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88화
대형 자본과 동네 상권.
프랜차이즈 사업의 큰 화두로, 가끔은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지는 쟁점이었다.
체급이 다르기에 공정하지 못한 싸움 같지만, 규제를 강화하면 시장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큰 틀이 흔들린다. 시점과 입장에 따라 선악이 없는 싸움이다.
결국 프랜차이즈 가맹 업주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소상공인이니까.
이진우와 함께 빈손으로 돌아온 도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표님. 어떡하죠. 빵을 못 샀습니다.”
“빵이 문제가 아니라, 아니, 문제인가.”
도혁이 목덜미를 주무르자 이번엔 이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프랜차이즈 브랜드 때문에 동네 빵집이 사라져 버린 거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시 프랜차이즈 빵 먹어봤어?”
“네. 제 입맛이 굉장히 대중적인 편인데 확실히 맛은 있습니다. 평균을 내자면 80점 이상의 빵이었어요.”
“대중적인 입맛에 맞춰서 전체적으로 괜찮은 품질을 뽑아내는 게 프랜차이즈의 장점이지. 대신 개성은 없어.”
“양산 빵에서 개성을 찾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진우는 양산 빵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프랜차이즈 빵이 양산품은 아니다. 물론 일부 제품은 양산으로 들어가지만 매장에서 직접 만드는 빵도 제법 있었다.
사실 양산과 제빵을 적절히 섞은 점이 프랜차이즈 빵의 주요한 성공의 포인트였다. 물론 프랜차이즈끼리도 경쟁이 어마어마했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로 털보 아저씨네 유기농 식빵을 사지 못한 입맛은 씁쓰름했다.
둘이 빈손으로 허탈하게 앉아 있는데 차현우가 들이닥쳤다.
“한참 찾았어. 명 대표, 외부 나갔었던 거야?”
“아, 항공사 때문에 그러시죠? 회의 시작합시다. 직원들은 놀아도 임원급은 일해야죠.”
도혁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자 차현우가 둘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좋은 날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닙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좀 있어서요. 이 팀장은 나중에 따로 얘기 좀 하자.”
이진우를 돌려세우고 차현우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뱉었다.
“자본의 힘에는 어떤 책임이 따르는가. 어떻게 보십니까.”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이야. 강의 준비라도 하는 거?”
“흠. 속도 갑갑한데 선배. 우리 아이데이션하러 밖으로 나갈까요?”
“오늘 우리 대표님 이상하시네. 어디 가려고.”
“공항이요.”
* * *
“이야, 인천공항 으리으리하구만!”
“우리가 좀 의리가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취!”
인천공항의 2층 베이커리 카페에서 나란히 차현우와 나란히 앉았다. 최민아가 들었으면 소스라쳤을 아재 개그를 해대며 공항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녀본 공항 중 인천공항이 제일 좋습니다. 편의 시설 풍부하고 규모도 크고요.”
“해외 많이 다녀봤나 봐? 명 대표, 그럴 틈이 있었나?”
참, 제대하고 줄곧 인턴에 사업까지 이어서 쭉 일만 했었지. 해외여행의 기억은 거의 전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도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어릴 때 많이 다녔어요.”
“부잣집 도련님이셨구만. 난 알다시피 길바닥 출신이라.”
“길바닥이라니요. 노가다 며칠이나 하셨다고 출신을 논하십니까?”
“네가 노가다 판의 애환을 아냐?”
차현우가 장난처럼 대꾸하곤 한숨지었다.
“그래도 공항에 온 것만으로도 해외 나가는 기분 드는구만. 여행 가는 것처럼 설레고. 촌스럽지?”
“촌스럽기 짝이 없네요.”
타박처럼 대답했지만 도혁도 솔직히 공감했다.
공항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촤라락 항공편 안내판이 돌아가는 소리와 간혹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 트렁크를 들고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여행 가방을 든 사람들만의 활기가 넘친다.
통창으로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비쳐왔다.
도혁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차현우를 바라보았다.
해외 시장을 개척해 공모전마다 도장 깨고 다니던 차현우 선배였는데.
