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79화 (179/252)

광고 천재 명도혁 179화

TT자동차의 사전 미팅 날이었다.

TT의 마케팅 팀장이 여기까지 따라온 다큐멘터리 촬영진에게 커피를 돌리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회사 프레젠테이션 진행 과정이 찍히는 건 알았는데 여기까지 방문하신다고 전화 주셔서 놀랐습니다.”

“밀착 취재가 핵심인 프로그램이니까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협조해야지요. 참, 오늘 조금 민감한 얘기를 나눌 것 같은데 방송에 미팅 내용까지 나가지는 않지요?”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미팅 현장을 풀샷으로 찍어서 성우분이 오디오 입힐 겁니다. 당연히 회의 내용은 나가지 않구요.”

“다행이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경쟁 PT까지 제법 남은 시점이었지만 도혁이 직접 방문했다. 대국민 캠페인에 대한 의문이 있던 차에 마침 광고주 호출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PT 들어오는 곳 중의 한 곳은 포기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럼 광고대행사 두 곳이 경쟁하는 건가요?”

“글쎄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팀이 기존 대행사인데 난색을 표했다고 들었어요. DW애드가 최근 엄청난 강세인 데다 다큐 진행에 관해 알고 있더라구요. 불리하다고 판단한 거죠.”

“그렇군요. 경쟁과 상관없이 저희는 캠페인 제안 진행하면 되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도혁의 말에 팀장이 고개를 주억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명현진은 조금 아쉬워했다.

“카메라 없다고 생각하시고 평소처럼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경쟁 PT의 긴장감을 찍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포기 안 하면 그림이 예쁠 것 같은데.”

“기존 대행사의 메리트도 있으니까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대표님을 모신 이유는 저희가 요청드린 캠페인 때문입니다.”

팀장이 노트북 화면을 펼쳤다.

“보시다시피 저희 TT가 20대 젊은 층의 선호도가 낮은 실정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최근 CEO가 젊은 분으로 바뀌었어요.”

“30대 중반이시죠? 안 그래도 기사 보고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오너의 성향도 중요하니까요.”

“젊어서 그런지 광고에 관심이 아주 높으시더군요. 그리고 우리 마케팅팀의 첫 성과 보고가 이번 캠페인이에요. 잘 좀 부탁드립니다.”

PT 진행 중간에 대표가 변경된 것 처음이었다.

물론 오너에 따라 캠페인이 지배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지만 설득의 방향성에 주요하게 영향을 미친다.

“운영진이 전체적으로 젊어지셨죠? 저희가 그 부분 신경 써서 진행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금 난감한 상황입니다. 2030 소비자의 선호도가 낮은 것에 완전히 꽂히셨습니다. 첫 차로 선택한 브랜드에서 크게 변동 없이 다음 차를 선택한다는 설문 결과까지 제시하시면서 이번에 임원진을 압박하셨어요.”

와장창 깨졌구만.

마케팅 팀장의 마른 입술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한 게 아무리 냉철한 사업가라도 젊은 소비층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요. 미래 시장성을 좌우하니까요.”

“맞습니다. 현재는 기성세대가 주요 소비층이지만 나이는 들게 마련이고 고령층에서는 차를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깨졌던 회의가 생각났는지 팀장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마케팅팀 내에서 대국민 캠페인보다는 타깃을 젊은 층으로 바꾸어 집중적으로 광고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당장 디자인을 세련되게 바꾸는 일은 어려우니까 캠페인을 통해 올드한 이미지를 벗고 젊은 타깃에 소구하자는 것이 저희의 생각입니다.”

“젊은 타깃을 집중 소구한다라…….”

“특별한 방안이 있겠습니까? 저희가 얼마나 절박한지 말씀드리려고 미팅 잡은 겁니다. 캠페인 방향을 완전히 2030에 맞춰서 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군요.”

뚝 자르듯 한 도혁의 말에 팀장의 눈이 커졌다.

“설득은 저희의 주요 업무이니 걱정 마세요. 저희의 그림대로 광고 집행하면 2030이 아니라 더 넓은 시장도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입니까?”

“네. 말씀하신 대로 소비자는 나이를 먹고 시장은 성숙합니다. 하지만 꼭 같은 방향으로 뻗어가는 건 아니죠.”

