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83화
후배의 성장을 보는 건 언제나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다.
자식이 없었지만, 있다면 이런 심정일까. 흐뭇한 마음에 광대가 솟아올랐지만 애써 끌어내리며 딱딱한 표정을 만들었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황도준에게 최선을 다해 피드백을 해줄 생각이었다.
“황도준 대리. 광고주 앞에서 PT한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평소의 장난기를 싹 거둔 황도준의 표정이 비장했다.
도혁이 고개를 끄덕여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기획안의 첫 장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걸 그룹이, 치킨 광고를?]
첫 회의에서 나온 대화를 제목으로 뽑았다.
모델 전략을 전면에 내세워 시선을 모은 좋은 시작이었다.
“지금부터 BUU 치킨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기획안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PT에 앞서 저에게 기회를 주신 명도혁 대표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올~ 제법인데?
장난스레 감탄의 말을 던질 뻔했다.
제법 프로 프레젠터 같은 첫인사로 야심 차게 PT를 시작하는 모습에 다시 광대가 승천하려 했지만 겨우 표정을 추스르고 황도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 도혁의 눈에 리모컨을 붙잡은 황도준의 손이 들어왔다.
육안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떨고 있었다.
‘하긴 첫 발표 때 정말 떨리지. 관객이라고는 임원들뿐이지만 긴장되긴 마찬가지일 거고.’
도혁이 카피로만 살다가 처음 PT 마이크를 잡았던 날을 떠올리며 황도준을 격려했다.
“편하게 물 한잔 마시고 시작할까? 너무 부담 가지진 말고. 내가 꼼꼼하게 봐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켠 황도준이 크게 심호흡했다.
마이크를 다시 잡은 그가 다부진 목소리로 본격적인 발표를 시작했다.
“걸 그룹이 치킨 광고라니. 무슨 말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기존 치킨 광고는 보시다시피 제품과 프랜차이즈 모집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황도준이 화면을 전환하자 다양한 브랜드의 치킨 프랜차이즈 광고가 펼쳐졌다.
맛있는 시즐감에 집중한 흔하고 평범한 광고들이 차례로 열거되었다.
“보시다시피 비슷한 메시지와 비주얼의 광고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 광고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꾸어도 똑같다는 겁니다.”
“바꾸어도 똑같다?”
도혁이 되묻자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황도준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메뉴도 프라이드치킨과 양념 정도로 비슷한 데다 활용한 사진의 각도, 주요 카피까지 브랜드를 바꾸어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직접 보시겠습니다.”
황도준이 파워포인트에서 브랜드명을 뚝뚝 떼어내 다른 광고에 붙였다.
“보시다시피 큰 위화감이 없습니다. 이 광고가 저 광고 같고, 저 치킨이 우리 회사 브랜드 치킨 같은 상황인 겁니다.”
광고주가 동감할 만한 포인트를 잘 짚어냈다.
도혁이 꼼꼼히 메모하며 계속 황도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번에 정확히 우리 브랜드의 이미지를 각인할 수 있는 전략이 바로 모델 전략입니다. A=B라는 단순한 방식의 각인인데요, 저관여 상품(값이 싸고 중요도가 낮은 상품군)인 치킨이야말로 이러한 전략이 잘 통하는 제품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델 전략은 좋습니다만 왜 하필 걸 그룹입니까?”
자신이 제안하고 직원에게 이유를 묻는 매정한 대표였다.
그럼에도 황도준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차분히 대답했다.
“치킨을 가장 많이 선호하고 소비하는 소비자는 학생과 젊은 직장인입니다. 특히 중고생의 치킨 피자 햄버거의 선호도는 매우 높습니다. 사회적 문제로 거론될 정도입니다.”
황도준이 신문기사와 통계 등의 보조 자료를 제시하며 청소년층의 치킨 선호를 강조했다.
[건강을 위협하는 10대들의 잘못된 식습관.]
[트랜스지방 주의보. 세 살 비만 여든 간다.]
[청소년 패스트푸드 많이 먹어 잠도 못 잔다. 트랜스지방 수면 방해 연구 결과.]
이 부분은 조금 과하다. 사회적 문제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청소년이 치킨을 선호한다는 근거를 보여주는 편이 광고주에게 편안하지 않을까?
도혁이 생각하는 순간 황도준이 치고 나왔다.
“보시다시피 청소년들이 치킨과 패스트푸드를 선호하니 정작 어른들은 걱정 일색입니다. 청소년 비만율이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그 원인을 불균형한 식생활에서 찾고 있는 것이죠. 이에 저는 이번 BUU치킨에서 선보인 신제품 Low트랜스지방 제품을 일면에 세워 캠페인을 진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Low 트랜스지방 제품이라고? 귀가 번뜩 뜨이는 단어였다.
황도준이 BUU치킨의 전단지 하단의 메뉴를 확대해 보여주었다.
그중 Low 트랜스지방이라는 글자에 포인트로 동그라미를 쳤다.
“이 메뉴는 최근 관심이 높은 청소년 건강과 비만이라는 최신 화두에 부합하며 트렌드를 선도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닭고기 자체는 고품질의 단백질 공급원이니까 말입니다. 또한 살이 찌지 않은 걸 그룹 멤버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은연중에 치킨과 비만이라는 인식의 연결고리를 차단합니다.”
황도준이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비만의 원흉에서 건강한 치킨의 시작으로 BUU브랜드는 도약할 것입니다.”
제법 괜찮은 발표였다.
도혁은 속으로 황도준의 노력을 칭찬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허를 찌를 질문을 했다.
“치킨 프랜차이즈는 제품에 대한 소구 외에도 가맹점 홍보 방안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전략이 있습니까?”
“네. 생각해 두었습니다.”