그거 사실 정말 부러웠다. 다 버리고 떠났던 패기도, 겁 없이 덤벼들어 기어코 해냈던 실력도.
도혁은 차현우에게 툭 진담 같은 농담을 던졌다.
“선배 우리 해외 진출할까? 미국이나 뭐, 칸 먹었으니까 유럽도 좋고.”
“나야 좋지. 명도혁 가면 난 무조건 따라 나간다.”
“약속했습니다. 그땐 동생이 어쩌고 핑계 대도 안 통합니다.”
“오케이. 네가 육아를 안 해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고등학교 들어가면 내가 아니라 돈이 키워. 미국 가서 돈 많이 벌어다 주면 되지.”
결혼도 안 한 사람이 애 셋은 키운 학부형 같은 소리를 하더니 갑자기 눈을 끔뻑거렸다.
제복을 입고 단정한 걸음으로 공항을 가로지르는 스튜어디스 무리를 본 것이다.
“저기 지나가시는 분들이 바로 그, 하늘을 날아다니시는 스튜어디스구만. 천사 강림인가!”
“혹시 차 국장님. 승무원을 실물로는 처음 보시는 겁니까?”
“그, 그렇지. 와, 스튜어디스 모델 오디션 왜 안 하려고 하는 거냐. 기존 광고대로 갑시다! 명도혁 대표님!”
차현우가 오디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굳이 오디션 할 필요 있어요? 그 항공사 이미지에 딱 맞는 연예인 우리랑 작업 중이잖아요.”
“아, 전서윤 씨?”
“그렇죠.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에어라인 항공사 기존 모델 실물을 본 적 있는데 분위기가 비슷해요.”
“하긴. 제복 입으면 딱이긴 하겠다. 그럼 A안은 스튜어디스로 변해 버린 전서윤으로 가는 건가?”
“일단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A안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하고 있어요. 비주얼이야 우리가 찍는데 당연히 잘 나올 거고, 카피는 제가 쓰면 그만이니까요.”
“올~ 자신감. 그럼 공항은 왜 왔냐.”
“B안 짜야 하는데 잡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는 베이커리 카페 역시 대형 프랜차이즈의 가맹점이었다. 공항의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공존과 상생. 또 잡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 다녔다.
정치인이나 입에 올릴 법한 단어를 속으로 삼키며 도혁은 일단 항공사 광고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나왔으니 그래도 뭘 좀 건지고 가야겠죠? 머리를 굴려봅시다. A안이 스탠다드하다면 우리가 제안할 항공사 광고는 조금 더 스토리 있게 진행하고 싶어요. 여행 가고 싶어서 미치는 광고를 만들고 싶은데 떠오르지 않고 뱅뱅 도네요.”
“전체 팀 회의 전에 방향은 잡아가자는 거지?”
차현우가 짧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에어라인 항공사는 제2국적기로 후발 주자이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선전하고 있어. 인지도를 높이는 이미지 광고로 크게 성공했잖아?”
“맞습니다. 그래서 광고주가 모델 전략을 고수하려는 거겠죠. 첫 모델분 인기가 워낙 높아서 배너 광고만 세워두면 훔쳐 갔다고 들었어요.”
“미모가 워낙 대단하긴 해. 난 정말 스튜어디스인 줄 알았어.”
“어르신들은 아직도 승무원인 줄 알걸요?”
“맞아. 이 급변하는 광고판에서 무려 7년 동안 전속이었다고 하더라고.”
“말씀드렸다시피 그 배우 실물이 서윤 씨랑 분위기가 비슷해요. 기존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광고주에게 그 부분 어필할 수 있겠다. 아깐 농담처럼 말했지만 광고주가 모델에 진심이더라고. 아마 우리가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져가도 모델이 마음에 안 들면 계약 못 할 느낌이었어.”
그럴 만도 했다. 에어라인 항공사는 승무원의 단아한 이미지와 환한 미소를 내세운 이미지 광고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보석 같은 모델이 돌연 결혼을 발표하며 은퇴해 버렸다. 아마 현재 광고주에게는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지상 과제일 것이다.
