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90화 (190/252)

광고 천재 명도혁 190화

“이 느낌을 간과하는 건 기만입니다. 사랑합니다. 전서윤 배우님.”

“뭐?”

“뭐라고? 도무진 방금 뭐라고 했냐?”

회의실에 널브러져 있던 인원들이 벌떡벌떡 고개를 들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도무진은 노트북을 두드리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구요. 오늘부터 저의 청춘과 사랑과 정열을 모아 전서윤 배우님께 바치겠습니다.”

도무진의 야무진 한마디에 직원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도혁에게 모였다.

도혁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랑과 정열을 바치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꽃이라도 들고 찾아가지.”

“X세대답지 않게 무슨 꽃입니까? 이걸 보세요.”

MZ세대도 아니고 X세대에게 타박을 다 듣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혁이 실소하자 도무진이 방금 만든 팬카페 홈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아, 그 유명한 연예인 홈마가 되시겠다.

“우리 전서윤 배우님을 세계에서 제일 사랑받는 배우로 만들어 드릴 겁니다!”

도무진이 야심 차게 소리쳤다. 아무튼 팬심이라는 거잖아.

도혁은 이상하게 더부룩했던 속이 소화제라도 먹은 듯 편안해졌다.

홈페이지를 흘깃 쳐다본 직원들 역시 다시 흩어지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난 또 뭐라고. 너는 나이가 몇 갠데 팬질이나 하고 있냐.”

“팬클럽 운영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너 팬클럽 홈페이지에 너무 힘쓰지 마라. 말했지만 에어라인 온라인 광고가 우리 DW 셀링 포인트라고.”

“걱정 마세요. 영혼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전서윤 씨 배너 예쁘게 만드는 일에 영혼을 바친다는 거?”

“그렇죠!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뭐, 둘러 가도 계약만 따 오면 되니까.

도혁이 기획안과 콘티를 번갈아 보며 직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더 추가할 사항 없습니까? 이대로 확정해도 되겠어요?”

“오케이 합시다. 촬영도 해야 하고 매체 컨택에, 프로모션 장소도 확정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컨펌 내고 진행하도록 하죠. 참, 프레젠테이션은 누가 할지 결정하셨습니까?”

“담당 AE가 있는데 나서기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해도 될까? 차현우 국장 한번 양보해 주시죠.”

“나야 땡큐죠. 시즌 광고 들어가는 건이 많아서 어지러운데 고맙습니다요.”

탁기준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차린 차현우가 선뜻 양보해 주었다.

탁기준이 피식거리며 책상 위에 놓인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회의하면서 비행기 백 개는 만들었네. 이제 진짜 훅 날려 드려야지.”

“오랜만에 공개 경쟁 PT네요. 탁 국장님 전공이니 믿겠습니다.”

“걱정 마. 비행기 타고 미국 가게 만들어줄 테니까.”

탁기준이 느끼하게 눈을 찡긋거리자 야유가 쏟아졌다.

“아, 정말. PT 때까지만 참겠습니다. 그만하시죠.”

“왜 살 빠졌는데도 느끼하냐?”

“그러고 보니 제법 배가 들어간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무튼 에어라인 PT 끝나자마자 몸무게 재보도록 합시다. 중간 점검 해야죠.”

중간 점검이라는 말에 흡족하게 배를 두드리는 탁기준이었다. 다시 보니 딱히 살이 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 * *

하지만 경쟁 프레젠테이션 당일에는 살이 쪽 빠져 있었다. 신경을 많이 썼는지 홀쭉한 볼이 앙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나 연습했을지 안 봐도 보이는 것 같았다.

도혁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탁기준을 격려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핼쑥해지셨네요.”

“덕분에 다이어트도 하고 좋지 뭐. 덤비라 그래. 다 죽었어.”

“태강은 예상대로 이정민 국장님이, 대일은 조덕현 국장이 나온다고 합니다.”

“둘 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구만. 출발합시다.”

웃음기를 거둔 탁기준의 눈빛이 매서웠다.

공개 PT장에 도착해서 인사를 나눌 땐 더 날카로워졌다.

탁기준이 벼린 칼날처럼 날이 선 눈초리로 타 대행사 발표자들과 악수했다.

“오랜만입니다. 이 국장님, 잘되라는 기원은 못 드리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잘되라고 기도는 못 해주겠어. 그나저나 TV에 나오더니 둘 다 신수가 훤해졌구만. 태강에서 나가니까 그렇게 좋았어?”

“아무렴요. 국장님은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으십니다.”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는 걸 느낀 도혁이 김철준 대표의 안부를 물었다.

“김철준 대표님은 아직 미국에 계시는 거죠? 이 국장님이 고생 많으시겠습니다.”

“그렇지. 제법 자리 잡았다고 들었어. 세계로 뻗어가는 우리 태강애드를 이길 수 있겠나?”

덕담을 해도 도발을 하는구만.

역시 칼만 안 들었지 전쟁터와 다름없는 경쟁 프레젠테이션다웠다.

그리고 전쟁터라는 걸 강조라도 하듯이 조덕현이 나타났다.

같이 다니던 빌런 최철우는 뚝 떼버리고 대일기획 사람들과 함께였다.

조덕현이 번들번들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로 다가왔다.

“어이구 유명 인사시네요. 명도혁 대표님,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잘 지내셨습니까?”

“어이, 우리 대일 직원들 인사하지. 이쪽은 내 밑에서 인턴하던 명도혁 대표. 여기는 탁기준이.”

아래 직원인 모양인데 인사를 시켜도 참, 뭐같이 소개하는구만.

역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곱씹으며 쓴웃음도 함께 씹었다.

반면 소개를 받은 대일기획 직원들은 도혁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도혁 대표님! 칸 광고제 수상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저 현지에서 라이브로 봤어요.”