“다른 방향이라고요?”

“20대의 나와 40대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에 다른 선택을 한다는 뜻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프레젠테이션 당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 * *

다큐멘터리 촬영이 한결 분주해졌다.

샘플 CF를 찍는 현장에 출동한 명현진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사무실보다 생동감 있고 좋네. 야외 세트장 제법인데?”

“네, PD님. 그림이 괜찮습니다.”

“CF 현장은 느낌이 많이 다르네. 다큐와 달리 집중력이 있어.”

20초의 예술 CF라고 했던가.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담아야 하는 현장의 분위기가 자못 진지했다.

감독부터 배우, 조명팀, 음향팀까지 영혼을 끌어모아 하나의 씬에 집중하고 있었다. 속도감 있게 찍어내는 방송 촬영과 달리 압축한 장면의 퀄리티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

“이진우 PD 표정 잡고, 그렇지. 풀샷도 예쁘네.”

“어유, 한 씬을 몇 번째 가는 겁니까? 모델들도 보통 일 아니겠는데요?”

“그러게. 이 씬 마무리되면 모델 인터뷰 좀 따고…… 어! 저기 전서윤 씨다. 서윤 씨!”

막 자신의 촬영분을 소화한 배우 전서윤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윤 씨 반가워요. 다큐멘터리 촬영 중인데 간단한 인터뷰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번엔 조연이라 방금 끝났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단정한 손길로 메이크업을 정돈하는 전서윤에게 다가갔다.

명현진이 앵글을 잡아가는 뷰파인더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카메라에 잠깐 담았을 뿐인데 화면에서 빛이 나네요.”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에요. 이래서 도혁이가 그렇게 칭찬을 했구나.”

“네?”

스스럼없이 도혁이라고 말하는 명현진을 바라보는 전서윤의 눈이 커졌다.

“도혁이가 자기네 회사 시그니처 모델이라고 자랑 많이 했거든요. CF 나올 때마다 예술 아니냐고 대답을 강요해요.”

“정말요?”

“네. 서윤 씨 DW애드 광고 엄청 찍으셨잖아요. 거기 관해서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되세요. 에이! 카메라. 이쪽으로 오셔!”

소리치는 명현진을 전서윤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너무 소리를 크게 질렀나 봐요. 놀라셨어요?”

“아니에요. 현장이 원래 어수선하잖아요.”

“그러게요. 자리를 옮길까요?”

야외 세트장 밖으로 나가 인근의 벤치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도혁이, 아니, 명도혁 대표님이랑은 언제부터 같이 일하신 거예요?”

“인연은 처음 소주 광고부터였어요.”

“아! 태강애드 때부터군요. 제대 직후인데 오래됐네요?”

“그때쯤 제대하셨구나.”

전서윤이 한 손으로 스커트 자락을 그러잡았다.

그걸 본 명현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그때부터 쭉 DW애드 코리아와 일했던 거네요. 조연으로라도 꼭 출연해 오셨죠?”

“맞아요. 이런 말을 제 입으로 하긴 좀 부끄럽지만 대표님이 페르소나라고 항상 말해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와우, 페르소나. 별소리를 다 해서 꼬셨구만.”

“꼬셨다기보단 제가 영광이죠. 사실 깨끗한 참소주 광고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잘됐을까 싶기도 하고…….”

당시 광고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서윤 역시 반사이익을 누렸다.

“하긴 그 광고가 놀랍기는 했어요. 청순한 소주 모델이라니. 그 뒤로 쭉 미투 광고가 나오고 있잖아요.”

“비슷한 톤으로 바뀌었죠. 저에게도 배우로서 모델로서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라 애정이 많이 가요.”

전서윤이 겸손하게 조곤조곤 대답을 이어갔다.

인터뷰의 끝에 이번에 출연할 영화의 홍보까지 덧붙이는 그녀를 보고 명현진이 끄덕였다.

“우리 전 배우님, 여리여리하게만 봤는데 야무지네요. 인성도 좋으시고. 멋지다.”

“감사합니다. 이제 인터뷰 끝난 걸까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전서윤이 미소로 화답했다.

큐시트를 넘기던 명현진의 손끝이 뚝 멎었다.

“와우. 꽃피는 줄 알았네. 원래 그렇게 웃어요?”

