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78화
다음 날 아침, 약간의 숙취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출근하던 도혁의 눈이 커졌다.
어제 눈을 부라리면서 싸웠던 국장 둘이 나란히 러닝머신을 뛰고 있었다. 심지어 두 눈가엔 웃음기가 만발했다.
술자리에서 한판 붙었었다. 취한 상태에서 캠페인 때문에 의견 충돌이 있는 바람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도혁은 휴게실 소파에 털썩 몸을 묻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절친이 좋기는 좋네요.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쉿!”
강태오가 눈썹을 치키며 눈짓으로 카메라를 가리켰다.
아, 촬영이 있었지?
“자연스럽게 하세요. 뭐, 내부 갈등도 조직의 한 부분이지 않습니까? 지금껏 없었던 게 더 이상…….”
“명 대표, 직원들하고 갈등 있어? 어허. 고민 있으면 직급 내려놓고 말하라고. 명색이 그래도 우리가 한 살 많은데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 명 대표 속을 누가 썩일까? 그 직원 못쓰겠구만!”
뻔뻔하게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하는 두 절친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무튼 잘 해결됐다니 다행입니다. 두 분 아침 운동 끝나면 회의 시작하시죠.”
“오케이. 열 시쯤 봅시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강태오가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뭘 또 저렇게까지 카메라를 의식하시나, 속으로 비웃어줬는데.
도혁 역시 깜빡이며 따라오는 카메라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하던 행동도 조금 불편해지고 말투도 정제하게 된달까.
아무튼 약간 경직되긴 했지만 늘 하던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여느 아침처럼 커피를 내려 신입 직원들에게 건네자 명현진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이미지 관리 너무 하는 거 아니냐? 대표가 신입들 커피 타주는 회사가 어딨어?”
“여기 있지. 애들한테 물어봐. 이번 인턴들 전환 첫날부터 내려 주고 있다고.”
“올~ 직원들 쥐어짜는 악덕 기업주인 줄 알았더니.”
“…….”
아니라곤 못 하겠다.
도혁은 말문이 막힌 채 대표실 너머 창을 통해 보이는 직원들의 모습을 묵묵히 보았다.
상여금을 주고, 해외여행을 가고, 광고를 따오고 복지에 아무리 신경 쓴다 해도 제 일처럼 뛰어주는 직원들의 헌신에 비할 수 있을까.
솔직히 우리 직원들 지나치게 일하고 있다. 경쟁 광고대행사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단 말이다.
도혁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명현진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뭘 그렇게 정색을 치고 그래. 인생 다 산 사람 같은 눈빛을 해가지고 사람 민망하게.”
“누나는 왜 팩트로 찌르냐, 사람 곤란하게.”
“도혁아, 정말 왜 그래?”
명현진이 손짓으로 카메라를 끄라고 지시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농담처럼 한 말이야. 세상에 악덕 기업주가 얼마나 많은지 아냐? 너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어.”
“그냥. 처음 창업할 때 생각나서. 지구 위에 다시없을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었는데 잘하고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 직원들 정말 고생 많이 해. 야근도 잦고, 마감 맞춘다고 철야도 마다하지 않는데 불평 한번 들은 적이 없다.”
“이 바닥 일이 다 그렇지. 방송 쪽도 장난 없어. 그리고 야근은 밤에 일이 잘되는 걸 어떡하냐? 직원 하나 붙들고 물어봐. 내 말 틀린가.”
그런 면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
도혁이 대답 없이 씁쓸하게 웃자 명현진이 한숨지었다.
“알다시피 방송 쪽 일은 하려는 친구들이 많다 보니까 열정페이만 주고 부려먹는 회사들도 제법 있어. DW애드 정도로 직원 복지 챙기는 곳 대기업에서도 흔치 않잖아.”
“그래도 이게 최선인가 늘 생각하게 돼. 강박적으로.”
“…….”
한 번뿐인 삶에서 두 번 주어진 기회로 인생이 바뀌었을 때.
회귀 처음엔 실컷 놀다 가야지, 여유롭고 유유자적하게 살아야지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시간을 돌리게 된 의미를 찾게 된다.
