는 또라이.”
“네?”
강태오가 무려 포스트잇 한 장으로 인수인계를 해주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도혁이 다가가 눈이 댕그래진 한수철을 질책했다.
“배신의 대가야. 알아서 잘해보라고.”
“명 대표!”
한수철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혁은 사무실을 한 바퀴 휘익 둘러보았다.
업무 현황을 주고받는 직원들을 둘러보며 문득 지금까지 퇴사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시작했던 창업 멤버가 아무도 DW애드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힘을 합해 이멤버 포에버를 진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사자 없는 광고 회사라니. 세상에 다시 없을 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이 절반쯤 이뤄진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웅장해졌다.
도혁은 직원들의 면면을 둘러보곤 대표실로 들어왔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빨대로 저으며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연두의 새싹이 녹음으로 짙어지기 전 숨을 고르는 여름의 초입이었다.
며칠째 그치지 않는 늦봄의 비가 추적추적 대지를 적셨다.
비가 내리고 계절이 변하고 땅은 더 단단하게 굳어갈 것이다. 곧 세찬 장마가 들이치겠으나 그마저도 숲을 이룰 나무의 내일을 위한 밑거름이 될 테니까.
미국에서는 엄청난 장마가, 아니, 폭풍이 기다리고 있겠지.
두렵다기보단 가슴이 벅찼다. 역시 설레는 표정으로 강태오와 차현우가 대표실로 들어왔다.
“방금 내가 대표실 문 노크하면서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글쎄요.”
“막 입학했을 때 애드포인트 동아리 방문 두드리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
“나도.”
강태오의 말에 차현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강태오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때 우리 애드포인트에서 국내 공모전 도장 깨기를 했단 말이지. 완전 신났는데.”
“맞아요. 광고 공사부터 대기업, 지자체까지. 재밌었죠.”
“그때 현우 생각 많이 했어.”
“이렇게 돌아왔잖아. 판 키워서 나가는 거니까 영혼까지 쥐어짜려고.”
“스무 살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한번 굴러봅시다.”
각오가 아주 좋다. 도혁이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를 날렸다.
“방금 그 말 꼭 기억하세요.”
“으응? 말을 너무 많이 했는데 어떤 거 말이야. 영혼 쥐어짜는 거, 구르는 거?”
“아니, 스무 살이요.”
* * *
스무 살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미국으로 가면 스무 살이 된 마음으로 시작하겠다고. 아무것도 없이, 아무 거칠 것 없이 제로 베이스로 처음 광고쟁이가 된 그때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회귀하는 거다.
지난번의 회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연현상이었다면 이건 명도혁이라는 한 인간의 의지에 의한 회귀였다.
도혁은 트렁크의 짐을 꾸리고 본가로 향했다.
출국하기 전 마지막 저녁을 함께하기로 한 가족들이 따뜻하게 그를 맞아주었다.
“집에 자주 좀 오지 그랬어.”
“엄마는 도혁이가 얼마나 바쁜데. 회사 꾸리고 키우느라고 정신없지 뭘.”
웬일로 명현진까지 친절했다.
“예전부터 누나가 내 편 들어주면 난 그렇게 무섭더라.”
“으이구. 잘 지내고. 눈 뜨고도 코 베어 간다는 뉴욕 아니냐. 조심해서 다녀와.”
“내 걱정은 말고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시고 있어. 나 돌아올 때까지 대한민국도 잘 지키고.”
“우리 걱정할 게 뭐 있어. 도혁아 아무쪼록 몸조심하고, 많이 먹고 건강하게……. 차 조심하고…….”
초등학교 때 이후로 가장 많은 잔소리를 들은 것 같다. 꼭꼭 씹어 먹으라는 말까지 하시는 걸 보니 멀리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자주 연락드릴게요. 한국에서보다 더. 귀찮을 정도로 전화할 거니까 꼭 받으세요.”
“국제전화 비싼데 에휴, 이럴 때 결혼이라도 했으면 한시름 놓을 것을. 안사람도 없이 혼자 이역만리에서 외롭지는 않을는지.”
“별말씀을 다 하세요. 아유 우리 어머니 늙으니까 걱정이 늘었네.”
