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01화
탁기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 딸 둘 아빠 됐다.”
“아! 희주 선배 둘째 가졌구나. 축하드립니다! 벌써 애 둘 아버님이라니!”
“응. 내가 어지간하면 가려고 했을 텐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지킬 게 많아졌으니까 책임을 다해야지. 와이프가 둘째 임신 중인데 집 비우긴 좀 그렇잖아.”
“네. 이해합니다.”
“아쉽지만 해외 지사 세워놓으면 나중에 진출할 기회가 또 오겠지. 안 그래, 명 대표?”
“맞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세요.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마시구요.
탁기준이 한국에 남아준다면야 걱정 없이 갈 수 있겠지만 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기도 했다.
“탁 국장님뿐 아니라 모두 성급하게 지금 결정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따로 말씀해 주시면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여러분의 결정에 따를 겁니다. 함께하든 남든 급여와 상여금 면에서 전혀 차별은 없을 겁니다. 미국 지사팀은 숙식 등 기본 조건은 제공될 거구요.”
“오호. 마음은 참, 가고 싶은데 말이지.”
“미국으로 가시는 분은 도전이 되겠지만 지키는 일도 나름대로의 도전일 겁니다. 광고주는 충분하지만 팔로우 업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으니까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그래. 그런 면도 있겠지.”
“참, 그리고 이 집과 차, 모두 저 떠나고 나면 회사에서 공용으로 사용하세요. 그럴 생각으로 이렇게 큰 집을 마련한 거니까.”
“이 집에서 살 수 있다고? 나, 남을래.”
“나도요.”
“나도.”
야심 차게 출국할 것처럼 하던 멤버들이 하나둘 빠져나가자 도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다들 이럴 겁니까?”
“뉴욕 가면 열 평도 안 되는 사무실에서 종일 광고 기획만 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한 거 아닙니까?”
한국 잔류의 미끼가 너무 큰가? 고민하는데 차현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다들 미국 욕심 있을걸? 일단 나는 무조건 간다. 알지?”
“그럼요. 지난번에 공항에서 말씀드렸잖아요.”
“사실 마흔 넘어서 꼭 진출해 보고 싶었어. 꿈이었다고.”
그러시겠죠. 속으로 말을 삼키며 도혁이 부연했다.
“대표로서 내 꿈만 좇는 게 아닌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지금도 고민 중이구요.”
“별말을 다 하는구만. 백번 생각해도 이기적인 선택은 아니지.”
도혁의 말에 탁기준이 대꾸했다.
“한국은 내가 지키고 있을 건데 무슨 걱정이야. 그리고 해외 지사 설립이 당장은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DW애드를 위한 투자 아닌가? 그러니 김철준 대표님도 해외 나가 계신 거고.”
“맞습니다. 회사의 성장을 위한 좋은 발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나도 명 대표가 진행하는 방향이 맞다고 생각해. 광고처럼 사업도 반걸음 앞서가야지. 한국에서, 아니지 세계에서도 우리 회사 이름 대면 모르는 광고인이 없도록 만들어 버리자고.”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가고 싶어요!”
“좋습니다. 역시 이 멤버 포에버!”
“오케이!”
술잔이 거하게 돌고 이런저런 전망들이 오고 갔다. 술과 분위기에 취해가는 가운데 최민아가 입술을 깨물며 도혁에게 다가왔다.
아까 미국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대표님, 저 좀 따로 보실 수 있을까요?”
“왜, 무슨 일 있어?”
“저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무서워요, 대표님.”
무섭다고? 천하의 최민아가?
도혁의 시선이 최민아의 입술에 닿았다. 꾹꾹 물어뜯은 입술에서는 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최민아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따뜻한 차와 함께 무릎 담요를 건넸다. 최민아가 정사각형을 정확히 맞추어 무릎 위에 얹었다. 도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표님 저 아무것도 못 해요. 못 하겠어요. 미국도 못 가겠고, 한국에 남을 자신도 없어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차분하게 차 한잔 마시면서 천천히 말해.”