“저도요. 저희 둘 칸 광고제 당시에 출장 가서 직접 봤습니다. 강의도 들었어요. 정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조덕현의 눈이 가늘어지며 대일기획 직원들을 노려보았다.

PT에 와서 상대편 대행사 대표를 칭찬하는 모습이 떨떠름했는지 얼른 자리를 떠버렸다.

“그럼 있다가 봅시다. 너네 둘은 따라와!”

“애들 너무 혼내지 마세요. 조덕현 국장님. 명도혁 대표가 워낙 요즘 핫하잖습니까. 광고 시작하는 친구들한테는 우상이나 마찬가지라고요.”

탁기준이 약 올리듯 부연하자 조덕현이 콧김을 뿜으며 사라졌다.

그걸 본 태강애드 팀조차 웃음이 터져 버렸다.

“PT 준비하느라 웃을 일 없었는데 내가 조덕현이 때문에 웃는다. 하하.”

“다행이네요. 분위기가 좀 풀어졌으니 들어가 볼까요.”

대기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고주가 들어왔다.

비쩍 마른 체형에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마케팅 팀장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가나다 순서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일기획, 태강애드 그리고 DW애드 코리아 순입니다. 영어라서 가장 뒤 순서로 정했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상관없습니다.”

“그럼 대일기획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개 프레젠테이션으므로 경쟁사 발표도 참관 가능하십니다. 그럼 10분 후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0초 같은 10분이 쏜살같이 흐르고 결정권자로 보이는 남자가 가운데 자리에 착석했다.

가는 실눈이 인상적인 남자는 오너의 차남이자 홍보를 전담하고 있는 상무였다.

짧은 인사를 마친 상무가 신호를 보내자 사회자가 경쟁 프레젠테이션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대행사 대일기획의 대표 나와주세요.”

조덕현이 저벅저벅 걸어 나와 꾸벅 인사했다.

“대일기획의 조덕현 국장이라고 합니다. 자리 만들어주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저희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기획안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불이 꺼지고 화면이 커졌다.

지금까지 에어라인 항공사가 진행했던 광고와 모델의 모습이 하나둘 스치듯 지나갔다. 마지막 모델의 얼굴에서 화면이 정지했다.

“지금 보시는 모델은 무려 7년 동안 함께했던 에어라인 항공사의 대표 얼굴입니다. 현재 에어라인의 긍정적 이미지에 가장 크게 기여한 모델입니다.”

조덕현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갑자기 그녀의 얼굴 위에 크게 엑스가 그려졌다.

‘충격을 주려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사람 얼굴에, 그것도 항공사를 대표하는 모델한테 너무한데?’

광고주도 과하다고 느꼈는지 잠깐 미간을 좁혔다. 조덕현은 예상했다는 듯이 설명을 이어갔다.

“에어라인 항공사는 창사 이래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습니다. 리즈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런 때에 좀 더 박차를 가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시장 1위를 공략해야 합니다.”

1위인 경쟁사를 밟음으로써 후발 주자가 부각되는 광고. 숱한 마케터들이 시도하는 캠페인이다. 물론 도혁도 자주 쓰는 방식이었다. 다만.

도혁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조덕현의 발표에 귀 기울였다.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선발 주자를 뛰어넘는 광고로 승부를 볼 때입니다. 도발을 넘어 기발한 캠페인으로 승부를 던져야 합니다. 우리 에어라인이 가진 차별점을 정리해 봤습니다.”

조덕현이 장황하게 SWOT분석 자료를 설명하더니 차별점으로 서비스를 내놓았다.

“소비자들은 에어라인 항공사의 세심한 서비스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를 강점으로 삼아 우리는 올라갈 곳이 있는 2등이라는 컨셉을 뽑아보았습니다.”

화면에서는 ‘우리는 2등입니다. 하지만 1등입니다’라는 카피가 한 글자씩 찍히고 있었다.

[우리는 2등입니다. 하지만 서비스만큼은 1등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비스를 하늘 위에서 만나보세요.

드높은 아름다움을 세계로. 에어라인 항공.]

2등이라는 후발 주자의 단점을 전면에 곧바로 내세운 광고였다.

도혁과 탁기준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탁기준이 한번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여긴 제쳤다는 신호였다.

DW애드에서도 아이데이션 회의 때 2위 전략에 관해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시장성이 견고하고 기술력의 차이도 있었기에 오히려 전면에 내세워 충격을 주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다각도로 분석한 결과 효과가 미미할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지금 광고주의 단호한 얼굴을 보면 천만다행이었다.

상무가 제 앞에 놓인 마이크를 당기며 물었다.

“발표 중에 끊어서 죄송한데 2위 전략으로 우리가 얻는 게 뭡니까.”

“해외에서도 성공 사례가 제법 많습니다. 올라갈 곳이 있다는 점과 서비스라는 차별점을 바탕으로 프로모션을 강화하고…….”

“외국 얘기는 하지 마시구요. 다른 제품군이랑 비교할 수가 없지요. 대한민국에 항공사라고는 달랑 두 개뿐인데 꼴찌라고 광고하자는 겁니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세간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가장 센 놈을 때리라는 마케팅 속언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드리지만 2위 전략의 강점은 가장 강력한 경쟁사를 겨냥함으로써…….”

2위 전략은 커피 시장처럼 다자구조에서 시장에 처음 뛰어들 때조차 아주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전략이다.

오늘유업이 별다방을 때렸듯이 항공사를 때려잡기는 쉽지 않을 텐데. 무엇보다 기존의 단정한 기업 이미지와 간극이 너무 컸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광고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니까 지금 말한 카피가 우리 회사랑 어울리는 것 같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무대 앞에서는 조덕현이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었다.

점점 흥미를 더해가는 PT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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