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86화
도혁의 기억 속에서 PT 현장은 언제나 푸르스름했다.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실내와 선명한 화면을 위해 조도를 낮춘 조명이 긴장을 더했다.
터질듯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호흡을 고르는 발표자와 건조한 심사 위원들의 표정이 차갑게 교차하는 곳.
오늘 이곳에서 또 한 명의 프레젠터가 탄생할 예정이었다.
황도준의 이마에서 한 방울 땀이 흘러내렸다.
“처음엔 다 그러니까 긴장 풀고. 분명히 잘할 거야. 믿고 있으니까.”
“네. 백 번도 넘게 연습했어요. 할 수 있습니다!”
성큼 발표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황도준의 뒷모습이 든든했다. 처음 회사에 데려왔을 때 힙합 바지를 입고 랩을 하던 그가 떠올랐다.
전생에도 자유 영혼이었던 그를 홍대에서 건져왔을 때는 이 정도로 빨리 성장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변한 모습만큼 훌쩍 자란 그에게 내심 박수를 보내며 참관석에 자리를 잡았다.
PT 관계자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광고주와 사전 미팅을 하고 왔지만 가볍게 묵례를 나누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BUU치킨은 오래오래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치킨 프랜차이즈다.
DW애드의 좋은 파트너가 될 뿐 아니라 황도준에게는 성장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황도준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이크를 잡았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화면을 열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광고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후배를 도혁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돌은 비쌉니다.”
시작부터 핵심을 찔렀다. 광고주의 눈빛이 순간 형형하게 빛났다.
“좋은 그룹일수록 돈이 많이 들게 마련입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미소녀시절은 국내 굴지의 엔터사 SYG의 대표 걸 그룹입니다. 당연히 모델료가 높습니다. 하지만 투자하는 비용만큼 저희는 모델을 백분 활용할 겁니다.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말입니다.”
황도준의 말에 광고주가 미간을 좁혔다. 집중을 이끌어내는 진행이 제법 노련했다.
“기획과 시안을 확인하시고 모델료의 값어치를 하는지 판단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포스터부터 보시겠습니다.”
-BUU치킨. 미소녀시절 편.
상큼하게 미소 짓는 미소녀시절의 멤버들. 누가 봐도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차림에 귀여운 포즈가 돋보였다.
한가운데에는 팀 내에서 보컬을 맡은 센터가 치킨을 한입 베어 물고 맛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나머지 멤버들이 한 손엔 치킨을 들고 다른 손으로 다양한 크기의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치킨이 화보의 하단을 가득 메웠다.
[미소녀 시절은 BUU 치킨!
트랜스 지방 제로로 날씬하게 즐겨요!]
아이돌이 찍은 치킨 광고의 클리셰를 그대로 따른 포스터였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클리셰가 아닌 파격의 비주얼이었다.
걸 그룹의 치킨 광고는 처음이었으니까.
눈이 환해지는 소녀들의 웃음에 광고주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그 표정을 확인한 황도준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 포스터에 연결된 CF 시안 이어서 보시겠습니다. 현재 미소녀시절의 센터 이소연 양이 시트콤에 출연 중인데요, 그 시트콤을 패러디한 광고입니다.”
그녀가 출연 중인 시트콤은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의 블랙코미디였다. 귀신 가족의 이야기인데 걸 그룹 멤버 이소연은 귀신의 딸로 등장한다.
그 시트콤의 묘한 분위기에 막장 드라마를 패러디해 재구성한 광고였다.
-미소녀시절, 시트콤 패러디 편.
음침하고 어두운 실내. 한밤중의 거대한 식당에는 미소녀시절의 이소연뿐이다. 그녀가 긴 식탁 위에서 치킨을 먹고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엄마 분장을 한 미소녀시절의 다른 멤버가 다가왔다.
그러곤 시트콤 역할에 맞는 특유의 무표정한 표정으로 딸에게 물었다.
“맛있니? 그게 무슨 치킨 같니?”
“트랜스 지방 제로요.”
“뭐? 어린 네가 트랜스 지방의 맛을 어떻게 알아?”