“네……. 아, 정말 대표님. 저 어떡하면 좋을까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한숨짓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가 우는 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으니까.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말 그대로 악착같은 노력형 디자이너가 바로 최민아였다.
그런 그녀가 미친 듯이 괴로워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슬럼프를 겪었을 때였다. 십 년 차쯤 되었던 시점이었는데 휴직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휴직으로 커리어에 큰 흠이 갔었지. 결국 국장급 승진에서도 한 번 좌절했었다.
도혁은 한숨을 삼키며 최민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차로 따지면 아직 몇 년 되지 않은 디자이너였지만 실력만큼은 전생을 넘은 지 오래되었다.
도혁은 울먹이는 그녀를 토닥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민아야, 뭐가 그렇게 힘들어.”
“그냥 다요. 다 힘들어요. 나 빼고 다들 앞으로 나가는 거 같고, 나만 정체된 것 같아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디자인이 구려서 미치겠어. 미쳐 버리겠어요.”
“지구에서 제일 잘한다고 누누이 말해줘도 대표 말은 안 듣지?”
“말도 안 돼! 대표님은 원래 저한테 칭찬만 하시잖아요. 이미 도준이가 나보다 훨씬 앞서서 가고 있어요. 진우 팀장도 그렇고 강태오 국장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 강 국장님 정말.”
“…….”
“강태오 국장님은 사실 미쳤어요. 미친 천재라구요.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요. 이젠 대표님도 미워요. 다 싫어.”
“큰일 났네. 민아 데리고 미국 가야 하는데.”
최민아만큼은 꼭 데려가고 싶었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제대로 구현하는 디자이너를 찾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찾는다 하더라도 손발 맞추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말이다.
하지만 최민아 상태가 너무 심각한데?
도혁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최민아는 결심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면목 없지만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미국도 못 가고요. 한국에서도 일하기 힘들 것 같아요. 저 휴직한다고 말씀드리려고 따로 뵙자고 한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민아야. 어제까진 별다른 말 없었잖아.”
“오래 고민해 왔던 거예요. 꾸역꾸역 출근한 지 한 달 넘었어요.”
내색을 안 하는 성격이라 전혀 몰랐다.
마지못해 출근하면서도 제일 먼저 회사에 도착해 주변을 정돈하곤 했다. 그 속이 얼마나 뭉그러졌을지 짐작이 되어 가슴이 아렸다.
“그동안 챙기지 못해서 미안하다. 미국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수주하려는 마음에 주변도 추스르지를 못했네. 못난 사장이다. 그치?”
“대표님이 왜 미안해요. 제가 죄송하죠. 이 중요한 때에 도움은 못 될망정 징징대기만 하고 있잖아요.”
“징징이라니. 나도 대표이기 이전에 카피라이터야. 그 심정 누구보다 잘 안다고.”
카피를 단 한 줄도 못 쓰는 날이 있다.
한 줄이 아니라 한 글자도 못 쓸 때도 많다. 백지만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종일토록 멍청하게 그로기 상태로 앉아 있는 날 말이다.
흰 종이가 나를 째려보는 것 같고 키보드 두드리면 죽을 것 같고 글자 하나 찍으면 죽을 것 같은 날들이 분명히 있지.
하지만 그걸 넘으면, 그 단말마와 같은 고통이 지나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도혁은 최민아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슬럼프가 왔다는 건 다음 단계로 갈 준비가 됐다는 뜻이야. 도준이가 왜 팍팍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다니는 줄 알아?”
“몰라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천재인가 보죠.”
“아직 슬럼프 올 지점까지 못 와서 그래. 그럴 주제가 못 돼서.”
“…….”
최민아는 대답 대신 세운 무릎 새로 얼굴을 파묻었다.
