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97화
[제빵 천재 명도혁]
새로운 캐치프레이즈가 대표실에 걸렸다.
최민아가 기가 찬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 제빵 천재?”
“내가 새로운 적성을 발견해서 써 붙여 놓은 거지.”
“엥? 광고 천재로는 부족한 거예요?”
최민아의 구박에 도혁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돌아보았다.
“꽈배기 할머니가 인정하셨다니까? 어제 내가 무려 꽈배기 장인의 녹차 비법을 알아냈어.”
“에이, 입맛이 까다롭다고 예민한 게 아니라구요. 대표님은 그냥, 저기 뭐냐 초딩 입맛인 거잖아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일상의 달인에서 비법을 알아냈을 뿐 아니라 직접 전수까지 받았어. 아들한테도 안 알려주신 반죽이라고.”
“올~ 그래서 일상의 달인에 대표님이 비법 전수받는 장면 나와요?”
“아니.”
최민아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이거 봐. 증거도 없네.”
“내가 편집해 달라고 했지. 광고 회사 사장이 방송 출연하면 광고인 줄 알 거 아니야.”
“어머, 그건 그러네요. 우리 대표님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광고인이잖아요.”
“엥? 내가?”
수많은 선배 광고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까이에는 김진태 교수도 있고. 전생에는 차현우 선배가 있었지.
“나 유명하냐?”
“방송이나 광고 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에게 롤 모델일걸요? 칸 광고제에 다큐멘터리에, 인터뷰도 자주 하셨잖아요.”
“그런가.”
“그리고 뭐 꼭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약간 잘생기고 아주 조금 멋있기도 하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지 뭐. 아무튼 증거는 없지만 제빵 천재이신 걸로 하고, 대표님, 이 가방은 뭐예요?”
백팩을 열심히 꾸리는 중이었다. 오늘부터 부지런히 다녀야 하거든.
“나 출장 좀 가려고. 고석구 장인께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추천받았어. 달인 프로그램에 추천할 만한 동네 빵집 사장님을 찾아볼 거야.”
“헐! 빵 맛집 찾아다니시는 거예요?”
“제빵 천재의 베이커리 로드라고나 할까? 왜 같이 갈 거?”
“세상에. 이 나쁜 대표님!”
최민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일을 산더미처럼 주시고 맛집 투어를 가자고 하시다니요! 나 빵순이인 줄 알면서 자랑하는 거죠?”
“그러게. 악덕 대표구만. 대신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빵은 다 사 올게.”
“빨리 오셔야 돼요! 빵은 이틀만 지나도 맛이 없다고요.”
“걱정 마. 이 제빵왕 명도혁을 믿으라니까!”
“아니, 언제 천재에서 제빵왕으로 업그레이드됐대?”
“그게 그거지.”
최민아가 자리로 돌아가고 막상 혼자 떠나려니 조금 아쉬워졌다.
도혁은 실내를 둘러보다 가장 어린 신입 사원을 불렀다.
“기획국 김민준 씨?”
“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지금 바빠요? 나하고 출장 좀 다녀올 수 있나?”
멀리서 듣고 있던 한수철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웬일로 신입을 다 데리고 나가시나. 민준아 대표님이랑 출장 갔다 와. 따라가면 배우는 게 있을 거다.”
“넵! 다녀오겠습니다. 한 팀장님!”
기합이 잔뜩 들어간 신입의 표정이 비장했다. 빵 사러 가긴 너무 장엄한 얼굴이었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신입 사원 때 생각도 나서 툭,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어깨 펴세요. 이렇게까지 긴장하면 괜히 불렀나 싶으니까.”
“아닙니다! 대표님이 제 이름을 알고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직원 이름도 모를까 봐? 아무튼 편하게 갑시다. 시장조사 차원에서 가는 거니까.”
“넵! 알겠습니다!”
도무지 힘이 빠지지 않는 기합 소리를 들으며 조금은 그가 이해되었다. 동시에 김철준 대표의 입장도 알 수 있었고.
신입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거리를 뒀을 뿐이라는 걸.
