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72화
“아이고, 우리 손자 도핵아!”
“할머니! 먼 길 오셨네요. 건강은 좀 어떠세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맨발로 마중을 나왔다.
칸 광고제 수상 뉴스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오셨단다.
“도핵아, 아이고 장한 손자. 뉴스에 우리 도핵이 나오는데 경로당이 왈칵 뒤집혔잖아.”
“다들 잘 지내시지요?”
“그럼 그럼.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거친 손으로 쓰다듬는 손길이 더없이 따뜻해 마음이 포근해졌다.
한국에 오기는 왔구나. 김치찌개 냄새도 나고.
도혁이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달큼한 한식의 냄새가 몰려들었다.
“이거거든. 아우, 느끼해서 혼났다 정말.”
“영국 음식 맛없지? 배낭여행 갔을 때 미치는 줄 알았어.”
“스코틀랜드는 나름 먹을 만은 했지만 힘들긴 하더라고.”
“으. 난 유럽 가서 알았어. 한국에서 파는 햄버거는 한식이나 다름없구나.”
명현진이 투덜대면서 손을 내밀었다.
“야! 선물.”
“으이구. 도혁이 밥이나 좀 먹고 달라고 해!”
어머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고도 명현진이 도혁의 면세점 가방을 뒤적거렸다.
“뭔 술이 이렇게 많아. 세관 통과 겨우 할 만큼 풀로 땡겨 왔구만.”
“해외여행 갈 때 술 챙기는 건 헌법 아닌가? 아무거나 가져가. 뭐 좋아할지 몰라서 화장품도 이것저것 손에 집히는 걸로 사 왔어.”
“올~ 그래도 센스 있는데?”
립스틱과 팩트를 골라 담는 명현진의 등짝에 이번에는 할머니의 손자국이 남았다.
“이거 언제 철드냐. 가끔 보면 도혁이가 오빠 같다니까?”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도혁이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다고요.”
“선물?”
모두 불안한 눈길로 명현진을 바라보았다.
선물이라니. 이거 많이 불길한데?
아니나 다를까 명현진의 입에서 기가 막힌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명도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어. ‘이 시대의 기업’이라고 전문 직업군이나 회사를 탐방하는 다큐멘터리야. 이번에 파일럿(정규프로그램 편성 전 제작한 에피소드) 배정받았어.”
“그게 왜 나를 위한 거냐?”
“DW애드 코리아가 첫 주인공이니까. 한국 최초의 칸 광고제 수상자. 황금사자 다섯 마리를 몰고 온 프랑스의 남자 명도혁!”
“드디어 미쳤냐?”
“원래 미쳐 있었거든?”
평소에 폭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화주의자지만 진심 저 듬직한 등짝에 스매싱을 날려보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염려스러운 눈길로 명현진을 노려보았다.
“다큐멘터리면 계속 카메라가 붙어 다니는 거야?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홍보도 되고 얼마나 좋아.”
“우리 회사 홍보는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을 텐데?”
도혁이 신문을 들어 칸 광고제 기사를 보여주었다.
“누나 국장님한테 미션 받았지? 섭외해 오라고. 파일럿이라며.”
“어떻게, 알았냐?”
“배우 전서윤 씨도 섭외해서 넣고, 어? 공찬혁이랑 다 중간중간 인터뷰 따고 CF 현장도 찾아오고 화제성 보도 자료도 내고?”
“역시 선수네. 하자. 도혁아, 어?”
명현진이 콧소리를 섞어 이름을 부르자 온몸에서 소름이 끼쳐왔다.
도혁의 표정이 공포스럽게 변한 걸 눈치챈 명현진이 더 몰아붙였다.
“오~ 이런 거 싫어하는구나. 도혁아! 도~ 혁아. 나 좀 도와주라~ 어?”
“X발.”
오랜만에 시원하게 욕을 뱉으며 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애교 공격에 정신이 없어진 머리를 흔들어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명현진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잘 활용하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하지. 광고 제작 과정 하나를 통째로 실어봐?’
밖에서는 문을 두드리는 명현진의 콧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 혀어억아!”
남동생의 자아와 CEO의 자아가 뒤섞여 어질어질한 한국에서의 첫날이었다.
