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98화
빵집 투어의 끝자락에 고석구 장인을 찾아갔다.
고석구가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도혁을 맞았다.
“그래, 우리 짐승 같은 캥거루는 잘 만나고 왔습니까? 다른 놈들도 잘 있고?”
“네. 모두 선생님께 안부 전해달라셨습니다. 훌륭하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일단 첫 번째 달인 프로그램 추천자는 캥거루 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짐승이라시더니 완전 미인이시던데요.”
“우락부락 짐승 같은 놈을 떠올렸지요?”
“네. 광고한다는 놈이 굳은 머리로 편견에 갇혀 있었구나, 반성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선생님 은근히 장난이 심하십니다.”
“하하. 그 자식 더 마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그 자식을 좀 심하게 아낍니다.”
웃음 끝에 고석구의 눈동자에 애잔한 빛이 서렸다.
“혼자 아이 키우면서 악착 부리는 게 안쓰러워 내 캥거루라고 별명도 지어줬어요. 비썩 말라 가지고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그러게요. 워킹맘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그저 워킹맘이 아니고 싱글맘입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많이 힘드시겠네요.”
“결혼하고 일 년 좀 지나서 남편이 죽었지, 아마.”
“…….”
“아이도 예민하고 아파서 어디 맡기지도 못했어요. 연주가 더 어릴 때는 진짜 캥거루처럼 업고 안고 밤새 반죽하고 빵 굽고 참, 그 친구 고생한 거 말로 다 못합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예요. 똘똘해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더라고. 내 데려와서 딸처럼 키웠어요. 결혼해서 한시름 놨다 했는데 부모 복 없으면 남편 복도 없다더니…….”
고석구가 결국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도혁이 커피 잔을 그러쥐며 조금 고민했다.
일상의 달인 PD가 알면 곤란하겠는데?
방송에 나가면 좋은 소재이지만 개인사가 너무 밝혀지는 건 별로다.
사연팔이까지 하는 건 좀 양아치 짓 아닌가.
“캥거루 사장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개인적인 아픈 사연은 비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방송 소재로 소비되는 것 원치 않으시지요?”
“저도 그 부분이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종류 프로그램을 TV에서 보지 않습니까? 솔직히 사연이 나와야 시선이 좀 가기도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아이를 추천하긴 했는데, 잘하는 짓인지 싶어서 고민 중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사별까지 사연 팔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아토피를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한 빵으로 벌써 특허까지 취득하셨더라구요. 그 부분만 강조하는 게 좋겠습니다.”
“혼자 애 키우면서 대단하지. 암.”
도혁이 끄덕이며 대꾸했다.
“엄마의 힘인가 봅니다.”
“근데 원래 독종이었어요. 내 밑에서 배울 때도 내가 만만치가 않거든. 막 호통을 치고 혼을 내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했어요. 여릿해 보여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아마 나를 넘어서는 장인이 될 겁니다.”
당연하죠, 선생님……. 글루텐 프리 쌀빵 특허권은 곧 돈방석이 될 거라구요.
장인을 넘어 트렌드세터가 될 귀한 캥거루였다.
굳이 미래를 말해주진 않았지만, 도혁은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선생님.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을 겁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순간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그걸 바라보던 엄마의 따뜻한 미소가 스쳐 갔다.
“참, 선생님과 우리 캥거루 사장님이 광고 모델을 서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모, 모델이요?”
광고 모델이라는 말에 고석구가 놀라 되물었다.
‘이번 기회에 캥거루 사장님 돈방석, 조금 더 당겨 드려야겠다.’
도혁이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 * *
드디어 동빵연(동네빵연대)의 PT 날이 되었다.
오늘의 프레젠터는 도혁이었다.
그간 미팅을 주도하기도 했고 짧은 시간과 적은 예산으로 고퀄리티의 시안을 쥐어짜느라 강태오가 발표 준비까지 할 여력이 없었다.
영혼까지 열과 성을 다한 강태오와 최민아가 PT를 참관하겠다고 나섰다. 신입 사원 김민준도 함께였다.
“최 팀장이 본다고 생각하니까 왜 더 긴장되냐?”
“대표님 긴장한 기색 전혀 없거든요?”
“우리 최 팀장 오랜만에 PT 가는데 분위기가 확 다를 거야.”
도혁의 말에 강태오가 신나서 대꾸했다.
“거기, 뭐시기냐 고석구 베이커리에서 하는 거 아니야?”
“맞아요. 빵집에서 하죠.”
“그거 노리고 다 따라가는 거잖아. 민아 빵 먹으려고 가는 거라니까?”
“국장님 어떻게 아셨어요?”
장난을 치면서도 도혁은 조금 긴장했었는데. 고석구 베이커리의 문을 열자마자 안심했다.
푸근한 버터 향과 테이블 가득 놓인 빵이 그들을 맞이한 것이다.
매번 칼날 위를 걷는 듯 신경이 곤두서는 대회의실에서 광고주의 굳은 얼굴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던 PT와는 대조적인 광경이었다.
“보통 PT가 이렇습니까?”
“그럴 리가. 우리 민준이 오늘 PT 보고 오해하겠네. 보통은 칼바람 불지. 으……. 심장이 쫄깃쫄깃하다고.”
강태오가 팔의 소름을 훑으며 몸서리쳤다.
일행이 들어온 것을 본 고석구가 환한 미소로 악수를 청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웬만한 점주들은 불렀습니다.”
“네. 이렇게 자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바쁘실 텐데요.”
“별말씀을요. 우리가 고맙지. 빵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쉽고 편하게 설명 잘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여기 같이 오신 분들 테이블에 놓인 빵도 좀 드시고. 각 제과점에서 대표 빵을 가져왔어요. 맛도 보시고 참고하시라고요.”
