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91화 (191/252)

광고 천재 명도혁 191화

반전은 없었다.

땀 흘리던 조덕현이 물러나고 이정민 국장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애초에 조덕현이 프레젠터로 나온 대일기획에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첫 번째 발표를 통해 광고주의 성향을 볼 수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곧바로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구만.’

광고 전략을 떠나 발표만큼은 자신감 넘치게 떠들어대던 조덕현이었다. 광고주는 PT 베테랑인 그조차 감당하기 힘들 만큼 질문을 쏟아냈다.

도혁은 미리 준비해 둔 예상 질문지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복기하며 이정민 국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큰 소리로 광고주를 보며 인사했다. 우렁차고 분명한 발음, 묘하게 설득력 있는 음성이 이정민 국장의 장점이었다.

[Fly to the World.]

태강애드의 명제가 화면 위에 한 글자씩 찍혔다. 두 번째 발표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감성의 시대입니다. 또한 여행이 국민 여가 활동으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상을 떠나 즐기는 해외여행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정민 국장이 여가 생활에 관한 통계 자료와 연령별 소비자 선호도 증가 추이 등 보조 자료를 제시했다.

“여행과 젊음, 여가, 휴식이라는 키워드를 모아 저희는 ‘설렘’이라는 컨셉을 도출했습니다. 출장이든 여행이든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느낌을 살려 감성적으로 소구할 예정입니다. 이는 20대부터 40대까지 혹은 그 이상의 연령에서도 젊고 활동적인 여가 생활을 즐기려는 움직임에서 기인합니다.”

“여행은 설렌다라. 흠, 계속하시죠.”

광고주는 미간을 좁힌 채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일단은 무난히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정민이 기존 에어라인 광고와 세계의 항공사 캠페인을 모아 보여주었다.

“보시다시피 에어라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최고의 서비스, 승무원의 미소 등에 편승한 광고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항공사의 기본 요건인 빠르고 안전한 수송 수단을 넘어 가장 친절한 서비스를 선보인다는 부분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천편일률적인 광고로 주목을 끌지 못하고 올드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번 더 광고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곧바로 마이크를 붙잡더니 이정민 국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기존 우리 광고도 올드하다는 의미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에어라인의 서비스를 강조한 모델 전략은 한국 광고계의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또 다른 획을 그을 때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날카롭게 주시하는 가는 실눈과 매서운 질문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이정민 국장은 당황하지 않고 발표를 이어갔다.

‘긴장한 표시가 정말 안 나는구나. 역시 이 국장님, 베테랑 프레젠터답다.’

조덕현도 경력이라면 지지 않았지만 훨씬 안정감이 느껴지는 발표였다.

“이에 저희는 항공사만이 할 수 있는 새롭고 감성적인 광고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발상의 시점을 전환하여 소비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선사합니다. 그럼 바로 광고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만나는 자유, 유럽 편.

인쇄 광고 시안에서는 배낭여행을 처음 온 대학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배낭을 멘 대학생이 에펠탑 앞에 서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학생의 하단에 처음 만나는 자유, 유럽이라는 카피가 새겨져 있다.

유럽에 도착해 처음 느끼는 설렘을 깔끔한 컷으로 담았다.

모델의 표정에서 여행의 가슴 벅찬 감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원한 구도와 완성도 있는 샘플 시안이 펼쳐지자 광고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정민이 곧바로 B안으로 넘어갔다.

“다음 두 번째 시안입니다. 미국 편입니다.”

-새로운 도전의 설렘, 미국 편.

젊은 남자가 맨하튼의 한가운데에 선 채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 모습을 하단 카메라에서 비스듬하게 찍어내었다. 화려한 맨해튼의 도심 속에서 우뚝 선 모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독특한 구도로 도시의 활력을 강조한 세련된 시안이었다.

곧 한 줄 카피가 하단에 펼쳐졌다.

[새로운 도전의 설렘을 응원합니다. 에어라인 항공사.]

“이번엔 미국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이번 미국 편에서는 단순 여행보다는 출장이나 어학연수 등 비즈니스 및 자기 계발을 위해 떠나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소구해 보았습니다. 또한 최근 미국 직항의 개설을 알리는 자막을 하단에 추가했습니다.”

광고주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며 이정민의 발표를 주시했다.

“마지막으로 휴식 편입니다. 함께 보시죠.”

인쇄 광고 시안만 있었던 2안과 달리 3안은 영상물이었다.

-바다가 부르다. 동남아 편.

푸르게 펼쳐진 광활한 바다 위를 나는 비행기의 모습과 동남아 휴양지의 모습이 아름다운 화면으로 이어졌다. 영상미가 돋보이는 가운데 한 줄의 카피만이 깔끔하게 보였다.

[어느 날 바다가 불렀다. 어서 오라고.

에어라인 항공사.]

DW 애드에서 준비한 광고와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지만 아주 좋은 광고 세 편이었다.

무엇보다 서비스가 아닌 여행지로 시점을 달리한 발상 전환이 돋보이는 훌륭한 캠페인이다.

‘역시 아버지가 다르긴 다르구만.’

대표도 없이 힘들게 태강애드를 꾸려가고 있을 텐데 저력이 돋보이는 태강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면도 있었다.

“잘 봤습니다. 완성도도 있고 영상미가 좋네요. 그런데 몇 가지 물어봅시다.”