* * *
“어우, 소름.”
“대표님 감기 기운 있어요? 왜 이렇게 몸을 떨어요?”
최민아가 걱정 어린 눈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도혁이 자꾸만 귓가에서 아른거리는 명현진의 목소리를 애써 지워냈다.
확답을 할 때까지 괴롭힐 게 분명한 명현진이었다.
“아니야. 요즘 고문을 좀 당하고 있어서.”
“고문이요?”
“그런 게 있어. 어! 최 팀장 벌써 글랜 시안 가져온 거야?”
“네. 어제 와서 만들었어요. 집에 가도 할 일도 없고.”
“푹 쉬고 오라니까 말 안 듣지?”
장난처럼 혼을 냈을 뿐인데. 대표실 문이 열리고 때마침 들어오던 국장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지금 탑 디자이너 최 팀장한테 지금 큰소리친 건가?”
“명 대표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 있네. 어제 최 팀장 글랜 시안 만드느라고 야근했어.”
“오해십니다. 하아.”
안팎으로 고통스러운 아침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팀장급이 모두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현우 국장님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출근하면 일 밀려 있을 생각에 잠이 다 안 오던데 다 처리했더라고.”
“다들 잘 정리해서 인계해 줘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해 진짜 대단들 하다.”
“우리 직원들이 대단한 겁니다. 모인 김에 거국적으로 박수 한번 칠까요?”
“거국적이래. 우리 대표님 또 아재성 발언하신다.”
투덜거리면서도 박수를 크게 치는 팀장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인 사자 트로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 그럼 일상으로 돌아가서. 오는 길에 탁 국장님께는 말씀드렸는데 앞으로는 들어오는 광고주 안 막고 가는 광고주 안 잡을 생각입니다.”
“가는 광고주는 없는 것 같고 들어오는 광고주는 다 잡기 힘들 거 같은데.”
차현우가 그동안 들어온 광고 의뢰서를 보여주었다.
“다 추리지도 못했어. 우리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망할 느낌만 안 들면 진행합시다.”
미래 지식의 거름망을 통해 망작삘을 거르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도혁이 빠르게 아이템을 추리며 의견을 물었다.
“PT를 몰아쳐서 광고주를 집중 유치하는 게 낫지 않아요? 뒤로는 현상 유지만 해도 돌아가니까.”
“왜, 명 대표 어디가?”
탁기준이 촉을 새워 도혁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회사 규모를 좀 더 키우고 싶은데 바짝 달리는 편이 낫지 않나 싶어서 말씀드립니다. 한동안 PT를 안 하기도 했고 말이죠.”
“그럽시다. 또 몰아치는 맛이 있지. 그럼 지금 명 대표가 추려준 광고주 중심으로 스케줄 잡아볼게. 다들 동의?”
“오케이. 손가락이 간질거리던 참이었어.”
팀장들과 의견을 모은 후 도혁이 한 가지 안건을 더 꺼내었다.
“그리고 방송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이 시대의 기업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라는데 우리 회사 찍는 거래요.”
“우리 회사를 집중 조명한다고요?”
“예전에 바이플렉처럼? 그거 엄청 좋은 거 아닌가?”
도혁이 대략적인 프로그램 설명을 마치자 직원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진우가 PD로서의 견해를 내비쳤다.
“솔직히 이만한 기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일 VJ가 붙어서 회사 홍보해 주는 그림이지 않습니까? 연출도 광고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될 거고 제가 그 프로그램 기획에 대해 다른 루트를 통해서 들었는데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찍는 게 아니라 찍히는 게 문제야. 조금 부담스럽지 않아?”
“난 잘생겨서 괜찮아.”
“나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아닌데. 도혁이 한쪽 벽에 세워진 거울을 가리키며 눈썹을 찌푸렸다.
“각자 나가면서 거울들 보시고 한 번 더 생각한 뒤에 말해주기 바랍니다.”
“흠, 이렇게 진행하면 어떨까? 얼굴이 노출되기를 꺼리는 직원은 따로 조사를 해서 방송에 나가지 않게끔 조치를 하고 편집도 부탁하면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물론 난 공익을 위해 출연할 생각이야. 사람들이 연예인보다는 훈훈한 일반인을 보고 싶어 한다고.”
