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87화
인간에게서 여행을 삭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먹고 자고 숨 쉬는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겠지만 밋밋하고 심심할 거다.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고 싶은 마음 역시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리고 도혁은 감염병으로 여행이 삭제된 세상에서 왔다. 회귀했던 시점은 막 팬데믹이 시작되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무거운 마음이 가슴을 눌렀다.
도혁이 한숨지으며 마른 입술을 떼었다.
“항공사 광고는 여행에 포인트를 잡으면 어떨까 합니다. 비즈니스 여행도 여행의 일종이니까요.”
“역시 비행기는 출장으로 타더라도 기대감이 있어. 일상에서 떠나 새로운 어딘가로 향하는 것만으로 설레잖아?”
“맞아요. 그 설렘을 광고에 담고 싶은 겁니다. 참, 칸 광고제 때 진심으로 국장님과 가고 싶었는데 아쉬웠어요.”
“내가 회사에 남겠다고 한 건데 뭐. 집안일도 있었고.”
차현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도혁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음 해외 출장은 꼭 함께 가도록 하시죠. 무조건이요.”
“좋지. 항공사 광고 따서 할인받아 가자고. 에어라인 항공도 직항이 굉장히 많아.”
차현우가 회사 브로슈어를 뒤적거리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이런 말 하기 좀 쪽팔리지만 나 한 번도 해외 안 나가본 거 아냐?”
“쪽팔릴 게 뭐 있나요? 은근히 그런 사람 많을걸요? 우리 나이에 제대하고 일하면서 바쁘게 살다 보면 여유가 없죠.”
차현우뿐 아니라 팍팍하게 생업에 매달려 왔던 국민들이 이제 막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대학생들의 배낭여행과 직장인의 힐링 여행이 붐처럼 일어나던 시절. 미래를 알아서 하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때야말로 해외여행의 황금기였다.
하여 항공사, 여행사 광고가 한창 전파를 타고 있을 때였다.
도혁은 저도 모르게 다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감염병으로 여행이 삭제된 세상은 정말 답답했다. 퍽퍽한 일상에서 여행이라는 작은 이벤트조차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라니. 정말이지 야속하지 않은가.
차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웬 한숨이야. 뭐 문제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해외여행도 다니고 여유 있는 여가를 즐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구나 싶어서요.”
“그렇지 뭐. 이제 우리도 좀 살 만해지니까 여행도 다니고 하는 거지.”
십여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방역으로 발이 묶이는 시절이 오게 될 줄이야.
갈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여행 다녀야 한다고 이 사람들아.
동네 사람들 여행 좀 다니시라고 진심을 다해 홍보하고 싶어졌다.
도혁이 보드 마커를 다잡았다.
“차 국장님. 우리 당장에라도 여행 가방 싸고 싶게 제대로 된 광고 하나 뽑아봅시다. 일손 놓고 다 떠나고 싶게 만들어 버리자고요.”
“그럼 대한민국은 누가 지키냐?”
“여행 다녀온 사람들이 지키겠죠. 아무튼 일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게 만들자는 겁니다. 차 국장님 잘하실 것 같은데요?”
“포부가 좋네. 그럼 디자이너는 누구로 할까.”
“이번엔 무진이를 메인으로 가면 어떨까요? 온라인 홍보를 강화해서 배너 클릭 후 즉시 예약 시스템으로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요.”
“자유 영혼 보헤미안 도무진이랑 여행이라니. 잘 어울리는데? 그럼 도준이 스케줄 정리해서 확정할게.”
팀을 꾸린 차현우가 잠깐 메모하던 손길을 멈추고 도혁에게 물었다.
“요즘 명 대표 대리급한테 일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거, 나만 느끼는 건가?”
“제대로 보셨어요. 애들 좀 키워보려고요. 팀장급이 힘에 부치는 게 느껴져서 얼른 키워서 잡아먹을 겁니다.”
“팀장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거네. 좋은 생각이야. 조직이 점점 커지면 중간 간부들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잖아?”
