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69화
“대표님, 미래에서 왔죠?”
최민아의 팩트 폭행에 도혁은 눈만 끔뻑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놀랐고 뜻밖이라서.
입을 다문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도혁의 눈앞에 최민아의 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놀라요. 진짜 미래에서 왔어요?”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최민아가 술을 따라주었다.
“이런 식으로 진실게임을 할 거라구요. 진짜 궁금한 거 서로 물어보고.”
“오케이! 그럼 나부터.”
한수철이 곧바로 도혁에게 물었다.
“명 대표 미래에서 왔지?”
“이럴 거냐?”
“우리 다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매번 이렇게 새로운 걸 적절하게 버무릴 수 있지? 난 이해가 되지 않아. 그리고 시장성도 단번에 알아내고 말이지.”
“그거야 확실한 이유가 있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혁이 맥주를 입속에 한 번에 털어놓곤 대답했다.
“난 천재니까.”
“에이!”
“에헤이!”
“반박을 못 해서 더 짜증 나네요.”
얼굴에서 미소를 걷어낸 최민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진짜 말해주세요. 압도적 생산성의 비밀이 뭔지요.”
“궁금해?”
“그럼요!”
저절로 튀어나올 뻔했던 궁금하면 오백 원 따위의 아재개그를 겨우 삼키고 도혁이 입술을 떼었다.
“욕구에 충실하고 욕망에 의존하는 것. 그게 비결이야.”
“올~ 거창한데?”
“내가 좀 거창하지.”
거창해야지. 두 번의 생을 거쳐 광고 인생이 도합 몇 년인데 이런 철학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도혁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우린 스스로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살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지.”
“아니야. 내가 얼마나 욕구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데. 아주 짐승이에요.”
짐승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강태오가 반발했다.
곁에서 비슷한 생활양식으로 살아가는 황도준, 도무진도 반항의 눈빛을 뿜었다.
“기본권에 충실하게 산다고? 내가 볼 때 셋 다 아닌데?”
“우리 자취방 보고 돼지 같다고 하셨던 분이 누구시더라.”
“아, 거긴 병 없이 살려면 좀 치워야겠더라. 아무튼.”
바닥에 뒹굴던 과자 봉지와 맥주캔을 떠올리며 도혁이 몸서리쳤다.
“자, 퀴즈를 내볼까? 욕구에 충실한 삶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야. 기본적인 욕구 말이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거.”
“그렇게 산다니까?”
“졸릴 때 정말 잡니까? 하던 게임 멈추구요?”
“큼큼…….”
“흐음…….”
조용해진 셋이었다.
도혁이 이어서 결혼 후 퉁퉁하게 살이 오른 탁기준을 보고 물었다.
“정말 배고플 때만 먹습니까? 입이 심심해서, 일하다가 당 떨어진다는 핑계로 배불러도 이것저것 주워 먹지 않구요?”
“에헤이.”
모두 입을 꾹 다문 걸 본 이진우가 도혁의 말을 정리했다.
“아!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몸이 시키는 대로 생활한다는 말이군요.”
“맞아. 졸린 땐 반드시 자고, 먹고 싶을 때만 먹고. 속이 부대끼면 산책하고. 자연 상태의 인간으로서 욕구에 맞추어 사는 거야. 그게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야. 머리가 팍팍 돌아가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 일이 보통의 업무와는 달라. 컨디션 무너지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경험 다들 했을 텐데? 컨디션을 베스트로 유지하는 것. 그게 기본이야.”
감명을 받은 듯 입속으로 말을 되짚는 이진우였다.
곁에 있던 최민아가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그럼 욕망에 의존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소비자의 모든 욕망에 의존해 생각한다는 뜻. 이건 광고의 기본이자 마케팅의 기본이고 또한 생산성의 근본이지.”
“어! 세미나 때도 이런 말씀 하셨죠?”
“맞아. 피에르와 이 부분에 대한 대담을 오래 했었어.”
“그랬어?”
대표가 강의하는데 노느라고 제대로 안 들었구만.
도혁은 직원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질책했다.
“진우랑 민아 팀장 빼고는 다들 놀러 갔구만.”
“에이. 살짝살짝 들었지. 그래 욕망이 뭐라고?”
“이건 일적인 부분이라서 술자리 재미없어지니까 넘어갑시다. 자세한 건 피에르와의 대담 영상에서 확인하세요.”
“그, 그럴까?”
놀러 와서 계속 일 얘기만 하고 싶진 않아 세미나 주제로 나왔던 말은 끊어버렸다.
그러곤 화제를 최민아 쪽으로 돌렸다.
“민아 팀장은 본가엔 안 가? 거의 일만 하는 거 같아.”
“남자친구도 없대요. 모태 솔로!”
장난스레 말하는 황도준의 등짝을 후려치곤 최민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모태까지는 아니거든?”
“민아 팀장 정도면 남자들이 줄을 서 있을 텐데.”
“줄 서든 말든 관심 없어요.”
그러고 보니 전생에도 남친 하나 없이 일소처럼 일만 하던 최민아였다.
의리 있게 도혁의 마지막 길을 챙겨주던 유일한 동료였는데.
일만 너무 시켜서 연애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일순 미안한 마음이 몰려들었다.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연애도 하고 그래. 휴가 팍팍 빼줄 테니까.”
“그거 명 대표님 자신한테 하는 말이죠?”
“그러게. 명 대표도 여자 친구 없잖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더 좋네요.”
“올~ 광고와의 결혼 그런 건가! 식상한데.”
“에휴, 나도 광고랑 결혼한 거라구요. 남자 귀찮아.”
한숨을 내쉰 최민아가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파하고 자도록 하죠. 욕구에 충실하라면서요. 졸려요.”
