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00화
일상의 달인 방송 당일이었다.
“6시예요! 방송 시작하니까 빨리 와봐요.”
“오! 퇴근 직전에 방송하니까 같이 볼 수 있어서 좋구만.”
“생각보다 캥거루 빵집 방송을 엄청 빨리 하는데요? PD님 행동력 무슨 일입니까?”
좋은 소재임을 단번에 눈치챈 일상의 달인 PD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캥거루 베이커리를 찍어갔다. 촉이 좋은 방송인이었다.
TV 앞에 동빵연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이자 퇴근을 준비하던 팀장급 임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서울 외곽의 한 베이커리. 식빵과 쌀로 만든 빵을 전문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요,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익숙한 성우의 음성으로 캥거루 베이커리가 소개되었다. 줄을 길게 늘어선 손님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제가 장이 무척 예민한 편이라서 밀가루 잘 못 먹거든요. 근데 여기 빵은 소화가 잘돼요.
-글루텐 없는 빵집이 이 집뿐이라 저어기 경기북부에서 왔어요.
-저기 좀 비켜보세요. 조금 지나면 팔리고 없어요.
-빵도 맛있고 여기 꼬마가 귀여워서 자주 와요. 엄마 도와서 빵도 집어준다니까요.
마지막 손님의 말에 카메라가 가게 안쪽으로 이동했다.
가게 입구에서는 귀여운 딸이 배꼽 인사를 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자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 정말 귀엽다. 저런 딸 하나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는데?”
“너도 결혼해서 하나 낳든가. 진짜 다 가진 기분 맞으니까.”
회사에서 유일하게 딸 아빠인 탁기준이 어깨를 으쓱대며 한수철에게 잘난 척을 해댔다.
“국장님, 아니지 희주 선배 딸 예쁜 거 아니까 쉿! 캥거루 사장님 인터뷰 나와요.”
최민아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TV 화면을 가리켰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아토피가 있었어요. 엄마 마음으로 악착같이 개발한 빵이 바로 이 쌀빵입니다. 엄마의 이름을 걸고 내 자식에게 먹이는 마음으로 정성껏 만들었어요.
-특별한 비법이 있습니까?
몇 가지 비법을 전수하고 빵 만드는 공정과 함께 PD가 직접 빵을 맛보며 감탄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정말 비법은 안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이 하얀 가루가 비법인 거 맞지요?
-진짜 비법은 알려 드리기 어렵죠. 살림 밑천인걸요. 특허받은 빵이니까 특허청에 문의하세요.
관공서 핑계를 대는 캥거루 사장님의 환한 미소로 프로그램이 끝을 맺었다.
-아이의 아토피를 위해 직접 엄마 손으로 개발한 빵. 엄마의 마음으로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일상의 달인이 기도할게요! 대한민국 엄마 파이팅!
성우의 부드러운 음성이 울려 퍼지며 캥거루 사장님과 딸이 함께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하는 장면이 느리게 펼쳐졌다.
칙칙한 개인사는 밝히지 않고 아이와 밝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진우가 홈페이지의 반응을 알려주었다.
“벌써 게시판에 문의가 올라왔습니다. 반응 좋은데요? 주로 어느 빵집인지 물어보는 내용입니다.”
“아이 귀엽다고 난리네요. CF 모델로 데뷔하신 줄 어떻게 아셨을까.”
“역시 맛집 프로그램이 홍보가 잘되는구나. 곧 플래카드 써 붙이시겠는데요. 일상의 달인 출연!”
“그럼 우리도 퇴근 시간인데 플래카드 붙은 맛집 찾아서 회식이나 할까? 번개니까 일정 되는 사람만 붙어. 팀원들도 올 수 있는 사람 데려오고.”
“오! 오랜만이네요. 어디로 갈까요.”
“소! 무조건 소!”
“돼지 자꾸 빼지 마라. 삼겹살 서운하다.”
“회는 어떻습니까?”
통일되지 않는 메뉴에 도혁이 제안했다.
“혹시, 우리 집 가지 않을래? 이사도 했는데.”
“네? 언제요?”
“얼마 전에.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일단 집으로 가자.”
* * *
“대표님. 언제 차를 두 대나 더 사셨습니까?”
