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73화
예상대로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권아영이 찾아왔다.
“이런 제안서를 던지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요. 명 대표 나랑 얘기 좀 해.”
상큼하게 모닝커피를 내리고 있었는데 조금 기분을 잡쳤다.
도혁은 대표실에 밀고 들어온 권아영을 바라보며 천천히 티스푼으로 머그잔을 저었다.
은근히 퍼져가는 핸드드립 커피의 향을 맡으며 열 잔 정도 내려놓은 커피를 쟁반 위에 담았다.
“황도준! 신입들 커피 내렸다. 가져가!”
“넵! 대표님. 오늘 아침에도 직접 내리셨네요.”
“사랑하는 직원들에게 할 수 있는 작고 소중한 마음이지. 식기 전에 가져가고 한 잔은 심부름값, 도준이가 마셔라.”
“감사합니다!”
신입사원들이 흔한 일상이라는 듯 와르르 대표실 앞으로 몰려와 커피를 가져갔다.
권아영이 입술을 꾹 깨물며 그 모습을 가는눈으로 바라보았다.
“명 대표님 나 쪽팔리라고 일부러 신입들 챙기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제가 예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 대표님 올 줄 어떻게 알고 미리 열 잔이나 만들어놓습니까? 아침에 컨디션 좋으면 적어도 ‘신입’들에게는 커피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결재 들어오는 직원들한테도 마찬가지구요.”
세상 대표가 다 당신 같은 줄 아나.
도혁은 일부러 신입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강조하며 권아영을 똑바로 보았다.
“아무튼 아침부터 여기까지 오셨으니 사업 얘기나 합시다. 제안서가 마음에 드셨다고요?”
“그럼요. 저랑 안 하면 전서윤 씨 매니지랑 할 거잖아요.”
“어디든 같이 진행할 곳은 많습니다. 아실 텐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새벽같이 찾아왔죠. 이왕 들켜 버렸으니까 하는 말인데 내가 좀 성질은 더러워도 일은 잘해. 그냥 우리랑 하세요.”
권아영이 출력해 온 도혁의 제안서를 내밀었다.
[패션 브랜드 빅스. 차세대 남자 빅스타 오디션]
귀국 후 첫 번째 캠페인으로 고른 브랜드는 바로 빅스 청바지였다.
칸 광고제의 성과와 더불어 DW애드의 전작이 마음에 든다며 경쟁 PT가 아닌 독점 계약을 제안해 왔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흥할 브랜드임을 알고 있는 도혁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권아영이 도혁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떼었다.
“여기 적힌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어요. 청바지 브랜드의 남자 스타 오디션을 한다고 했잖아요. 더구나 명 대표님이 직접 캐스팅해서 오디션에 참가하도록 권고하겠다고 되어 있어서요. 대표님 촉이면 이번에도 모델로 대박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권 대표님께는 모델 에이전시 위주로 적극 홍보를 부탁드리려고 했었죠.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속속들이 아실 거 아닙니까.”
“그럼요. 연예계 속사정 다 알죠.”
“아이템도 좋고 이미지도 괜찮은 편이라서 모델만 받쳐주면 오랫동안 흥할 브랜드예요. 그래서 권 대표님과 손잡고 좀 괜찮은 친구들 모아보려고 했던 겁니다.”
“명 대표 감 좋잖아. 나도 좋고. 이거 정말 촉이 온단 말이에요.”
권아영이 애가 단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감은 좋은 여자다.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 그 옆에 더 잘생긴 애가 오디션을 봤다는 빅스 광고.
곧 레전드 톱스타들의 연예계 데뷔 코스처럼 여겨질 빅스 모델 오디션이었다.
도혁이 기억하는 전생처럼 오성급 스타들이 제 발로 몰려들지는 모르겠으나, 안 오면 그렇게 만들 거다.
그 스타가 될 친구들이 지금 어느 에이전시에 있는지, 어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중인지 미리 알아두었으니까.
그 카페도 신인 등용문이라 불릴 정도로 스타급 배우 알바를 배출한 독특한 곳이었다.
그 사장 역시 회귀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이었다.
아무튼 끈질긴 권아영이 이 제안을 놓칠 리가 없었다.