“트랜스 지방 맛이 안 나서 안 났다고 했을 뿐인데.”
“절대 미각이라니. 넌 내 자식이 아니야!”
“그럼?”
“저기 있는 저 메이드가 네 친엄마다.”
“갑자기요? 설마 당신이 내 엄마!”
놀란 이소연이 곁에 있는 메이드에게 다가가 엄마라고 불렀다. 그러자 아빠 분장을 한 다른 멤버가 다가왔다.
“아니! 당신은 설마!”
“그래요. 내가 바로 당신의 전처예요.”
그녀가 눈 아래 점을 하나 떼어냈다. 순간 창문으로 번개가 번쩍였다.
-왜 나는 너를 만나지 못해서~~~
막장 드라마를 대표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며 막장 분위기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우리의 흡혈귀 주인공 이소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치킨을 뜯어 먹으며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강조했다.
“물보다 진한 치킨. BUU치킨. 트랜스 지방 제로는 보. 너. 스.”
엔딩까지 본 광고주가 결국 웃고 말았다.
“아, 재밌네요. 요즘 저 시트콤 잘 보고 있습니다. 심야 시간대이고 블랙 코미디인데도 묘한 매력이 있더군요.”
“즐겨 보신다면 다행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독특하고 창의적인 구성으로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청자라고 하시니 다음 이야기가 쉽게 풀리겠습니다. 모델 관련해 저희가 다음으로 제시할 기획이 바로 그 시트콤의 PPL이니까 말입니다.”
황도준이 곧바로 화면을 전환하자 익숙한 시트콤의 타이틀이 흘러나왔다.
리모컨이 움직이고 하단의 익숙한 자막이 크게 확대되어 정면을 가득 채웠다.
[위 프로그램은 간접광고를 지나치게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정말 많음 주의)]
시트콤의 세트를 비슷하게 살린 분위기. CG로 커버한 배경 앞에서 미소녀시절 이소연이 까만 드레스를 입고 연기를 펼쳤다.
다른 멤버가 메이드 복장으로 음식을 가져오고 은쟁반 위에 담긴 치킨을 본 이소연이 소리쳤다.
“아니, 이건 트랜스 지방 제로의 깨끗한 기름으로 튀긴 BUU치킨의 신제품?”
“주인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대한민국 대표 치킨 BUU의 위엄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내가 수천 년 전 원래 살던 중세 시대로 돌아간다면 이걸, 이것만큼은 꼭 가져갈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치킨, 그리고 맥주. 돌아가면 장사를 할 거야! 돌아가서 떼돈을 버는 거지. 음하하하하.”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이소연이 일어서 한 바퀴를 휙 돌았다. 그러곤 무섭게 메이드를 노려보았다.
“화면 가리니까 비켜.”
메이드가 움찔 뒤로 물러나며 화면의 한가운데 있던 BUU치킨의 배너광고를 바로잡았다.
“잘했어. 이제 광고가 제대로 보이네. 음하하하하.”
그녀의 요란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화면이 페이드 아웃되었다.
황도준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방금 보여 드린 화면은 PPL의 한 예시입니다. 프로그램 속의 과도한 PPL이 전개와 흐름을 망친다는 여론이 많습니다만 저희는 이걸 역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물론 블랙코미디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가능한 부분입니다.”
“방송사와는 합의가 된 겁니까?”
“당연히 합의 후 제안드리는 사항입니다. 대본에 자연스럽게 녹여 시청자들에게 뻔뻔하게 오히려 광고함으로써 또 하나의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상호 만족스러운 합의점을 찾았습니다.”
황도준의 말에 광고주가 끄덕이며 만족했다. 이어진 시즌 포스터에선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이번엔 민족의 명절을 설을 맞아 한복을 입은 미소녀시절의 포스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마치 걸 그룹의 컨셉 화보처럼 화사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미소녀시절의 멤버들. 파스텔 톤의 다양한 한복을 입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상큼한 교정과 잘 어우러졌다. 시즌 포스터와 더불어 다양한 굿즈가 함께 화면 위에 교차해 보였다.
