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89화
전쟁이다.
한동안 단독 PT의 비중이 높았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붙었다.
다음 날 아침, 회의실에 모인 에어라인 전담 팀원들의 표정이 비장했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에 도혁이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무진아, 좀 웃어라. 진짜 전쟁이라도 나가는 것 같네.”
“전쟁 아닙니까! 다 들었습니다. 이번에 경쟁하는 대행사가 우리 그, 뭐냐 조상님들이라면서요.”
“그렇지. 할아버님, 아버님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십니다만, 세대가 달라졌다는 걸 알려 드려야겠지?”
“각오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대표님. 맡겨만 주십시오!”
쉬이 풀리지 않는 군기가 잔뜩 들었다. 도혁이 피식거리며 항공권을 흔들어 보였다.
“이번 PT는 항공사인 만큼 비행기 티켓을 상품으로 걸도록 하지. 가고 싶은 여행지 왕복항공권에 휴가까지, 어때?”
“대표님, 정말입니까? 오! 의욕이 불끈거리는데요?”
“나도 조상님들한테 지기는 싫거든. 야심 차게 독립했는데 자존심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
도혁의 말에 차현우가 끄덕이며 대꾸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저쪽에서도 사활을 걸고 나올 게 분명하니까. 명 대표가 이정민 팀장, 아니지, 지금 기획국장님 밑에서 일했다면서.”
“무려 인턴이었죠.”
“잠깐 회의 스톱! 진짜 이정민 국장 밑에서 제대로 일해본 놈 여기 들어갑니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탁기준이 들어왔다.
“PT 소식 들었어. 이 재밌는 판에 내가 빠지면 서운하지.”
“탁 국장님까지 에어라인팀에 들어오신다구요? 여력이 되시겠어요? 진행 중인 프로젝트 많지 않으십니까?”
“차 국장은 뭐 없나? 할 수 있어. 아니,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지. 이정민 국장 이겨먹을 기횐데.”
“흠,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서브라도 꼭 참여하게 해줘. 내가 이정민 국장한테 쌓인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탁기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당시의 고통을 상기했다.
“내가 워낙 유능하다 보니, 뭐 알다시피 김철준 대표님이 나를 좀 많이 챙기셨잖아? 그거 엄청 싫어했어. 중간보고 제대로 안 한다고 갈구고 PT 따 와도 지랄하고. 으.”
“대표님 직계 라인이라 미움받으셨군요.”
“내가 잘나서 그런 걸 나보고 어쩌라고? 잘나간 죄밖에 없다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인 탁기준이 주먹으로 책상을 꽝 내리찍었다.
“이참에 다 밟아주겠어.”
“밟기까지……. 그냥 이기시면 됩니다.”
“그게 그거지. 이제 세대가 바뀌었다는 걸 손수 알려 드려야지. 안 그래, 명 대표?”
“뭐, 그러시죠. 포부는 좋습니다.”
오랜만에 미친개의 광기를 선보이며 탁기준까지 팀에 가세했다.
든든한 지원군으로 힘을 얻은 차현우가 회의를 시작했다.
“에어라인 항공사에 대한 브리핑 자료는 각자 메일로 받아보셨을 겁니다. 탁기준 국장님은 여기 테이블에 놓인 자료 참고하시구요. 브레인스토밍으로 시작할 테니 자유롭게 의견 말씀해 주세요.”
“자료 뒤에 A안 기획도 붙어 있던데 전서윤 씨 적극 찬성입니다!”
“이건가? 와우.”
탁기준이 제복을 합성한 전서윤의 사진을 보고 감탄했다.
“대충 합성한 사진도 이 정도라면 뭐. 게임 끝났지. 차 국장님, 광고주가 예전 모델 그만둔 거 많이 아쉬워하죠?”
“맞아요. 오늘 첫 회의신데 바로 아시네요.”
“나도 아쉬울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도면 국민 승무원 아닌가?”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부연했다.
“이제 우리 전서윤 씨가 뒤를 이을 겁니다. 솔직히 에어라인 항공사에 못 팔면 대한라인에 마케팅 제안 넣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헤이!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린 절대 질 수가 없다니까? 무조건 에어라인 따 올 거라고!”