신입 사원 때 김철준은 하늘처럼 높은 대표님이었다. 그 역시 광고계에서 제법 유명한 선배였고 난 까마득한 후배이자 막 광고를 시작한 새내기였으니까.
대표가 내 이름 따위는 모를 거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회사의 대표라면 누구보다 신입에게 관심이 먼저 간다.
회사의 미래가 걸린 인재들에게 시선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다만 팀장급처럼 격 없이 다가갈 수 없을 뿐이다. 그러기에 DW애드는 이미 너무 큰 회사가 되어버렸다.
“대표님! 정말 영광입니다. 이렇게 대표님 차까지 같이 타고. 아, 제가 운전을 해서 모셔야 하는데.”
“운전할래요?”
“아, 아닙니다. 아직 초보라 이런 외제 차는 못 몰아서요. 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대표님.”
“흠, 그래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당연합니다!”
신입은 큰 소리로 대답하며 신기한 듯 도혁을 계속 쳐다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DW애드 코리아에 입사한 것도, 대표님과 출장을 나가는 것도요.”
“뭘 실감까지. 편하게 지내. 우리 회사 편하지 않나?”
“네. 편하고 좋습니다. 저기, 대표님 뜬금없지만 정말 존경합니다! 제 롤 모델이세요!”
“나보다 더 잘돼야지.”
“아닙니다! 반의반이라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신 다짐하며 벙긋거리는 신입 사원의 말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최민아도 말했었지. 롤 모델. 누군가의 목표점이 된다는 건가.
목표를 향해 달리기만 했는데 묵직한 책임감이 가슴을 눌렀다.
무거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신입 사원에게 대꾸했다.
“빵이나 사러 가자. 짐승 같은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시거든.”
* * *
“짐승 같은 놈입니다.”
고석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제자 중에 TV에 나올 만한 제빵인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고석구가 뱉은 말이었다.
“이 자식, 정말 잘되어야 하는데.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그, 일상의 달인에 추천하신다고요.”
“네. 짐승이라고 하시니 기대되네요.”
그때 고석구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일단 가보면 알게 된다는 미묘한 미소.
도혁은 각오를 다지고 대전의 외곽에 위치한 베이커리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짐승이 운영하는 가게라고 하기엔 너무 귀엽고 아기자기한 곳이었다.
작은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달콤하고 고소한 빵 내음이 끼쳐왔다.
하얀 배경과 원목 가구만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가게에는 짐승도 사람도 없었다.
“계십니까?”
“…….”
“아무도 안 계세요?”
가게의 안쪽에서 앞치마에 묻은 밀가루를 털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조금 앳돼 보이고 왜소한 체격의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빵은 그쪽 트레이에 담아주세요. 곧 오후 빵이 나오는데 조금 기다리셔도 되구요.”
“네. 알겠습니다.”
도혁이 빵을 담으며 짐승이라는 사장을 찾았다.
“혹시 베이커리 대표님은 어디 계십니까?”
“네? 대표라니요? 저희 프랜차이즈 아닌데요.”
“가게 사장님이요.”
“아, 저 혼자 운영하고 있어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저분이 짐승? 혼돈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운데 여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캥거루 제과점.]
“혹시 케이크 제작 때문에 그러신 거면 미리 전화 주시면 되세요.”
“아, 성함이 캥거루는 아니죠?”
“네? 어머, 재밌는 분이네요. 당연히 제과점 이름이죠. 아, 혹시 고석구 선생님이 보내신 분 아니세요? 광고 회사 대표시라고…….”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속았구만. 짐승 같다더니 캥거루를 말한 건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려는데 주방 안쪽에서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걸어 나왔다.
“엄마. 이 아저씨는 누구예요?”
“할아버지가 보낸 분이야. 거기서 잠깐 색칠 놀이 하고 있어. 알겠지?”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가더니 매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베이커리 사장이 도혁에게 자리를 권했다.
“고 선생께서 저한테 장난을 치셨습니다. 대전에 짐승 같은 놈을 소개한다고 하셨는데 아름다운 여자분이 나오셔서 놀랐어요.”