최선이었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또 한 번의 인생이라면 더 촘촘하게 노력해야 하지 않나, 그에 대한 보답을 사회에 남겨야 하지 않겠나.
이런 감정이 책임감인지 부채 의식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 그렇다고.
세계에서 혼자밖에 할 수 없는 고민으로 분위기가 침침해지자 도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침부터 징징대서 죄송합니다. 촬영 재개하시고, 스텝이 총 몇 명이야? 토스트랑 커피 돌릴게.”
“그래.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꼬맹이가 제법이다? 회사 운영하더니 많이 컸어.”
“중2 때 이후론 누나보다 머리 하나는 항상 컸지 아마?”
“이 자식이!”
다시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고, TT 자동차 팀원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광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전반적으로 찍을 겁니다. 기밀이나 예민한 부분은 사후 편집할 거니까 평소처럼 아이데이션 하시면 됩니다.”
“오케이. 그럼 시작합시다.”
“두 국장님 그 어색한 오케이는 그만하시구요. 자, TT자동차 컨셉 잡다가 말았잖아요. 두 분이 싸우시는 바람…….”
“싸우기는 누가 싸워. 참, 명 대표가 어중간하게 컨셉을 잡자고 어그로 끌었었잖아. 그거부터 설명해 줘.”
강태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도혁이 피식 웃으며 노트북에 담긴 TT자동차의 기초 조사 파일을 클릭했다.
“TT자동차에 대한 소비자 조사 자료예요. 가장 부각되는 장점은 바로 안정성이죠.”
“그렇지. TT 하면 튼튼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니까.”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광고도 안정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차현우가 도혁의 마우스를 건네받아 그간 진행했던 TT자동차의 캠페인 영상을 틀었다.
익숙하면서도 강인한 비주얼이 인상적인 좋은 광고였다. 하나의 컨셉을 산만하지 않게 확실히 보여주면서도 톤앤매너를 맞추어 강한 TT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내구성이 좋고 사고 시 안전하다는 장점을 직접 소구를 하기도 하고, 사고가 났을 때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위협 소구를 곁들일 때도 있고. 다양하고 좋네. 대행사 자주 바꿨었나 봐?”
“의리 있는 광고주는 아니죠. 이번에도 경쟁 PT이구요.”
“아직 마음에 완전히 차는 대행사를 못 만났을 수도 있지. 이번에 우리 회사가 자리 잡으면 되겠네!”
“오케이!”
야심 차게 소리치는 강태오와 차현우를 보며 도혁이 물었다.
“광고주 미팅 다녀오셨죠? 대국민 캠페인을 원한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대국민 캠페인을 희망하는데 난 공익광고 쪽이라고 했고 현우는 수익성이 연결된 쪽을 생각해 보자고 했지.”
강태오가 카메라 눈치를 슬쩍 보았다.
회의하면서 귀를 안 파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도혁이 슬며시 웃고 말았다.
“공익성을 띠면서도 수익성과 연결되는 대국민 캠페인이 없을까요. 그게 제가 말했던 어중간한 컨셉이었던 겁니다.”
“명 대표 웃는 얼굴로 무서운 소리 하는구만. 어중간한 게 아니라 다 담아버리자는 소리 아닌가?”
“뭐 그렇게 되나요?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말끝을 맺지 못한 도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광고가 있었다.
바로 십 년 뒤에 집행될 TT자동차의 전기 차 광고였다.
도혁이 아주 좋아했던 캠페인이었다.
늘 그렇듯 안정성 테스트를 북극에서 하던 TT자동차 연구원들이 북극 절벽의 끄트머리 얼음에 자동차를 묶는다.
절벽에서 떨어뜨려도 부서지지 않는 자동차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지만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먼저 녹아버린다.
겉으로 보기엔 자동차의 안전을 넘어 지구의 안전까지 생각하는 기업의 환경 캠페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기차로 사업을 확대한 TT자동차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다.
‘환경 캠페인이 아주 좋았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일러. 전기 차 개발까지는 요원하지.’
캠페인으로 흥행 시기를 당길 수 있는 아이템이 있고 불가능한 것이 있다.