주차장에서 도혁의 차를 발견한 이진우가 눈을 끔뻑였다.
“얼마 전에 큰맘 안 먹고 샀지. 이 정도야. 뭐. 내 차인 줄은 어떻게 알았냐?”
“저쪽 전화번호 놓는 곳에 DW애드 명함이 붙어 있어서 알았습니다. 와!”
“조만간 회사 차로 쓸 거야. 지금 모는 차까지 같이해서. 일단 들어가자.”
‘차를 세 대나 혼자서…….’라고 중얼거리던 이진우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공간을 전부 혼자 쓰고 계십니까?”
“너무 큰가? 곧 다른 용도로 사용할 일도 있고 가족들도 자주 오니까.”
“다른 용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이렇게 큰 집에, 잠시만요. 이건 당구대입니까? 와.”
“그렇지.”
최근 회사 근처로 이사했다.
원래 큰 집을 좋아하는 편이라 대형으로 구했다.
초대해서 놀기도 좋고, 나름 남자로서 로망도 있었거든.
예를 들면 게임방 같은 곳 말이다.
“악!!! 여기 대박입니다. 대표님 저희 여기서 살게 해주십시오.”
“마음에 드냐? 너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
피시방처럼 꾸민 방에는 네다섯 명은 거뜬히 팀플레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선반에는 편의점처럼 과자도 가득했고.
황도준 도무진이 나란히 앉아서 벌써 게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표님 살 빼신다더니 이런 환경에서 살을 뺄 수 있겠어요?”
“왜, 당구대랑 간이 골프대도 있어. 헬스기기도 제법 있고.”
“대박이다. 와, 저쪽에 바도 있네요. 바에서 한강이 보여요!”
“술 좋아하니까 제일 먼저 만들었어. 강도 보고 와인도 마시고. 국장님들은 저쪽에 자리 잡으셨네.”
강태오가 벌써 위스키 하나를 따고 있었다.
“역시 강 국장님. 비싼 건 귀신같이 알아보시네요.”
“왜, 아까워?”
“아니요. 오늘 먹으려고 고이 모셔둔 겁니다.”
“집 끝내준다. 이런 데서 살아야 하는데.”
“로망을 갈아서 만들어봤죠. 근데 위스키 재벌가 막내아들한테 들을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야 뭐, 우리 집 알지?”
알지 그럼. 그 쓰레기장 같은 원룸을 어떻게 잊나.
바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 국장님도 돈 많으니까 이렇게 꾸며놓고 살아요. 아. 여기서 나가기 싫다. 참, 나 침실도 잠깐 구경해 봐도 돼요?”
“그럼.”
직원들이 구석구석 야무지게 구경을 하는 걸 지켜보던 강태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나랑 같이 살자.”
“네? 그건 좀……. 청소는 저 혼자 할 거 같은데요.”
“그만큼 좋다는 소리지. 우리가 같이 새운 밤이 얼만데 뭘 새삼스럽게 피하고 그러냐. 혹시 숨겨놓은 여자친구라도 있나?”
“내가 짬이 어딨습니까? 틈이 있어야 여자도 만나죠.”
강태오의 너스레에 이진우도 말을 보탰다.
“지금부터 저의 목표는 이제 이 집입니다. 이런 집 살 때까지 열심히 일해서 돈 모을 겁니다.”
“곧 사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니까.”
“듣기만 해도 설레네. 근데 나 진짜 이 집에서 살면 안 되냐?”
“강 국장님은 저리 가시죠.”
직원들과 투닥거리는 사이 잔이 모두 채워지고 음식이 배달되었다.
“나름 집들인데 만들어주고 싶지만 기력이 없어서. 자, 모두 잔 들고 드시고 싶은 만큼 드세요. 우리 돈 많이 벌어서 모두 이런 집에서 삽시다. 각자 취향 듬뿍듬뿍 담아서.”
“펜트하우스를 위하여!”
“위하여!”
잔을 부딪치자 예전부터 외쳐왔던 구호가 생각났다. 이멤버 포에버.