황도준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리모컨을 눌렀다.
“가맹점 사업 홍보는 프로모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점주들의 매출이 결정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아이돌을 모델로 삼은 것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계속 말씀해 보세요.”
“아이돌은 충성도 높은 청소년 팬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치킨을 주문할 때 어떻습니까? 어른들은 전단지에 적인 번호를 보고 대충 시켜본 뒤 맛이 괜찮거나 쿠폰이 쌓여간다는 이유로 브랜드를 선택합니다. 선택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만큼 큰 관심이 없죠. 반면 아이들은 치킨에 진심입니다.”
하긴. 도혁이 자랄 때도 부모님은 큰 관심이 없으셨다. 치킨 브랜드를 선택하는 건 언제나 명현진이었지.
지금보다 백 배는 더 제멋대로 굴던 여고생 시절의 명현진 얼굴을 애써 지워내며, 도혁이 화면에 집중했다.
“치킨에도 아이돌에도 진심인 청소년들에게 걸 그룹 모델 전략은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가맹점주 모집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 브랜드 충성도를 이용한 프로모션 방안을 다양하게 제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황도준이 손 빠르게 만들어 온 아이돌 스티커를 생활용품에 붙였다.
즉석에서 굿즈를 만들어 도혁에게 보여주었다.
“편의상 스티커를 제작해서 보여 드렸는데요, 실제로 굿즈를 만들게 되면 주문 제작할 거니까 지금보단 퀄리티가 훨씬 좋아질 겁니다. 달력, 텀블러 등 다양한 아이템에 BUU치킨의 로고와 아이돌의 얼굴이 박힌 홍보물을 만들고 가맹점주는 이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PT하니까 이런 장점이 있네. 스티커는 또 언제 만들었어.”
“단골 거래처에서 금방 뽑아주셨어요.”
차현우가 감탄하자 짧게 미소 지은 황도준이 다시 리모컨을 다잡았다.
“또한 그룹 팬미팅과 팬카페 등을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바이럴 마케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직장인 타깃은 어떻게 접근할 생각입니까? 청소년 위주로만 가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치킨과 맥주’, 즉 치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광고할 생각입니다. 한정판 아이돌 맥주잔을 만들고 가맹점에 붙일 포스터도 걸 그룹으로 제작하고요. 직장인들도 아이돌 좋아합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부장님들은 아닐 텐데요.”
“그분들은 삼겹살 드시겠죠. 메인 타깃에서는 제외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시겠다.
도혁과 차현우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둘 다 웃음기를 머금은 입가에 흐뭇함이 묻어났다.
도혁이 엄숙 근엄하게 유지했던 표정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도준을 격려했다.
“잘했다. 이 정도면 도준이 혼자 광고주 뚫을 수 있겠어.”
“저, 정말입니까? 대표님!!!!!”
그제야 긴장이 풀린 황도준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서 소리를 질렀다.
“아, 너무 떨렸어요. 대표님이랑 국장님 두 분만 계시는데도 이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AE분들 도대체 어떻게 매번 PT를 하시는 겁니까? 진심 존경합니다.”
“맞아. 발표라는 게 계속해도 무뎌질 뿐이지 떨리는 건 여전하더라고. 나도 우리 기획국 직원들 존경한다.”
“아, 정말이요. 리스펙입니다. 근데 저 진짜 괜찮았습니까?”
되묻는 황도준에게 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우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가운데 도혁이 다음 과제를 건넸다.
손발이 맞을 때 곧바로 밀어붙여야지.
“그럼 기획안도 어느 정도 나왔으니 광고주 미팅하고 섭외도 해 와야겠지? 유능하신 우리 황도준 AE 님?”
“네? 설마, 당장 미소녀시절을 섭외하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야. 그때 회의에서 말한 대로 손이 부족해. 맡았으니 끝까지 한번 잘해보도록.”
“대표님 그래도 광고주 컨택이라도 하고 나서 미소녀시절 섭외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미소녀시절 섭외조차 하지 않고 광고주 설득은 되겠어?”
도혁의 말에 황도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여기까진 생각을 못 해본 모양이었다.
핵심 전략이 걸 그룹 모델인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섭외다.
곧 아이돌의 격전지가 될 치킨 광고였지만 아직은 낯선 영역. 현재는 광고주에게 걸 그룹도 쉬이 오케이를 받아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광고주와 섭외 두 개의 산 중 어느 쪽을 먼저 설득하느냐가 관건인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네요. 이것 참 난감합니다.”
“아니, 답이 있어.”
방황하고 있는 어린 양에게 길을 제시해 주지.
새로운 숙제 앞에서 난감해하던 황도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도혁은 이미 웃고 있었다.
“맞춰봐. 누가 먼저일지.”
“모델 쪽이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광고주에게 최종 컨펌을 받는 편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맞아. 그런 의미에서 SYG 엔터테인먼트로 먼저 가자. 기획안 좀 더 손봐야 하니까 운전 좀 해라.”
도혁이 던진 차 열쇠를 건네받으며 황도준이 눈을 끔뻑였다.
“지금 당장 SYG로요?”
“미룰 시간이 어딨나. 퇴근 시간 전에 잠깐 들르라고 했으니까 빨리 준비해.”
“어! 그럼 섭외를 미리 해두신 겁니까?”
“사실 모델이 제일 중요하잖아? 설득에 시간이 걸릴 걸 감안해서 섭외부터 하려고 잡아둔 거야. 판 깔아 줬으니까 섭외는 담당 AE가 직접 가서 해야지.”
“담당 AE…….”
도혁의 말을 한번 곱씹은 황도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표님.”
“왜?”
“오늘 혹시 미소녀시절을 직접 만나는 겁니까?”
기대감에 부푼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