“시청자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TV에서까지 이런 얼굴을 봐야 하죠? 탁 국장님은 빼고 진행해요, 우리.”
인신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도혁은 빠르게 전략을 짜고 있었다.
이왕 찍게 된다면 뭔가 하나 넣고 싶은데.
휘리릭 빠르게 의뢰 광고안을 훑어보던 도혁의 손끝에 걸리는 회사가 하나 있었다.
도혁이 탁기준을 바라보며 재킷을 들었다.
“탁 국장님 저하고 가볼 데가 있습니다.”
“어디? 커피나 다 마시고 가자.”
“커피는 공찬혁 씨와 드시죠.”
“으. 권아영한테 가려고? 왜?”
한입에 훅 식은 커피를 들이켜고 탁기준이 일어섰다.
내친김에 해야 하는 도혁의 급한 성미에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예전엔 반대 입장이었는데. 가끔 겹치는 전생의 기억에 간혹 웃게 된다.
하지만 권아영을 만났을 때는 더 웃을 수가 없었다.
탁기준에게 듣기만 해왔던 악녀의 모습을 드디어 실제로 본 것이다.
“야! 너 이거 뭐 하는 짓이야. 인턴 한 지 몇 개월이 됐는데 커피 하나를 똑바로 못 타니. 이래서 내가 너네 정직원을 못 시키는 거야.”
여대생으로 보이는 인턴 한 명이 권아영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급기야 물건까지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갑자기 사무실에 들어온 도혁에게 그 모습을 들키자 조금 민망했는지 권아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연락이라도 좀 하고 오시지. 아직 귀국 안 한 줄 알았는데요.”
“전화드렸는데 계신다고 하더군요.”
“전화 누가 받았어?”
다시 눈을 쭉 찢어 올리는 모습을 본 직원들이 움찔거렸다.
어지간히 잡고 사는 모양이었다.
도혁이 얼굴을 찌푸린 채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인턴십 저희와 같이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그 인턴들이 일하고 있는 거예요?”
DW애드에서는 정직원 전환을 한 지 제법 되었다. 팀장을 했던 인턴은 국제 광고제에 데려가기도 했었고.
이렇게 인턴들 굴리기만 하다가 내치는 건가?
도혁은 씁쓸하게 실소하며 권아영을 따라 대표실로 들어갔다.
“아무튼 여기까지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인사드려야 하는데.”
“급하게 생각난 게 있어서요. 오디션을 함께 진행했으면 하는 광고주가 있는데 조금 숙고한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에이, 아까 그 인턴 때문에 그러세요? 사업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 있죠. 오늘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감정 여과 없이 드러내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제가 이래도 뒤끝은 없어요. 네?”
“당하는 인턴에게는 뒤끝이 남지 않을까요?”
조직에는 이런 사람들이 꼭 있다.
제 감정을 일하는 공간에서 마음대로 드러내고 혼자 뒤끝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마치 신생아처럼 제멋대로 조절 없이 행동하는 사람 말이다.
“제가 제 성격을 잘 아는데 오늘 더 대화를 나눈다면 주제넘은 월권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권 대표님 회사이니 알아서 운영하시는 부분인데 선 넘기 싫네요. 말씀드린 건은 다시 논의토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이거 참.”
부끄러운 꼴을 보인 줄은 아는지 권아영의 얼굴이 귓불까지 빨개졌다.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명 대표 내 말 안 믿더니 마녀 맞지?”
“그렇네요. 제가 극도로 혐오하는 갑질 사업주. 마녀라고 듣기만 했지 직접 보니까 모골이 송연합니다.”
“근데 이렇게 나와도 괜찮겠어? 명색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엔터 사업가인데.”
“기다리면 아마 답답해서 찾아올 겁니다. 제가 출발 전에 메일을 하나 보내놨거든요.”
저 제안서에 솔깃하지 않으면 감 잃은 거지. 문제는 싫어도 실익만 따져서 저 마녀랑 계속 일을 할 거냐는 건데.
도혁이 긴 숨을 뱉으며 운전대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