“패션 브랜드에 남자 모델 오디션, 거기다 명 대표가 나서니…….”
“숟가락을 안 얹을 이유가 없죠. 판은 제가 깔아놓을 거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맞아요. 같이 합시다. 우리 소속 애들 샘플 CF 만들 때 다 데려다 써요. 나도 명 대표한테 해주는 게 있어야 하니까.”
“다 데려다 쓰라구요?”
권아영의 말에 도혁이 눈썹을 짙게 말았다.
“직원도 소속 연예인도 도구적으로 생각하시는군요. 뭐, 좋습니다. 샘플 CF 찍을 때 일일이 부탁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닙니까? 저야 이제 샘플 모델 걱정 안 해도 되고 아주 좋은 제안입니다만.”
도혁이 말을 뚝 끊자 권아영이 멈칫했다.
“갑질은 그만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협력 관계인 회사에서 구설이 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요. 회사 내부에서 권아영 대표님이 어떻게 지내든지 상관할 바 아니지만 DW애드에 피해 끼치지 말라는 겁니다.”
“앞으로 안 그럴게요. 쪽팔린 거 안다고.”
연예계 갑질이 판치던 때였지만 세월이 지나면 결국 밝혀지고 망하는 케이스도 많았다. 대기업이 회장의 갑질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고.
세상이 변한다고 이 사람아.
이게 다 권아영을 구제하는 거라는 걸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돌아서는 권아영을 배웅하자 도혁의 뒤통수가 따가웠다.
탁기준이 팔짱을 끼고 혀를 끌끌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권 대표랑 같이 하는 거냐? 하긴. 나도 제안서 읽어봤는데 빅스 괜찮더라고. 놓치기 싫었을 거야.”
“에이전시 사정은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남편이 이 바닥 오래 있었잖아요. 샘플 모델도 무한 제공한다고 하구요.”
“윈윈이긴 하지. 그건 그렇고 이렇게 대놓고 남자 모델만 모집하는 이유가 있어? 남자 청바지도 여자 모델 많이 쓰잖아.”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회의실로 팀장급 이상 직원들을 소집했다.
“직원들 모입시다. 말 나온 김에 빅스 청바지 아이데이션 회의 진행할까 합니다.”
“담당 AE로 붙을 사람이 어디 보자…….”
회의실로 들어가며 사무실을 휘익 훑어본 강태오가 제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제작국장이지만 이번에야말로 회사를 위해 나서야 하지 않겠어?”
“네? 갑자기요?”
“강 국장님이 도대체 왜요?”
모두의 의아한 눈빛이 강태오의 꾀죄죄한 행색에 꽂혔다.
“DW 애드에서 처음 진행하는 패션 광고 아닌가. 당연히 패션을 선도하는 내가 나서줘야지.”
“패션 선도라는 단어 선정부터 이미 촌스러운데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는 내가 패셔니스타지.”
“하아…….”
여기저기서 탄식과 짜증이 쏟아져나왔다.
“패셔니스타의 정의가 언제 바뀌었죠? 강태오 국장님 셔츠 며칠 입으셨어요?”
“뭐 한 이주일 됐나?”
“스코틀랜드 있을 때 입으셨던 옷이잖아요!”
“그래. 루비똥!”
“네??”
더 황당해하는 직원들과 아직도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강태오였다.
도혁이 쐐기를 박아주었다.
“패셔니스타는 속옷부터 다르다던데 혹시 속옷 언제 갈아입으셨습니까?”
“에이 사람을 뭘로 보고. 아직 사흘도 안 됐어.”
“네?? 속옷을 매일 갈아입지 않는다구요?”
최민아가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며 강태오에게서 멀어져 갔다.
“어! 최 팀장 이럴 거야?”
“큼큼. 아무튼 강 국장님은 안 되겠어요. 잠시만 한번 봅시다. AE 중에 옷을 잘 입는 사람이…… 도준이 어때요?”
“황도준은 디자이너잖아!!”
AE들이 입을 모아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한수철이 어이없어했다.
“나 나름 옷 잘 입어. 광고주 미팅 때문에 슈트만 입고 다녀서 그렇지.”