“정말이요?”
동빵연 멤버들이 빵 앞에 높인 제과점 푯말을 보고 눈을 반짝 빛냈다.
귀여운 인간들, 대표는 PT로 목이 타는데 말이지.
도혁은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며 가게를 쭈욱 훑어보았다.
매장 안의 테이블을 이어 붙이고 대충 배치한 의자에는 동네 빵집 사장님들이 푸근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에 빵과 커피를 마시는 DW애드 식구들과 빵집 종업원들. 종이 위에 매직으로 적어 붙인 금일 휴업 공고까지.
흡사 동네잔치와 같은 풍경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호흡한 도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삐이! 삐이이이! 아! 잘 들리십니까?
“예! 잘 들립니다!”
음향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전달만 잘되면 그만 아닌가.
도혁이 마이크를 다잡고 발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DW애드 코리아의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다들 가게 운영으로 바쁘신데 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대한 짧고 굵게, 그리고 쉽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합시다.”
“좋습니다.”
추임새까지 넣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도혁은 어두운 시장에 대한 칙칙한 분석은 생략하기로 했다.
피차 괴로울 뿐인 상황이었으니까.
대신 그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로 PT를 시작했다.
바로 소비자의 목소리였다.
-소비자 1 : 아, 맞아요. 털보 아저씨네 가게 없어져서 너무 속상해요.
-소비자 2 : 저 임신했는데 여기 불란서제과 소보루빵 먹고 싶어서 힘들다구요. 어릴 때부터 먹었는데.
-인터뷰어 : 소보루빵은 슈퍼에도 팔잖아요.
-소비자 2 : 에이, 어릴 때 먹던 그 맛을 찾는 거잖아요. 버터크림에 찍어 먹으면 꿀맛인데. 아 인터뷰하셔서 더 먹고 싶어졌어요. 불란서 아줌마 도대체 어디 계세요. 아줌마!
-소비자 3 : 결혼기념일 때마다 이 빵집에서 케이크를 주문했었는데 올해는 다른 데서 샀어요. 이것 참, 시장통에 있어도 이 집 빵이 맛있었는데.
인터뷰 화면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이런.”
“털보네도 접었어? 참나, 환장하겠구만.”
[빵을 굽는 시간, 그리고 추억]
도혁이 짧게 문장을 띄운 후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을 기다리는 소비자들 잘 만나보셨습니까? 반가우시죠?”
“그럼요. 맛있다, 많이 파세요. 단팥빵 언제 나와요, 이 짧은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데.”
“그렇습니다. 저는 누군가와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때 반드시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을 먹곤 하는데요, 선물이 물건을 남긴다면 음식은 기억을 남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입속에 감도는 미감, 향긋한 버터 냄새, 바삭거리는 소리. 촉촉하게 갈라지는 빵의 질감. 빵은 오감에 따뜻한 기억을 남기는 좋은 음식입니다.”
열심히 고개를 주억이며 사장님들이 기획안에 집중했다.
도혁이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아쉽게도 문을 닫는 동네 빵집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합니다.”
“에휴, 그러게나 말입니다. 뭔가 해결책을 만들기는 해야겠는데 막막합니다.”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빵만 잘 만들면 될 줄 알았더니…….”
시장님들의 한숨이 깊어졌다.
도혁은 반응이 예상했던 반응이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현재는 어려움이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베이커리라는 시장을 크게 보면 프랜차이즈의 약진은 우리 제빵계에 기회가 될 것입니다.”
“기회라구요?”
“네.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는 말이 있죠.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바로 차별화 전략으로 말입니다.”
단호하게 눈빛을 굳힌 도혁이 고석구에게 물었다.
“제자분들 중 프랜차이즈 제빵업체에 취업하신 분도 많으시죠?”
“뭐, 그렇기는 합니다.”
“취업뿐 아니라 프랜차이즈 점주로 개업할 수도 있을 거구요.”
도혁이 화면을 전환해 시장 상황을 설명했다.
“국내 베이커리 시장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전체 파이가 커진다는 뜻입니다. 이 역할을 프랜차이즈들이 여러분 대신 해주고 있는 겁니다.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유명 모델을 써가면서요.”
“그러면 뭐 합니까. 시장을 키운다고 우리 동네 빵집이 살아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흥분한 사장 한 명이 소리쳤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상생의 방안을 만들려고 오늘 모인 겁니다. 프랜차이즈는 적이 아닙니다. 함께 커나갈 동반자라고 생각하시고 이용하자는 겁니다. 아까 소비자분들 반응을 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의 오랜 손맛이 깃든 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고전하는 이유는 빵이라는 제품의 특성이 바뀌었는데 여기에 따르지 못한 마케팅 전략 때문입니다.”
“빵의 특성이 바뀌었다고요? 우린 똑같이 만드는데요.”
도혁이 테이블에 놓인 스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쟁 후엔 배를 불리기 위한 빵이었죠. 그 후론 간편한 간식에 불과했죠.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빵은 이제 국민의 대표적 아침 식사이자, 기호품입니다.”
“하긴 그렇지. 식빵 팔리는 거 보면.”
“맞기는 하지.”
주억이는 사장들 앞에 자료 화면이 펼쳐졌다.
“쌀의 소비가 줄고 아침 식사를 식빵과 시리얼로 대체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맞벌이 가정의 증가와 핵가족화에 따라 같은 빵을 만들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점점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그냥 만들기만 했구만.”
“이 점과 소비자들이 동네 빵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컨셉을 정해봤습니다.”
[집밥 동네 빵. 엄마의 마음을 담은 착한 빵]
“착한 빵이라고!”
“집밥, 아니, 집 빵인가!”
고석구를 비롯한 사장들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