신차 개발의 시기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으므로 TT자동차의 환경 켐페인은 가슴 한편에 고이 접어두었다.
도혁이 화면을 노려보며 물었다.
“강점이 내구성이라면 약점은 역시 디자인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안전에 치중하다 보니 스타일 면에서는 밀리는 양상이야.”
“나도 TT 좋아하지만 디자인은 좀, 세련된 도시 감각은 아니잖아?”
“우리 집 차가 TT인데 실용적이고 나름 괜찮아. 사고 한번 났었는데 끄떡없어서 그 뒤로 아버지가 완전 팬 됐잖아. 우리 가족은 아주 만족하고 타고 있어.”
튼튼한 내구성. 도시 감각보다는 안전성에 치중. 사고 후기, 가족. 가족이라.
빠르게 퍼즐을 맞추어가며 화이트보드 가득 무수한 컨셉이 채워졌다.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글자들을 쫓아갔다.
끝으로 앵글 가득 도혁의 얼굴이 잡혔다.
“설문 문항을 조금 더 늘려보죠. 디테일하게 아이디어를 잡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
주말 아침, 오랜만에 본가로 갔다.
샤워를 막 끝낸 명현진이 머리카락을 툭툭 털며 거실로 나왔다.
“현진이 요즘 도혁이네 촬영 간다고 했었지?”
“응, 아빠. 명도혁 좀 멋있더라. 선배 국장들 휘어잡고 회의하는데 청년 사업가 느낌?”
“누나한테 칭찬받은 게 보자,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은데?”
도혁이 명현진에게 사과 한 쪽을 포크에 꽂아 건넸다.
아버지가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기특해했다.
“둘 다 사회에서 자리 잡고 서로 돕는 걸 보니 가슴이 뿌듯하구만.”
“참, 아버지 첫 차가 뭐였어요? 요즘 TT자동차 캠페인 하는데 아버지도 쭉 TT자동차만 타셨잖아요.”
주말이라 본가에 온 것도 있었지만 TT자동차의 충성 고객인 아버지를 취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도혁이 차가 DL이지? 나도 젊을 땐 그 브랜드 탔었어. 디자인 세련되고 빠르고. 물론 도혁이 것처럼 뚜껑 열리는 좋은 차는 아니었지만 말이지.”
“생각보다 많이 비싸지는 않습니다.”
“에이, 그래도 네 나잇대에 타긴 부담스러운 금액이잖아. 난 도혁이처럼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평범한 직장이었으니까 DL자동차 중에 제일 작은 걸 샀었어. 그래도 내가 그 차 사망할 때까지 얼마나 아꼈는데.”
“얼마나 애지중지했던지 폐차할 때 눈물까지 찔끔했다니까?”
“흠흠.”
어머니가 웃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버지가 민망한 침음성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결혼하곤 쭉 TT만 탔어. 지킬 게 많아지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
“지킬 게 많아졌다고요?”
아버지가 브랜드를 바꾸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다.
“우연히 친구 차를 탔는데 사고가 났어요. 고속도로에서 4중 추돌이라 제법 큰 사고였지.”
“큰일 날 뻔 하셨네요.”
“그런데 우리가 탄 차만 멀쩡한 거야. 여기저기 다 찌그러지고 난리가 났는데. 그때 TT의 진가를 봤지. 자동차는 빠르고 예쁜 것보다 튼튼한 게 제일이야.”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한번 당해보면 TT에 충성하게 돼. 그때 결혼해서 애들 생기면 무조건 단단한 차 타야겠다고 결심했지.”
가족을 지킨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미래의 시장성이 모호하다. 미래 가치. 잠재 고객, 그리고 가족.
머릿속에서 빠르게 문장과 단어들이 스쳐 갔다.
도혁은 지킬 것이 많다는 아버지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빨리 지켜줘야 하니까.
“어! 도혁아, 오자마자 어디 가!”
“얼른 정리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술 한번 살게요!”
“엇! 내가 뭐 한 건 없지만 술 산다니 고맙구만. 위스키 몇 년산이냐? 도혁아, 대답은 하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