“진실게임은! 이제 시작이구만.”
“여행 일정 남아 있는데 나중에 해요. 내일 스코틀랜드로 출발해야 하잖아요.”
“그럴까? 체크아웃 시간도 있고 하니까. 그럼 오늘은 정리합시다.”
“이야, 진짜 태오 선배가 풀코스로 쏘는 겁니까?”
“그럼. 고향에 왔는데 내가 쏴야지. 아일라섬으로 바로 갑시다.”
“굿나잇입니다!”
뒤늦게 비트윈더 시츠의 나른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누워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성과, 시상식, 세미나, DW애드까지 감긴 눈 아래로 천천히 잠겨갔다.
도혁은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푹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칸 해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 * *
“미쳤다……. 여기 진짜 미쳤어.”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에 도착한 후 모두 저절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쳤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 전경이었다.
파랗다 못해 시리게 느껴질 만큼 깨끗한 하늘과 맞닿은 사파이어빛 바다.
그 위로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초원과 싱그러운 자연.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석조 건물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더했다.
“어디를 찍어도 작품이 되는군요. 이야.”
“직원들 넋이 빠졌구만. 하긴 이걸 보고 가슴이 뛰지 않으면 디자이너라고 할 수 없지.”
감탄은 AE들의 몫이었다.
제작국 사람들은 외마디 탄식조차 뱉지 않은 채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신선한 바닷바람과 뭉근히 깊어지는 파도의 결을 바라보자 속이 턱 트이는 것만 같았다.
“자, 이쪽으로. 우리 증류소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 증류소라면. 어! 잠시만요. 저기는!”
비스듬히 걸린 나무 간판 위로 300년 전통의 위스키 명문가인 글랜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강 국장 저기서 일했던 거야? 조선으로 따지면 머슴?”
“도련님 오셨습니까?”
탁기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끼이익 거대한 철재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강태오에게 도련님이라고 하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막내 도련님은 더 멋있어지셨네요.”
“마, 막내 도련님!”
역시 빨지 않아 꾀죄죄한 루비통 셔츠의 깃을 세우며 강태오가 안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사방에 게스트룸 있으니까 편한 데 쓰도록 하시죠. 식사는 메인 홀 쪽에서 하시면 되고 술은 뭐, 천지에 널린 게 술이니까 아무 데다 퍼마시면 됩니다.”
“여전하시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도련님이 돌아오신 것이 느껴집니다. 여러분 저희 직원들이 적소에서 안내할 테니 안심하시고 편하게 계시기 바랍니다.”
“우와. 우와! 정원이 베르사유 같은데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 재벌이었던 거였다.
정체가 밝혀졌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직원들이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강태오의 안내로 얼떨결에 들어간 스코틀랜드식 저택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이국적이었다.
샹들리에의 조명 아래 일행이 자리를 잡자 푸짐한 정찬이 차려졌다.
“스코틀랜드 정통 요리입니다. 미리 연락받고 한식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영국 음식 맛 드럽게 없어. 비빔밥 주셔.”
“이런 오랜만에 왔는데 음식 타박이라니. 여전하구나.”
멀리서 마이클 글랜. 그러니까 세계적 증류소의 수장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한국계 혼혈로 알려진 마이클 글랜. 그러니까 그와 그의 한국인 아내 사이에서 나온 셋째 아들이 바로 강태오란다.
강태오의 설명을 들은 도혁이 일어나 정식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멀리까지 와서 폐를 끼칩니다.”
“별말씀을요. 메일 주신 명도혁 대표님이시군요.”
“네. 협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협조? 응하다니. 사전에 두 분이 메일 주고받았어요?”
“직원들 워크숍을 위한 장소 협조 공문 보내드리고 회신받았죠. 강태오 국장님 큰 소리를 못 믿어서 취한 조치는…… 맞습니다.”
강태오가 글랜 증류소 가면 된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지만 만일의 경우 직원들 데리고 방황할 순 없으니 미리 장소 협조 공문을 보냈다.
“우리 태오와 일하는 대표님이라고 들었는데 아주 젊으시군요. 직원들이 모두 청년이구만.”
“네. 젊은 기업입니다.”
“내 아들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태오가 보기는 저래도 생각보다 쓸 만하지요?”
“저희 회사 제작국의 주축이십니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크리에이터기도 합니다.”
존경까지 한다는 말에 마이클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호탕한 웃음이었다.
“그래, 잘살고 있나 보구만. 제 엄마 죽고 한국 가서 방황하더니 금세 자리를 잡았어.”
“여기 명 대표와 우리 직원들 덕분이죠. 회사지만 동아리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예요. 하고 싶은 일 하고, 상도 받고.”
“생중계는 잘 봤습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아주 화제가 되고 있어요.”
“강태오 국장님 덕분입니다.”
“하하. 그래. 잘 만들었더구만.”
껄껄 웃어젖힌 마이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니저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채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이메일에 적어 두었던 조건을 기억하십니까?”
“네. 퀴즈를 맞히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위스키 파는 집에 오셨으니 위스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라고 했었지요.”
강태오가 고개를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치하게 이런 거 아직도 하십니까?”
“유치하긴. 이거 맞추면 내가 명 대표가 원하는 것 하나 들어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유치하죠. 초딩도 아니고.”
피식거리는 강태오의 뒤로 매니저들이 석 잔의 술을 가져왔다.
그 옆에 놓인 안대를 가리키며 마이클이 도혁에게 말했다.
“눈을 가리시죠. 그리고 석 잔의 술 중 우리 증류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위스키 글랜 30을 맞추면 됩니다.”
식사를 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술잔에 집중되었다.
도혁이 안대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