“광고회사는 특히 그렇죠. 팀제로 돌아가니까요. 이번에 도준이가 혼자 하다시피 했는데 제법이더라구요. 무진이도 잘할 겁니다.”
조금 빠른 감이 있지만 도혁이 생각해 둔 일들을 차근차근 실행하려면 대리들이 빨리 성장해 줘야 한다.
차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명도혁 대표님. 또 뭔가 계획 중이시구만. 맞아?”
“뭐,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일단은 항공사 광고부터 쳐냅시다. 저한텐 개인적으로 정말 중요한 광고입니다.”
“할인받아서 여행 다니려고?”
“정확합니다.”
정말 정확하다. 동네 사람들한테 홍보만 할 게 아니라 나도 여행할 수 있는 시절에 많이 다녀야지.
그렇게 차현우, 도무진과 함께 에어라인 항공사 팀이 꾸려졌다.
* * *
1층과 2층의 공사가 끝났다.
외벽도 리모델링을 마쳐 재오픈 분위기를 내봤다.
곧 임대가 끝나는 3, 4층은 내년에 사무실로 개조할 예정이었지만 현재로서 꼭 필요한 부대시설은 갖추었다.
일찌감치 출근한 도혁은 누구보다 황도준의 반응이 궁금했다. 1층 로비에서 기다리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붙잡았다.
“이야~ 번쩍번쩍하네요. 힉! 레스토랑! 여기 우리 구내식당인 거예요?”
“맞아. 유치하지만 SYG랑 비교해서 어떠냐?”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정확한 자식. SYG에서 하고 있는 거 최대한 반영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구만.
도혁은 떨떠름하게 황도준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대박적입니다. 디자인은 우리가 한 수 위 아닙니까? 진짜 카페 같습니다!”
“진짜 카페니까. 레스토랑 겸 카페. SYG보다 좋냐?”
“네! 200퍼센트 좋습니다. 와!”
구내식당 대신 레스토랑이라고 써 붙인 간판이 번쩍거렸다.
유기농 재료로 만든 메뉴판과 식음료, 커피 머신을 번갈아 구경하던 황도준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어떤 공간입니까? 회의실인지 휴게실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요?”
“공유 사무실. 편하게 작업하고 아이데이션도 하는 장소지. 커피 가져와서 마음대로 작업하다가 회의도 하고. 우리 회의실이 좀 딱딱하잖아? 분위기가 말랑해야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까 해서.”
“저 여기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이쪽으로 자리 옮기고 싶을 정도로요.”
“황 대리 자리에서 일하다가 갑갑하면 이쪽으로 와서 일해도 돼. 인트라넷 연결되어 있으니까. 왜 장소만 옮겨도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잖아. 그럴 때 쓰라고 만든 공간이야.”
“그거 진짜 맞아요. 오히려 소음이 있어야 일이 잘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페에서 작업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데 정작 나도 주말에 카페 가보면 너무 산만하고 작업환경이 부족하더라고. 그러니까 적당히 편안하면서도 나름 일할 인프라가 갖추어진 곳에서 자유롭게 일하라는 거야.”
“커피랑 간식도 갖다 먹고 말이죠. 좋습니다!”
황도준이 공유 사무실의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노트북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만족한 그의 표정을 확인한 도혁의 속이 편안해졌다.
느긋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번엔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이진우 팀장!”
“네! 대표님 저 와서 1층 구경 중입니다. 와! 여긴 사무실과 회의실의 중간 어디쯤이네요. 신기합니다.”
“아직 놀라긴 조금 일러. 2층으로 가자.”
사실 2층 개조 작업은 PD들을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2층을 구경하고 있던 최민아가 복도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진우 팀장 보면 기절할 수도 있어요. 눈 좀 가려봐.”
“네? 도대체 어떻길래 그러십니까?”
“일단 가려보라니까요. 따따라딴 따라라라라.”
한창 유행하던 인테리어 예능 프로그램 노래를 흉내 내며 최민아가 이진우의 눈을 가렸다.