다시 눈빛을 불태우며 탁기준이 덤벼들었다.
“그래서 A안 그림은 확정이고, 디테일은 어떻게 갈 건가. 슬로건도 갈아타야지.”
“그럼요. 다만 A안은 기존 광고의 틀에서 크게 바꾸진 않을 거예요. 워낙 성공한 캠페인이라 이미지를 버릴 필요가 없어요. 우린 거기에 우리의 색깔을 더할 뿐입니다.”
“B안으로 말이지?”
“그렇습니다. A안의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스토리 있는 광고를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기존 광고의 고급스럽고 단정한 이미지에 여행이라는 스토리를 더하는 거죠.”
“좋아. 각자 자유롭게 의견 내보도록 하지.”
며칠 밤을 꼬박 새운 회의실에는 결국 야전침대까지 들어왔다.
전쟁 직전의 처참한 아이데이션 현장이었다.
* * *
“세상에! 에어라인 팀 폐인 모드라고 듣기는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니.”
“저쪽에 수염 안 깎고 바닥에 누워계신 분 강태오 국장님 아니고 차현우 국장님인 거지?”
막 출근한 한수철과 최민아가 기겁을 했다.
깔끔하고 상큼한 모습의 둘이 회의실 문을 열곤 코끝을 붙잡았다.
“어! 사람 같은 사람이다. 저기요……. 물 좀…… 물 좀 주세요.”
“미치겠다. 커피를 얼마나 마신 거야. 여러분 카페인만 이렇게 들입다 마시면 탈수가 온다고요!”
한수철이 테이블 위의 쓰레기를 정리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민아가 브로슈어로 얼굴을 가린 채 야전침대에 누워 있는 탁기준을 툭툭 건드려 깨웠다.
“국장님, 설마 돌아가신 건, 아니죠?”
“어디를 돌아가! 직항이야. 에어라인은 직항이라고!”
“탁 국장님 정신 차리세요…….”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오랜만에 전투심으로 몸을 활활 불태운 팀원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막 샤워를 마치고 회의실로 돌아온 도무진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분들 미쳤어요. 저도 어지간히 또라인데 와우, 정말 우리 임원님들 다시 봤습니다.”
“아휴, 내가 이 팀에 들어왔어야 했는데. 여유가 조금만 있었어도 들어와서 말려봤겠구만.”
“아니요. 최 팀장님도 못 말려요. 조상님들 묻어버리겠다고 얼마나 벼르고들 있는지 몰라요.”
“아니, 여러분이 먼저 조상님 되시겠다구요. 이러다가 다 죽어!”
“죽긴 누가 죽어. 죽더라도 PT는 따고 죽어야지.”
소란한 틈에 도혁이 일어났다. 맨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수건을 목에 걸었다.
“씻고 올 테니까 민아 팀장이 다 깨워놓고 대기하라고 전해. 다시 회의 시작한다.”
“젊네. 아직 젊어 명 대표. 나도 이제 이렇게는 못 하겠구만.”
놀랍게도 사무실에서 제일 멀쩡한 모습으로 강태오가 나타났다. 패잔병들을 하나둘 깨우더니 입속에 피로 회복제를 쏙쏙 넣어주었다.
“만 원짜리야. 큰맘 먹고 사 온 거라고.”
“이야, 역시 재벌집 도련님!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
“먹고 또 쓰러지라고 사 온 거니까 많이 먹어라.”
“이 자식, 죽여달라고 용을 쓰는구나.”
입만 겨우 살아 있는 차현우가 자양강장제를 삼키며 일어섰다.
강태오가 혀를 끌끌차더니 진행 상황을 물었다.
“어떻게, 제작 들어갈 정도로 진도는 뺐냐? A안 화보 촬영은 오전에 진행한다던데.”
“그래 일단 A안 촬영이라도 제대로 나와야 줘야 할 텐데.”
“그래. 그거 걸어놓고 힘 팍팍 내라. 아우, 이 폐인들아.”
세상 둘도 없는 폐인 강태오에게 폐인 소리를 듣고서야 다들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몇 살 어리다고 도혁과 도무진이 그나마 체력을 먼저 회복했다.