한숨짓는 어머니를 겨우 안심시키고 돌아 나왔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직원들과 송별회를 마치고 친구들과 가족에게까지 모두 인사를 마쳤지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중요한 무언가를 빼먹은 듯 후련하지 않은 느낌이 퍽 좋지 않았다. 어느샌가 따라 나온 명현진이 도혁의 어깨를 툭 쳤다.
“명도혁! 전서윤 씨는 꽉 잡아놓고 가는 거냐?”
“뭐?”
“뭘 그렇게 놀라? 서윤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엄마가 결혼 어쩌고 해서 그 자리에서 얘기할 뻔했는데.”
“무슨 상상을 혼자 하는 거야? 그런 사이 아닌데?”
“헐. 엄마한테 말했으면 사고 칠 뻔했네. 난 둘이 그렇고 그런 줄 알았지.”
빼먹은 게 전서윤이었나.
문득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난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마지막 날 저녁이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명현진이 그의 눈치를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표정 한번 묘하네. 혹시 너 다른 여자 있어?”
“왜……. 그런 걸 물어? 그래 보여?”
“약간. 내가 촉이 좀 좋잖아. 둘 다 서로 마음은 있어 보이는데 진도가 안 나가는 게 이상해. 혹시 최근에 여친이랑 헤어졌냐?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거야?”
최근은 아니지만 헤어지긴 했지. 촉이 좋기는 좋네, 귀신같은 명현진.
도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명현진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런가 보네. 바보야. 지난 인연은 잇는 거 아니야. 헤어졌던 사람은 다시 시작해도 또 헤어지더라고. 만남엔 이유가 없지만 이별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거든.”
“누나야말로 실연당했나 보네.”
“진짜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얼른 붙잡아. 전서윤 씨 탐내는 남자들이 대한민국에만 수백 명은 되겠구만. 당장 우리 PD들만 해도…….”
“……누나!”
“어?”
도혁이 명현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초등학생 이후로 이렇게 크게 부른 건 처음일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누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누나 고마워. 이 은혜 꼭 갚을게.”
“올! 명도혁 고백하는 거냐? 파이팅!”
운전대를 잡은 도혁이 힘껏 액셀을 밟았다.
지나간 인연. 새로운 사람. 이별 그리고 만남. 머릿속에 여러 단어들이 스쳐 갔다.
처음 전서윤을 만났던 날부터 최근 항공사 광고 촬영을 하던 날까지. 지금까지 함께했던 시간의 편린이 심장 속을 서걱거리며 돌아다녔다.
일 핑계를 대며 애써 외면했던 감정들이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지금 아무 말 없이 가버리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집 앞 도착하자마자 초인종을 눌렀다. 눈이 방울만큼 커진 전서윤이 앞섶을 추스르며 그를 맞았다.
“어머! 이 늦은 시간에 연락도 없이, 무슨 일 있으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불편하시면 밖에서 얘기해도 됩니다.”
“아, 이 시간에 저 같은 사람은 카페가 더 불편하죠. 일단 들어오세요.”
자리를 권한 전서윤이 따끈한 차를 내어왔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도혁의 시선이 이동했다.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전서윤이 농담을 건넸다.
“그냥 가실 줄 알았더니 그래도 미안하셨나 봐요?”
“미국 가는 거 아셨군요.”
“그럼 모르겠어요? 우리 대표님이랑 수현이한테까지 인사했으면서 솔직히 서운했다구요.”
“진작 오고 싶었는데 오지 못했습니다.”
“왜요?”
“알고 있었으니까.”
무슨 말이냐는 듯 전서윤이 눈을 끔뻑거리며 올려다보았다.
“내가 전서윤 씨 좋아하는 거 알았으니까. 이대로 가면 미안한 거 알았으니까. 그런데도 놓치기 싫어서 출국길에 잡는 건 더 비겁한 것도 알았으니까요.”
“……고백도 카피처럼 하시네요. 오글거리게.”
팩트로 얻어맞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왕 쪽팔렸으니까 계속하겠습니다. 염치없지만 기다려줄래요?”
“미국 다녀오실 때까지 말이죠?”
“서윤 씨 마음이 저와 같다면 기다려 주세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전서윤이 특유의 꽃이 핀 듯 환한 미소로 답했다.
“싫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