“그래도 캐주얼은 도준이 아니에요?”
최민아의 말에 직원들의 시선이 창밖으로 이동했다.
밖에서 도무진과 무언가를 의논하는 황도준의 모습이 보였다.
하긴 저 자식 홍대 앞에서 옷 장사도 했었지.
황도준과 전생에도 일해봤지만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제법 괜찮다?
도혁은 목을 쭉 빼고 유심히 황도준을 관찰했다.
최민아가 황도준의 오늘 코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댄디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처음엔 홍대 스타일로 약간 난해한 스타일을 입고 다녔는데 그때도 감각은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오호.”
“왜 남자 친구가 입었으면 좋겠다 싶은 느낌 있잖아요.”
있긴 뭐가 있나. 끔뻑끔뻑 눈만 감았다 뜨는 남자들이었다.
“여자들이 황도준 같은 스타일 좋아해?”
“네. 네! 얼굴은 빼구요. 가끔 자존심이 상한다니까요? 저렇게 못생겼는데 심쿵해서.”
“심쿵할 때도 있단 말이야? 옷 때문에?”
눈을 끔뻑이던 남자들이 동시에 크게 놀랐다.
최민아가 갑갑하다는 듯이 가슴을 한번 치더니 대상을 여자로 바꾸어 설명했다.
노트북을 끌어와 사진을 대조해 보여주었다.
“남성 청바지 브랜드라서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인데 흠, 이거 봐요. 전현지 배우님. 원래 좀 모호한 컨셉이었는데 최근에 청순으로 갈아탔잖아요. 코디가 바뀌었는지 최근 스타일링이 훨씬 예쁘지 않아요?”
“이렇게 보니까 확 와닿네. 예시를 이런 걸 들어야지. 황도준이라니.”
“그러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최민아가 그제야 만족한 듯 웃음을 머금고 황도준을 가리켰다.
“스타일링은 정말 중요해요. 담당 AE가 누가 됐든지 미팅할 땐 도준이 데려가요. 해외 브랜드나 디자이너도 많이 알고 도움 될 거예요.”
“하여튼 대단한 놈이야. 난 남성복 브랜드도 잘 모르는데 디자이너까지 안다고? 도준이 좀 불러봐.”
그렇게 황도준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저 빅스 브랜드 팬입니다. 전담 디자이너로 배정된 거예요?”
“아니, 서브 AE님이십니다만?”
“네??”
그렇게 팀이 꾸려졌다.
자칭 패셔니스타 한수철과 남친룩의 대가 황도준, 이진우 PD 그리고 디자인 총괄은 최민아가 맡기로 했다.
강태오가 삐진 듯 짜증을 부렸다.
“에이, 세계적인 패셔니스타를 못 알아보는구만.”
“그런 걸로 합시다. 선배는 위스키 광고에 집중하시고 그럼 내일 아이데이션 때 분석 자료 모아서 컨셉 잡도록 하죠.”
“내가 너무 앞서가서 그래. 십 년 정도 앞선 패션을 선보이니까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해요.”
십 년 뒤에도 그런 옷은 절대 유행하지 않습니다, 선배님.
속으로 말을 삼킨 도혁이 최민아를 불렀다.
“최 팀장은 나랑 가볼 곳이 있어.”
“오! 출장인가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카페 투어.”
“네? 카페요?”
강릉 카페 투어에서 강릉시장까지 만나며 덴 적이 있는 최민아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킷을 잡는 눈빛에 의심이 서렸다.
“또 카페 백 군데 들렀다가 서울시장 만나고 오는 건 아니죠?”
“오늘은 백 퍼센트 만족 출장 장담합니다. 고객님.”
“고객님이라니 벌써 불안한데요?”
미심쩍은 눈길로 따라나선 최민아가 카페에 도착해 알바를 보자마자 감탄했다.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가리며 복화술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대표님. 여긴 뭐 하는 곳이죠? 서울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었어요?”
“놀랍지 않아? 하아, 줄이 어디까지 서 있구만. 커피 한잔 마시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저건 사람이 아니잖아요. 천사잖아요…….”
길게 늘어선 줄의 끝에 훤칠하게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었다.
데뷔 전의 배우 성현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