그 촌스러운 문구 속의 주인공들이 지금 바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도혁은 술잔을 기울이는 직원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둘러보았다. 그러곤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저, 의논할 게 있습니다. 대표로서 죄송한 선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헉! 뭔데요. 무서워요. 대표님.”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무슨 일인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탁기준이 조심스레 도혁의 눈치를 살폈다.
“네. 그런 건 아니고 여러분도 미리 준비를 하셔야 하니까 이쯤에서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저 김철준 대표님 따라 미국으로 가려구요.”
“우리 모두 짐작은 하고 있었다.”
탁기준을 포함한 국장들이 모두 끄덕였다.
“예전에 칸 다녀오면서 농담처럼 말했었잖아. 빈말하는 사람 아니고 말한 건 반드시 지키니까 이런 날이 오겠구나 생각했어. 예상보다 상당히 빠르지만 말이지.”
“그러셨군요. 맞습니다. 미룰수록 못 하게 되더라구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움직여야죠.”
전생에도 전직 스카우트와 해외 진출 기회가 많았다. 나름 잘나가는 카피라이터였으니까.
당장 차현우도 함께 미국으로 가자고 꼬드겼었고.
바뀐 입장이 묘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도혁은 입속에 위스키를 털어 넣으며 차현우를 바라보았다.
차현우가 빈 술잔을 채워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거야. 김철준 대표도 고생 많이 하나보더라.”
“새 길을 뚫는다는 게 쉽지 않죠. 태강은 생짜로 영업하는 모양이던데 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겁니다. 맨땅에 헤딩할 수는 없죠.”
“뭐? 그럼?”
“일단 기존 광고주 해외 지사 다 끼고 시작할 겁니다. 이 부분은 국내에서 사전 조율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우리 처음에 했던 것처럼 공모전 깨기를 할 거예요. 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초심으로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공모전 도장 깨기라고?”
“네. 해외 지사 진출 시 가장 유리한 방식을 고민해 봤습니다. 현지 공모전에 부합하는 방식의 광고를 최단 기간에 집행함으로써 인지도와 선호도를 한꺼번에 끌어올리는 거죠. 칸 때문에 유럽으로 진출할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 광고의 결이 미국에 더 가깝다고 판단했어요.”
“하긴 그편이 영업하기 쉬울 수도 있어. 진짜 해외 진출을 하려면 편견을 뚫고 우뚝 서야 하니까.”
“맞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단단한 결기가 서려 있었다.
탁기준이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한국에서 진행한 광고를 3대 광고제에 출품하는 방법도 있어.”
“물론 그 방법도 DW애드 본사를 통해 병행할 겁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집행한 광고로 미국 광고제 수상권에 드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결이 많이 다르거든요.”
“그렇긴 하지.”
“아직은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한 국제광고제의 분위기와 정보를 국내에서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뭐, 해외 진출도 오랜 꿈이었고요.”
좋은 광고는 어디서든 통하게 마련이지만 수상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미래에 유수의 국내 대행사가 해외 광고제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지만, 현지인 해외 지사와 자회사에서 수상작이 많이 나왔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차현우가 전생에 했던 이른바 ‘해외 공모전 싹쓸이’는 회귀 후 광고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마음에 담고 있었다. 이제는 실행할 때라고 판단했고.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2년 잡고 있어요. 더 빠를 수도 있고요.”
“세계 광고제 정복에 2년만 잡고 가신다. 역시 명도혁 대표다운 생각이구만.”
“문제는 그동안 DW애드 코리아 본사를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멤버 모두 함께 미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겠지.”
“네. 그래서 이렇게 모인 김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도 준비를 하셔야 하니까요. 현재 광고주로 충분히 2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 목표 때문에 미친 듯이 수주를 따왔구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신규 영업 안 하겠냐? 우리 몰라?”
탁기준이 피식거리자 차현우가 의외라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탁 국장, 한국에 남게?”
탁기준이 잔류하겠다고 하자 모두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광고에 관한 욕심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었다. 향상심도 승부욕도 엄청났고.
당연히 가겠다고 발 벗고 나설 줄 알았단 말이지.
혼돈에 휩싸인 도혁이 탁기준을 바라았다.
“한국은 내가 잘 지켜줄 테니까 다들 잘 다녀와. 누군가는 지켜야 할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