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80화
동생 명도혁이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안 건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 때였다.
꼬맹이 때부터 한 성깔 했던 명현진은 동네 여자아이들의 대장이었다.
걸걸하고 화끈한 성격의 그녀는 타고난 여장부였다.
선배라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야, 설치고 다니는 애. 돈 내놔.
-나? 나 말이냐?
-말이 짧다? 쪼끄만 게 미쳤구만.
무려 5명이 몰려왔다. 선배라는 개념을 알기도 전에 얻어맞았다. 힘도 말도 깡으로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여럿이 달려드는 데는 방법이 없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쓰러져 배를 걷어차이고 있는데 멀리서 꼬마 남자애 하나가 달려왔다.
-말로 할 때 우리 누나한테서 떨어져라.
-어쭈. 꼬맹이가 한 대 치겠다?
-곱게 말로 하는 게 좋을걸?
-말로 안 하면 어쩔 건데. 덤벼보기라도 하게?
그때만 해도 3학년밖에 안 된 도혁이가 선배들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를 줄 알았다. 그러다가 죽도록 얻어맞겠지.
겨우 손을 뻗어 멀리 가라고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말이 안 되면 법으로 해야지. 주먹질은 진짜 꼬마들이나 하는 거야.
도혁의 말끝에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명현진과 무리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하찮은 줄 알았던 동생은 어느덧 성큼 자라 있었다.
명현진을 점점 추월해 자라더니 곧 머리 하나가 넘게 커졌다.
오늘 PT를 위해 서 있는 도혁은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소년은 자라 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누나는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팽팽한 긴장이 가득한 실내였다.
심사석에 앉은 광고주와 가라앉은 공기,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가 도혁을 감쌌다.
그가 담담하게 화면을 열었다.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렸다.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DW애드 코리아의 발표자 명도혁입니다.”
짧은 소개와 찰나의 정적. 오늘 PT의 결정권자로 보이는 가운데 자리의 남자가 묵례로 예를 표했다.
“TT자동차는 제가 태어나서 처음 탄 차입니다.”
뜻밖의 오프닝에 명현진이 피식 웃었다.
화면에는 그녀의 가족이 TT자동차를 타고 놀러 다니던 모습이 여러 장의 사진 속에 펼쳐졌다.
색이 바랜 듯 희끗한 사진을 스캔한 장면은 따뜻하면서도 아릿했다.
도혁이 설명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사진이라 만감이 교차하네요. 우리 남매는 저 자동차를 티티라고 불렀는데요. 티티는 15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살다가 폐차되었습니다. 폐차하던 날 누나와 눈물을 머금고 제사까지 지내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꼬마 둘이서 자동차 폐차를 애도하며 물을 떠놓고 제사 지내는 사진이 나왔다.
미소가 저절로 걸리는 장면에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첫 자동차는 TT가 아니었습니다.”
힘을 주어 말한 반전에 광고주의 눈이 커졌다.
“제가 구매한 첫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화면에 나타난 두 대의 자동차는 경쟁사의 모델들이었다.
명현진은 가만히 도혁의 말에 귀 기울였다.
“왼쪽 아버지의 차는 실용성을 강조한 모델입니다. 당시 사회 초년생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습니다. 제가 처음 산 자동차는 아시다시피 D사의 오픈카로 요즘 20대 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디자인입니다. 회사 차가 아닌 개인적으로 사는 첫 차라서 온종일 검색했던 기억이 있네요.”
광고주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핵심이 찔려 조금 아픈 표정이라고나 할까?
‘지난번 미팅 때 CEO가 제일 우려하던 부분이 2030의 미래 소비자에 대한 선호도였지. 무슨 생각으로 팩트 폭력부터 하는 거냐.’
도혁의 의도를 가늠하기 어려워진 명현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곧 자신감 넘치는 도혁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면 TT자동차를 구매할 생각입니다.”
“오호, 디자인보다는 안정성이라는 판단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통계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T의 선호도는 연령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조금 특이한 형태의 그래프였다.
“인간은 변합니다. 이 그래프처럼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TT자동차는 10대 선호도는 높은 반면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소비자에서 훅 꺼지고 30대 후반부터는 서서히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10대는 아무래도 아버지들의 영향이 크겠군요. 하지만 20대에서 선호가 떨어지는 건 기업으로서 분명한 적신호 아닙니까?”
“보통은 그렇습니다. 술이나 과자 등의 저관여 상품의 경우 심각하게 TF팀을 꾸려야 할 상황이지만 차량과 같은 고관여 상품군은 다릅니다.”
화면에는 혼자인 남자와 가족을 이끈 가장의 모습이 대조해 펼쳐졌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고 하죠. 단어의 뜻 그대로 보수, 즉 지킬 것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면 되는 미혼 남자와 가정을 꾸린 가장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달라진 환경이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흠. 여기까지는 특별하진 않네요. TT는 늘 가족의 가치와 안정성을 강조한 광고를 해왔습니다.”
“그랬죠. 그랬기에 현재의 주요 소비자, 즉 30대 이상의 고객에게만 어필하는 캠페인을 펼쳐왔습니다. 이젠 미래 소비자의 시선을 끄는 광고를 시작할 때입니다.”
광고주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끌어 올렸다. 카메라가 도혁과 광고주의 표정을 번갈아 클로즈업했다.
“가족과 안전이라는 키워드에 캠페인을 맞추어왔기에 2030 젊은 소비자에게는 전혀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언제 결혼할지도 모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남의 일 같은 겁니다.”
“그렇죠.”
“또한 결혼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미남의 시장도 잡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마이 라이프 위주로 삶을 꾸리는 젊은 세대 말입니다.”