차현우가 전서윤의 사진들을 찾아 이리저리 승무원 제복을 합성해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명 대표 안목이 정확해. 정말 괜찮네. 전서윤 씨로 화보 만들어 가면 확실히 탐낼 것 같다.”
“서윤 씨가 있어서 든든하죠. 신뢰성이 높고 호불호가 없는 인상이에요. 사생활도 깨끗하고요.”
“이미지 소모도 적은 편이지. 우리 광고 외에는 안 하는 데다가 TV 출연도 자제하잖아. 거의 영화 위주로 작업하더라고.”
“필모그래피가 제법 괜찮아요. 작품만 좋으면 조연도 마다하지 않더라구요.”
차근차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좋은 배우였다. 사실 신비주의로 국제영화제를 거머쥘 인재인데 광고판에 끌어들여 문어까지 시켰으니 미안할 때도 많았다.
이번 기회에 광고에서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게 잘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도혁의 마음을 읽었는지 차현우가 부연했다.
“그럼 서윤 씨 촬영 날짜 잡아볼게. 그럼 일단 A안은 러프하게 아이디어 내고 넘어가자. 대충 머리에 떠오르지?”
“네. 상세안은 천천히 잡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차 국장님 머리에 있는 그림이 아마 제 머릿속에도 있을 거예요. 그려보면 똑같을걸요?”
“이런 거 보면 진우가 부러워. 여기 있었으면 바로 그려냈을 텐데.”
“그러게요. 누구나 아이디어는 낼 수 있지만 구현하는 건 다른 문제죠. 그런 면에서 진우는 정말 탁월해요. 콘티안이나 영상으로 뽑아내는 실력이 대단하죠.”
이진우 역시 자신의 팀을 꾸린 지 오래되었다.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며 차현우가 쓴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우리 머릿속에는 같은 그림이 있다 치고, B안으로 넘어가 보지.”
“그러시죠. 모델 전략과 더불어 폭발적인 시너지가 날 만한 FGI가 나와줘야 하는데요.”
“갑자기 FGI(Focus group interview)? 설문하게?”
“아니요. Fucking Great Idea요.”
“아, 맞네. 하하.”
광고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문용어이자 욕이었지만 이맘때는 쓰지 않았는지 차현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웃을 일이 아닌 게, 이 항공사는 경영난에 오래 시달린다. 거기다 곧 전 국민이 여행이 상실되는 세상에 살게 되지 않나.
어떻게든 이번 캠페인에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도혁이 조급해진 마음을 다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꽂히는 아이디어가 나와서 마케팅에 성공하면 좋겠습니다. 일단 기본 기획안은 확인했습니다. 특장점, 약점 분석 자료 읽어봤는데 셀링 포인트 잡아봤어요?”
“어. 요즘 선호도가 아주 높아. 전성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신장세를 보이고 있어.”
차현우가 막 노트북을 돌려 사전 조사 자료를 보여주려 할 때였다.
도혁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태강애드 기획국장이었다.
“이 국장님? 네. 승진 축하드립니다. 전화를 다 주시고…….”
통화를 하던 도혁이 차현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 에어라인 항공사 PT 들어오신다구요?”
“뭐야? 태강애드도 참여한다고?”
놀란 차현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되물었다.
한번 끄덕여 보인 도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 조덕현 대표요? 거기가 들어올 급이 됩니까?”
“조덕현?”
이번엔 차현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전화를 끊은 도혁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조덕현 대표가 대일기획에 들어갔다는데요? 정확히 말하면 합병했다고 하네요.”
“이런. 그럼 대일, 태강, 우리 이렇게 삼자 구도라는 거네.”
“그렇게 됐네요.”
“아버지에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PT하게 생겼구만.”
대일에서 태강이 독립했고 태강에서 DW가 나왔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아버지에 할아버지라.
도혁이 머그잔을 입술에 대고 느긋하게 등을 기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두 대행사에 친절하게 알려 드려야죠. 자식 농사 얼마나 잘 지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