“네?”

“나 연예인 많이 봤는데 전서윤 씨 같은 느낌은 처음이에요. 분위기 작살이다. 와.”

“자, 작살. 감사합니다.”

“작살이라니. 단어 선정 좀 아름답게 해주시지요. 피디님.”

어느 틈엔가 도혁이 나타나 명현진에게 핀잔을 주었다.

“우리 배우님 커피라도 드리고 인터뷰 따는 거야?”

“오셨어요? 어머, 감사합니다.”

도혁이 내민 따뜻한 커피 잔을 건네받으며 전서윤이 다시 활짝 미소를 지었다.

“둘이 인사는 나눴어요? 우리 철없는 누나 명 현진 피디예요.”

“누나요? 아!”

“다큐 진행 때문에 밀착 취재 중이죠. 인터뷰해 봐서 알겠지만 정상 아닌데 물지는 않아요.”

“이 혈육이 요즘 덜 맞았구만. 야!”

초딩처럼 스스럼없이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전서윤의 웃음이 터져 버렸다.

상큼하고 환한 웃음에 명현진이 또 한 번 감탄했다.

“너네 페르소나 웃는다. 여자가 봐도 반하겠어. 도혁이 너 심장 떨려서 어떻게 일하냐?”

“또 헛소리한다. 그런 말 배우에게 실례가 될 수 있어. 조심 좀 하지?”

“이게 왜 실례야. 극찬이구만.”

“서윤 씨 우리가 좀 유치하죠. 미안해요.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가 않네요.”

“왜 미안해요. 보기 좋은데요.”

전서윤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두 분 부러워요. 저는 형제가 없어서 항상 혼자였거든요.”

“혼자 자라서 이런 분위기를 내는 건가.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뭔가 아련한 느낌도 들고. 내가 도혁이 같은 남동생만 없었어도 서윤 씨처럼…….”

“잠깐만. 내가 잘못 들었나? 와, 누나 선 넘네.”

“전서윤 씨!! 촬영 대기할게요. 전서윤 씨!”

스태프의 호출에 남매의 목소리가 뭉그러졌다.

전서윤이 달려가다 돌아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두 분 엄청 닮으셨어요!”

“아닌데!”

“아닙니다!”

전서윤의 미소를 타고 소란했던 CF 촬영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모니터링을 하던 도혁과 이진우가 마주 보며 끄덕였다.

“조금 앞으로 돌려봐요. 아, 거기. 진우야 여기 손봐야겠다. 프로덕션에 인사도 할 겸 같이 갈까?”

“그래 주시면 저야 좋은데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 상태 보니까 오래 안 걸릴 것 같은데. 바로 출발하자.”

모니터링에 집중하고 있는 도혁을 바라보던 전서윤이 미소를 머금었다.

명현진이 가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 * *

최종 PT에 참석한 회사는 두 곳이었다.

외국계 대행사로 국내에서 꽤 공격적인 마케팅을 선보이는 회사였다.

DW애드는 뒤 순번을 받게 되어 대기 중이었다. 비공개로 진행되어 앞선 경쟁사의 PT는 볼 수 없었다.

[TT자동차 하반기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제안 경쟁 PT.]

대회의실의 문에 붙어 있는 공고를 카메라에 담으며 명현진이 소곤댔다.

“엄청 비장하다. 뭔 전쟁 난 것도 아니고 원래 이래?”

“어. 떨리니까 말 그만 시켜.”

“올~ 명도혁 떠냐?”

누나와 더 말을 섞을 여유 따위는 없어 기획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차현우 국장이 하면 딱인데 그놈의 다큐멘터리 때문에 발표를 맡아버렸다.

오랜만의 PT인 데다 카메라도 있어서 부담이 가중되었다.

도혁이 습관적으로 넥타이를 조금 내려 풀자 명현진이 다가왔다.

그러곤 넥타이를 바로잡고 재킷을 털어주었다.

“잘해. 그림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다큐 촬영도 오늘이 마지막이지? 끝까지 예쁘게 만들어줄 테니까 걱정 마셔.”

“우리 동생 파이팅!”

동생 소리를 다 듣고 PT 할 만하네.

도혁이 매끄럽게 웃으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 눈부신 조명이 반짝거리며 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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