2층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이진우의 눈이 정말로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어! 여기는! 대표님!!”
“마음에 들어? 그동안 프로덕션 다닌다고 고생 많았다. 편집 편하게 하도록 해.”
“와! 이건 생각하지도 못했는데요. 감사합니다!”
외주에 가장 많이 의존했던 PD팀이었다. 설비가 완비된 편집실을 둘러보던 이진우가 감격해 얼굴이 빨개졌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나 더 있지. 여긴 PD들만의 공간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팀장이 제일 좋아할 만한 곳이지.”
도혁이 안내한 곳은 시사회실이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VIP석 기억을 떠올려 재현해 봤다.
아직 VIP룸처럼 최고급 관람 공간이 없던 시절이라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민아는 소리까지 질렀다.
“엇! 이 의자 뭐예요? 침대처럼 뒤로 눕네요. 와. 저건 팝콘 기계인가요?”
“그렇지. 광고 시사할 때마다 회의실에서 빔 내리고 불 끄고 귀찮아서 만들었어. 가끔 직원들끼리 영화도 보고 편하게 쓰면 좋겠다. 우리한텐 세상 모든 콘텐츠가 아이디어의 시발점이니까.”
“대표님 귀찮은 일 계속 생겨라. 죽을 때까지 귀찮을지어다.”
기도하는 최민아를 보고 피식거리고 있는데 이진우가 커플석을 발견했다.
“맨 뒷좌석은 두 개씩 의자가 붙어 있습니다!”
“커플석이야. 우리 회사에서 커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든 부적 같은 거라고.”
“이런다고 커플이 생기겠어요?”
최민아가 중얼거리며 벌써 팝콘 튀기고 있었다.
순간 문이 왈칵 열렸다. 직원들이 우르르 구경을 온 것이다.
“헐, 대박. 여기서 영화 보는 거?”
“애니 한정판 나온 거 죄다 가져와서 봐야겠다.”
“최 팀장님, 팝콘 추가요!”
와글와글 바뀐 사무실을 구경하고 있는 직원들을 보자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태강애드도 복지가 좋은 편이었지만 이 정도면 이제 태강 정도는 가뿐하게 넘지 않았나?
속으로 자화자찬을 하며 큰 소리로 선언했다.
“리모델링 첫날이니까 오전 근무 제쳐 버릴까?”
“네?? 근무를요?”
“이런 날 놀지 언제 놀겠습니까? 영화 볼 사람은 여기서 보시고 난 커피나 한잔하러 가겠습니다. 점심 드시고 오후에 사무실로 오세요.”
“오! 좋습니다.”
“옥상 테라스로 가셔도 좋고, 편하게 쉬세요.”
발길을 돌려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대표실로 가려는데 이진우가 쫓아왔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PD들 좋아서 날뛰는 모습 보이십니까?”
“그동안 내가 미안했지. 엄청 열악한 환경이었는데 참아줘서 고마웠어.”
“별말씀을요.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흠, 고마우면 나 좀 도와주라. 선택 장애가 와서 괴롭다.”
도혁이 이진우에게 부탁한 건 식당에 들어갈 빵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인근에 은근 입소문이 퍼진 베이커리가 있었는데 두 곳 중 한 곳을 선정할 예정이었다.
도혁은 진우를 회사 밖으로 데리고 나오며 말했다.
“저쪽 역사 뒤편으로 두 군데가 있는데 한쪽에서 납품받으려고. 우리밀이고 알러지 프리 제품이라고 들었어.”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빵은 즐겨 먹고 있습니다. 어릴 때 외국에서 살기도 했구요.”
자신만만하게 입술을 앙다물던 이진우가 눈을 끔뻑거렸다.
“저기, 대표님. 빵집이 두 군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어!”
놀랍게도 베이커리 두 곳이 모두 폐점해 버렸다. 한 곳은 벌써 가게를 헐어내 공사 중이었다.
건너편에서는 인부들이 한창 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판 이쪽으로! 하나, 둘 셋!”
도혁과 이진우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간판이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