“정확히 제가 바라는 점 두 가지입니다!”
도혁이 광고주의 가려운 곳을 콕콕 긁어주며 화면을 전환했다.
“그렇다면 2030이 좋아하면서도 안정성과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줄 수 있는 광고를 만들어야 합니다.
메시지는 기존대로, 소구 방식은 변형해서 말입니다. 또한 2030 자유로운 미혼들의 선호도 조사 결과 주목할 만한 결과를 도출했는데요, 디자인 등 외적인 요소에 주목할 거라 여겼던 젊은 층 중의 상당수가 오프로드에서 강점을 가진 자동차를 선호한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신제품 SUV와 셀링 포인트가 맞아떨어지는군요!”
“그렇습니다.”
광고주가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손끝에 잠깐 시선을 멈추었던 도혁이 드디어 샘플 CF 영상을 틀었다.
‘그때 촬영했던 CF구나.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다.’
명현진이 집중해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기획안을 듣고 보니 왜 콘티가 그렇게 나왔는지 쏙쏙 이해가 되었다.
DW애드 직원들이 치열하게 고민해 온 아이디어가 하나의 CF로 완성된 모습을 보려니 괜스레 설레었다.
-Defense(수비) 편.
뛰어노는 어린이와 엄마들이 소풍을 나온 모습. 그중 한 아이가 장난감 총을 들고 무리에서 이탈했다.
그를 따라 장난감 총을 들고 뛰어가는 아이들.
경찰과 도둑으로 나누어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장난감 총을 서로에게 겨누며 총격전을 펼치는 시늉을 했다.
놀이 신이지만 전투 신처럼 박진감 넘치는 카메라워크가 이어졌다. 흡사 게임 속의 한 장면과 같은 모습이었다.
공격을 당하던 아이들 무리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차 뒤로 숨어! 사고 났을 때도 우리 차만 멀쩡했다고!”
주차된 차 중 TT자동차의 뒤에만 숨는 아이들. 자막으로 카피가 펼쳐졌다.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당신의 아이를 보호하세요. Tough And Safe.]
“사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안전한 TT자동차를 찾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광고이지만 총격전과 공격, 자동차, 게임 등의 키워드를 통해 젊은 층의 관심을 소구점으로 잡은 광고입니다.”
“짧은 영상 안에 컨셉이 잘 잡혀 있네요. 가족과 터프, 안전이 묶일 수 있다니.”
“젊은 소비자가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드라이한 느낌에 개그 포인트를 추가했습니다.”
“그러게요. 전투 신이 아주 실감 납니다.”
“어린이들이 슈팅 게임 속으로 들어간 듯한 설정을 잡아봤습니다. 다음 편 이어서 보시겠습니다.”
-Defense(수비) 2편.
앞선 광고와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엄마들과 함께 놀던 아이들이 게임 속으로 들어간 듯 장난감 총으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풀샷과 함께 어린이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긴장감을 더한 화면 속에서 한 아이가 소리쳤다.
“자동차를 보호해! 우리 집 보물이라고. 먼저 공격해서 차를 지키자!”
주차된 차량 중 TT자동차 앞에만 서서 차를 지켜주는 아이들. 아래로 자막이 흘러갔다.
[지켜주고 싶은 소중함, Tough And Safe.]
“앞선 광고를 완전히 뒤집은 패러디 광고네요. 우리 TT를 지켜주다니 아이들이 정말 귀엽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게임 같은 장난감 총격전이지만 총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줄 만큼 단단하고 안전한 자동차라는 메시지를 비틀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지켜주고 싶을 만큼 소중한 자동차라는 메시지로 전환했죠. 또한 카피의 주어 생략을 통해 중의적인 효과를 노렸습니다. ‘지켜주고 싶은 소중함’이라는 카피엔 자동차를 보호하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가족과 어린이를 지키겠다는 뜻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지켜주고 싶은 소중함, 이라는 말을 입속으로 한번 굴리며 광고주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광고를 뒤집어서 패러디하다니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네요. 아주 좋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명현진은 광고 시연이 끝난 후에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 동안 눈을 끔뻑였다.
긴 호흡을 가져가는 방송과 달리 몇 초의 시간 안에 기획과 컨셉, 메시지까지 모두 담아낸 CF.
초기 시장조사 때부터 회의에 참석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무언가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감상에 젖은 그녀의 귓가에 광고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정에 시간 길게 끌 거 있습니까? 바로 대표실로 가셔서 구체적인 캠페인 일정 논의해 봅시다. 이번 캠페인 DW애드 코리아와 함께하겠습니다.”
“빠르게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고주가 도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명현진이 멀리서 엄지를 치켜주었다.
도혁이 미소를 머금고 광고주와 명현진을 바라보며 화답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피티가 아름답게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참, 아까 결혼하시면 TT의 차를 구매할 거라고 하셨는데 생각해 두신 모델이 있습니까?”
“그럼요. 구체적으로 TT의 SUV 모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 그 모델은 장수할 겁니다. 내년도 신차가 출시될 예정이구요. 결혼식은 언제입니까?”
풉, 명현진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당장 결혼한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광고주가 선택적으로 경청한 모양이었다.
방송국에도 많지, 저런 사람. 우리 도혁이 고생 좀 하겠네.
명현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광고주와 함께 사라지는 도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덧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대회의실이 고요해졌다.
긴장으로 팽팽했던 공기가 느슨해지고 오후의 햇살이 포근하게 실내를 감쌌다.
명현진은 의자에 털썩 걸터앉으며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장님 명현진입니다. 이번 다큐, 작품 하나 나오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