“선생님 만날 그러세요. 하루 종일 아이 데리고 다닌다고 캥거루라고 별명을 지어주셔서 제과점 이름도 캥거루로 해버렸죠. 제 정체성이기도 하고.”
“아, 그러시군요.”
이것이 워킹맘의 비애인가.
한창 손이 많이 갈 나이인데 종일 매장에서 아이를 돌보며 빵을 만드는 일이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대단하시네요. 육아하기도 벅차실 텐데 매장도 혼자 운영하시는 거죠?”
“네. 사람까지 쓰긴 부담스러우니까요. 매장 오픈할 때 선생님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주방 세팅부터 인테리어까지 일일이 신경 써주시고.”
“제일 실력이 좋고 애착이 가는 제자라고 하시던데요? 제일 먼저 추천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쓰이는 거겠죠.”
사연이 있는 듯한 여자의 표정이 쓸쓸했다.
도혁은 더 묻지 않고 기획서를 꺼냈다.
“찾아뵌 건 다름 아니라 저희가 동네 빵집 연합을 만들어 광고하려고 합니다.”
“네. 들었어요. 정말 좋은 일 하시네요. 우리 동네도 프랜차이즈가 두 개나 생겨서 고전 중이거든요.”
“네. 조만간 고석구 대표님과 몇몇 연합에 참가한 대표님들을 모시고 정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겠지만 캥거루 사장님께서는 조금 더 협조해 주셨으면 해서요.”
도혁이 일상의 달인 관련 페이지를 펼쳐 설명했다.
귀 기울여 듣던 캥거루 사장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어머! 그럼 제가 이 프로그램에 나가는 거예요?”
“고석구 대표님이 추천 주셔서 섭외해 볼 예정입니다. 방송국과는 조율 중이구요. 혹시 대표 상품이나 특이 사항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비법이 있으면 더 좋구요.”
“말로 하기보다 직접 드셔보시겠어요? 아마 지금쯤 다 구워졌을 거예요.”
빵 얘기가 나오자 사장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벌떡 일어나 빵을 가져왔다.
갓 구워낸 빵의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도혁과 신입 사원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엄마! 나도!!!”
“이리 와서 같이 먹자. 꼬마야 이쪽으로 와!”
사장이 아이와 사이좋게 빵을 나누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굉장히 맛있네요. 제가 초딩 입맛이라서 예민한데 부드럽고 부담이 없어요.”
“소화도 잘될 거예요. 쌀로 만든 빵이라 글루텐이 거의 없어요.”
“글루텐 프리라구요?”
10년 뒤로 타임워프 돼서 넘어왔나? 이런 빵이 나올 때가 아닌데?
도혁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사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빵 자랑을 했다.
“우리 연주 덕분에 특허를 낸 거예요. 저쪽 벽에 특허증 보이시죠?”
“특허까지 내셨다구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아이가 아토피가 있어서 어린이집도 못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 종일 매장에 있다 보니까 왜, 빵 냄새라는 게 맡고 있을 수만은 없는 마력이 있잖아요.”
“그렇죠. 어른도 참기가 어려운걸요.”
“애가 너무 먹고 싶어 하는데 밀가루는 먹일 수가 없고, 고민을 하다가 글루텐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쌀빵을 개발했어요. 쌀로 만들어서 소화도 잘되구요.”
“직접이요? 연구를 엄청 하셔야 했을 텐데.”
대기업 박사님들이 수십 명 붙어서 만들었을 법한 일을 이 작은 가게에서 해낸 건가.
사장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딸 먹을 건데 엄마가 그 정도도 못하겠어요. 엄마가 만든 빵 먹고 애가 밤새 긁고 있어봐요. 눈에서 피눈물이 나지.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엄마니까 할 수 있다는 거군요. 엄마니까!”
‘이거다.’ 듣는 순간 대박의 기운이 밀려왔다. 광고쟁이로서의 촉이라고나 할까.
도혁과 신입 사원이 동시에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