“아이돌스타의 이미지를 활용한 굿즈입니다. 새해에 맞추어 한정판 달력을 증정하거나 배달 시 포스터를 동봉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멤버별 포토북을 랜덤으로 증정하는 방법도 있는데요. 팬덤 사이에서는 모든 멤버의 포토북을 사기 위해 치킨을 주문할 겁니다. BUU치킨을 먹어야만 모을 수 있는 한정판이니까요. 또한 치킨 포토북 자체가 아이돌 팬덤에서 화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포스터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광고주에게 황도준이 쐐기를 박았다.
“마지막으로 모델료 부분 설명드리겠습니다. 저희가 SYG 엔터테인먼트와 협의해 유의미한 협의점을 찾아냈습니다. 모델료를 일시 지불할 경우 부담이 되는 부분을 감안하여 초기 모델료를 낮게 책정하고 가맹점당 로얄티 형태로 지급하는 방안입니다. 물론 모델료 일시 지급도 가능하니 편하신 쪽으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초기 광고료를 낮추고 로열티를 지급한다니. 파격 제안이군요.”
“그만큼 저희 DW애드 코리아와 SYG는 자신이 있습니다. 프랜차이즈 광고는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요.”
단언하는 황도준의 눈빛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 * *
‘치킨이라니, 소원 풀었네.’
도혁이 천천히 우롱차를 우리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치킨은 도혁의 애증이 담긴 아이템이었다. 처음으로 경쟁 PT에서 졌던 아픔을 가진 광고였거든.
일주일 머리를 쥐어짜 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상대 대행사의 모델 전략에 한칼에 밀렸다.
물론 아이돌은 아니고 당대 최고의 배우를 썼지만 아무튼 모델 한 방에 처참하게 깨졌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너무 분해서 치킨 다리를 뜯어 먹으며 눈물의 소주를 마셨었지.
이번엔 아이돌 전략을 먼저 치고 들어가 시트콤까지 연결한 캠페인을 만들었다. 트렌드를 몇 년 당기며 광고 전략과 콘텐츠를 재조합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도혁은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며 머그잔을 그러잡았다.
차현우가 대표실로 들어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도준이 PT 성공했다면서. 이 자식 신나서 더 열심히 일…… 할 줄 알았더니 이 자식, 연가 썼어.”
“긴장이 풀려서 몸살처럼 아프다고 전화 받았습니다. 주말까지 푹 쉬라고 했어요.”
“아무튼 대단하다. 모델료까지 협의해서 가져올 줄이야.”
“참, 항공사 미팅은 잘 진행하셨습니까? BUU 쪽 신경 쓴다고 조금 소홀했네요.”
도혁의 말에 차현우가 자신이 진행 중인 항공사 광고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후발 주자이지만 선호도가 높고 이미지도 좋아서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어. 광고주 역시 다큐멘터리 봤다면서 우리 쪽을 크게 신뢰하고 있고.”
“다행이네요.”
“내 생각에는 이쪽이야말로 BUU처럼 모델 전략으로 나갔으면 하는데.”
역시 차현우 선배는 감이 좋다.
그 당시 항공사 광고는 스튜어디스의 이미지에 기반한 모델 전략을 최전선에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진행하면 재미가 없지.
조금 비틀어서 트렌드를 새로 만들어볼까? 대한민국에는 없던 비행기 광고로 새롭고 즐겁게. 여행처럼 설레는 광고 말이다.
도혁이 차현우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대꾸했다.
“이번엔 거꾸로 모델 전략을 버립니다.”
“모델 전략을 버린다고? 광고주는 스튜어디스 이미지에 걸맞은 여자 모델 오디션까지 생각하고 있던데?”
“그렇다면 버리지 않고 광고주가 원하는 모델 전략 기획안도 만들어드리죠. 뭐, 다만 우리가 제시할 B안도 채택될 겁니다. 광고주가 차 국장님처럼 감이 좋다면요.”
새로운 아이템의 기획 회의가 시작되었다. 차가 채 식기 전 두 남자의 머리에서 B안의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