꼼짝도 못 하겠다는 국장 둘은 회의실에 남겨두고 둘이 화보 촬영장으로 향했다.
도혁이 이동 중에도 이것저것 체크를 하고 있었다. 곁에서 운전하던 도무진이 혀를 내둘렀다.
“혹시 태강애드랑 원수지고 나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목숨들을 거세요.”
“아름답게 헤어졌어. 그래도 헤어진 건 사실이니까 서로 자존심 상하기 싫은 거지.”
“살벌한 이별이네요.”
“진검으로 승부하는 게 이별에 대한 예의라고.”
“흠,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그 감각은 몰라도 되고, 촬영 포인트는 잘 알아야지. 이번엔 인터넷 배너광고에 집중할 생각이니까 온라인에 앉혔을 때 그림 생각하면서 촬영팀에 요구해. 나중에 사진을 잘랐는데 이상하네 어쩌네 하지 말고.”
“넵! 명심하겠습니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촬영장에 들어섰다.
그러곤 기획안을 넘기던 손길이 뚝 멎었다.
촬영장에 진짜 비행기 천사가 강림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승무원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전서윤이 보였다.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미소 짓는데 조명이 켜지는 듯 주변이 화사해졌다.
“와……. 대표님. 와…….”
“…….”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와. 말이 안 나오는데요.”
“내가 잘못했네.”
“네?”
“저런 분에게 게임 좀 팔아보겠다고 문어 따위를 시키다니.”
“최근 TT 광고에선 아줌마 역할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팩트로 후려치면서도 도무진이 감탄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 너무,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우시네요.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우아하고 청초하고 단아하고 고상하고 혼자 다 하는데요?”
“무진아 넘을 것 같지 않냐?”
“이전 모델 말씀이시죠? 네. 레전드를 넘을 수도 있겠습니다. 넘사벽이세요.”
드디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촬영감독 역시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연신 오케이를 외쳐댔다.
“서윤 씨 전생에 승무원이었나 봐?”
“칭찬이신 거죠?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런데 이 컷은 다시 가고 싶어요.”
“왜, 예술이구만. 지금 딱 좋은데?”
“제가 만족이 안 돼서요. 부탁드려요.”
“오케이. 두어 번 더 찍고 베스트 컷으로 갑시다!”
전서윤은 모두가 칭찬하는 와중에도 완벽을 추구하고 있었다. 저 강박이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지만 전서윤을 아주 오랫동안 괴롭혔다.
도혁은 꼼꼼히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전서윤에게 다가가 긴장을 풀어주었다.
“우리 똑똑한 서윤 씨가 모르는 게 있어요.”
“어머, 대표님 언제 오셨어요! 인사도 안 하고 타박부터 하시는 거예요? 이 컷부터 좀 봐주세요. 표정이 너무 딱딱하지 않아요?”
“전혀요. 서윤 씨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아름다움을 가졌는지 모르고 있어요.”
“놀라라.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시면 당황스럽다구요.”
“그리고 충분하니까 내려놔도 된다는 것도 모르죠. 정말 충분히 예뻐요. 훌륭한 컷입니다. 사무실에 걸어놓고 두고두고 죽을 때까지 보고 싶을 만큼.”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전서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아니네. 지금 표정이 더 좋잖아?
사람을 무장해제시킬 것 같은 그녀의 미소에 몸이 굳어버릴 정도였다.
도혁의 입에서 염치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저기. 서윤 씨. 방금 그 표정 말입니다.”
“지금 제 얼굴이 더 마음에 드시는 거죠?”
“어떻게 알았어요?”
“진심이 담긴 미소였으니까요. 방금 느낌 왔어요. 도혁 씨 그 자리에서 딱 대기하고 있어요. 감독님. 한 컷만 더 갈게요!”
다시 조명 아래로 번지는 그녀의 미소가 눈부셨다.
시야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전서윤만 남아 반짝거렸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심장에서 무언가가 함께 터지며 욱신거렸다.
거부할 수 없는 직감이 밀려왔다.
‘이 감각을 무시하는 건 기만이지.’
이겼다!
도혁은 승리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