광고주는 의외로 짧게 칭찬하곤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도혁이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었다.

“서비스에서 여행지로 발상을 전환한 점은 높게 삽니다. 하지만 여행지가 중심이 되면 우리 항공사로서 불리하게 작용하는 점은 없겠습니까?”

“지금까지 여행지를 중점적으로 소개한 광고가 없었습니다. 캠페인의 소구점을 선점함으로써 분명히 소비자들에게 친근하면서도 설레는 캠페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흠, 확실히 광고 자체의 퀄리티는 좋습니다.”

“특히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직항로를 넓힌 점이 주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점 조금 더 강조해서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잘 봤습니다.”

역시 광고주는 예리하게 찜찜한 부분을 짚어냈다.

여행지가 중심이 되면 남 좋은 일을 시킬 수 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비행기는 1위 기업이 훨씬 더 많거든.

죽을 열심히 쒀서 개 줄 수도 있다는 소리다. 광고주가 그 부분을 확인한 거였고 태강애드는 최근 직항로 카피를 보강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광고주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툭툭 책상을 두드렸다.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이어 사회자의 진행으로 이정민이 내려가고 드디어 DW애드의 차례가 되었다.

탁기준이 일어서며 도혁을 슬쩍 보았다. 도혁은 탁기준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짧은 미소로 그를 격려했다.

심호흡한 탁기준이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DW애드 코리아 탁기준이라고 합니다.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시간 PT가 이어지고 있으니 저희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마지막 발표자의 숙명은 지겨움을 타파하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데다 오늘처럼 휴식 시간조차 없는 날은 더욱 그렇다.

이럴 때 SWOT이니, 환경 분석이니 들이대 봤자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사실 기업 분석은 광고주가 더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고.

평소 반복된 자사 분석으로 짚어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포인트 정도만 잡아주면 충분하다.

‘결국 광고주가 보고 싶어 하는 건 광고 시안이지. 분석은 중간중간 끼워 넣어서 설명하면 그만이고.’

탁기준이 의도적으로 분석 화면을 빠르게 넘겨 버렸다. 그게 오히려 더 만족감과 주목도를 높였다.

순간 화면에서 전서윤의 얼굴이 잡혔다. 광고주가 저도 모르게 탁기준을 저지했다.

“잠깐만요.”

“네. 저도 여기서 멈추려고 했습니다. 보시는 장면이 저희 DW애드의 첫 번째 시안입니다.”

승무원 제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전서윤이 활짝 웃는 장면. 배경은 에어라인 항공의 기내였다.

“아! 이거!”

“아주 좋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상무님?”

광고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탁기준이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넘어간 척했던 자사 분석을 곁들여서 말이다.

“에어라인 항공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세계 탑 클래스의 서비스입니다. 이는 각종 통계와 수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탁기준이 소비자 조사 결과와 수상 내역을 구두로만 짧게 설명했다. 취항 노선으로는 비록 높은 등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규모였지만 서비스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에어라인 항공사의 기존 광고만을 놓고 봤을 때 특장점을 꼽으라면 역시 모델입니다. 7년의 전속계약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레전드 모델은 에어라인 항공사의 얼굴이자 고급스럽고 섬세한 서비스의 상징입니다.”

“저희가 배너, 포스터 설치를 못 한다니까요. 인기가 워낙 높아서 다 가져가 버립니다.”

광고주의 얼굴에서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탁기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브랜드에도 성별이 있다는 걸 아십니까?”

“브랜드 성별이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사넬과 나어키. 어떻습니까?”

“아, 느낌이 오네요. 브랜드 이미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물론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이미지가 확고하지 않은 기업도 많습니다만, 소비자의 머릿속에 자사에 관한 성별이 있다면 잘 활용하는 것도 좋은 마케팅 전략입니다.”

“저희는, 여성에 가깝겠군요.”

“맞습니다.”

한번 끄덕인 탁기준이 여성성을 강조한 브랜드의 성공 캠페인 사례를 화면에 나열했다.

“우리 에어라인 항공사 역시 여성스럽고 섬세한 서비스로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서비스에 특화되어 있는 기업의 특장점과 단아한 모델의 이미지가 시너지를 내어 소비자들에게 강인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탁기준이 다시 전서윤의 얼굴로 화면을 전환했다.

“저희는 기존의 잘 짜인 판을 엎고 싶지 않습니다. 레전드를 이어가면서 또한 강화할 것입니다. 특히 모델 전략은 대를 이어서 세기를 대표하는 에어라인의 얼굴로 계속해서 전통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충분합니다. 전서윤 배우님, 아주 좋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화면 속에서 전서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더 승무원 같네. 정말 찰떡이구만.’

전생에 스튜어디스였냐던 촬영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광고주들은 이미 광대가 끝을 모르고 승천해 있었다.

화면을 보던 탁기준이 몸을 돌려 광고주 쪽을 바라보았다.

“저희는 이 모델을 적극 활용하여 감성적인 소구를 실시할 생각입니다. 앞서 판을 엎지 않고 강화할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어떤 말씀이신지 직접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CF 1안. 세상의 모든 여행. 어머니 편.

“저희는 공간이 아니라 타깃을 공략합니다. 미국이 아닌 가족을 말이죠.”

CF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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