“네 시안이 형편없이 보이는 것도 그림 한 장 못 그리는 마음도 결국 특정 수준까지 갔다는 거야. 넌 그 경지에 오른 거고, 도준이는 아니지.”
“정말이요? 대표님 보시기에 진짜 그래요?”
“당연하지. 그리고 최민아는 이 벽을 뚫고 더 높이 갈 거라고 봐. 그런 의미에서 한국 땅은 좁아터졌지.”
“대표님…….”
“나하고 같이 가자. 슬럼프를 극복할 좋은 계기가 될 거다.”
“흐어어엉.”
결국 최민아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못 볼 꼴을 보였다면서도 펑펑 울고 있는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고 있는데 황도준이 둘을 발견했다.
테라스 문을 왈칵 열더니 놀라 소리쳤다.
“어! 어! 최 팀장님 왜 우십니까? 어! 설마 대표님이 울린 거예요?”
“뭐? 나 이거, 참.”
“뭡니까! 우리 최 팀장님이 잘못하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와, 우리 명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무슨 소리야. 최 팀장 너 때문에 우는 거다. 됐냐?”
“네??”
황도준에게 장난스레 말을 던지자 듣고 있던 최민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만요. 우리 팀장님, 왜 저러십니까? 웃다가 웃으면…….”
“그만해. 너 때문에 운 거 맞으니까.”
일어서며 황도준을 타박하는 최민아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도혁도 농담을 보탰다.
“슬럼프는 일하면서 극복하는 거라고 말하면 악덕 대표냐?”
“잘 아시네요. 꼰대 대표님.”
최민아가 몸을 돌려 도혁을 향해 똑바로 섰다. 그러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격려 감사합니다. 대표님. 믿어줘서 고맙구요.”
“새삼스럽게. 어이구, 큰절이라도 하겠다?”
“할까요?”
“한번 해봐. 울리고 큰절 받고, 기분 진짜 이상하겠다.”
“해버려야지!”
절을 하는 척 장난까지 치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로써 미국 멤버 하나 더 영입인가.’
최민아의 고비를 넘긴 도혁의 눈길이 남은 직원들을 쭈욱 훑어갔다.
솔직히 모두 데리고 가고 싶은 멤버들이었다.
확, 한국 본사 문 닫고 전부 가버려?
대표답지 않은 생각을 삼키며 위스키를 따랐다. 고민이 깊어가는 밤이었다.
* * *
늦은 봄의 여린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나무가 제법 푸릇하게 우거졌다. 그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도혁이 미국팀 멤버를 점검하고 있었다.
차현우, 강태오, 최민아가 함께 미국을 가기로 확답을 한 상태였다. 이진우는 본사 제작팀의 전력 손실을 우려해 이번엔 남겠다고 선언했다.
DW애드의 전체 전력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탁기준과 이진우가 있으므로 안심이 되었다.
‘또 기회가 올 거니까 그때 함께하면 되겠지. 한국에 남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뉴욕 가선 광고 신인으로 굴러야 하니까.’
속으로 기획과 제작의 일정을 체크하며 광고주를 점검하고 있는데 한수철이 들어왔다.
“미국 출발 일정 확인 중이야. 수철이는 언제가 좋냐?”
“저기, 명 대표…….”
“왜. 부산 집엔 말씀드렸지? 내가 오랜만에 안부도 여쭙고 전화 한 통 넣을까?”
“명 대표. 도혁아. 저기 나 미국 못 갈 거 같다. 하아.”
“뭐? 잠깐만. 도대체 왜!!!”
베스트 프렌드에게 절교라도 당한 기분으로 도혁이 소리쳤다.
한수철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저 자식은 당연히 가는 거 아니었나?
“한수철, 이럴 거야,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가야지!”
“광고주가 그러니까, 에이 씨. 모르겠다.”
한수철이 도혁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 도망갔다.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건 청첩장이었다.
“야, 이 자식 이중으로 배신했네. 야! 한수철! 한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