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65화 (165/252)

광고 천재 명도혁 165화

[전 세계 광고인의 축제 칸(CANNE) 국제광고제.]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칸 시상식장.

칸 영화제의 로고가 초대형 스크린에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바로 칸의 상징 레드 카펫으로 수놓은 길이 보였다.

동선을 따라 널따랗게 펼쳐진 레드 카펫을 보자 가슴이 웅장해졌다.

화려하면서도 세련되게 꾸며진 시상식장을 돌아보며 직원들이 감탄했다.

“역시 칸 광고제네요. 12시간 비행기 타고 날아올 만합니다. 아, 뭔가 광고제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이에요.”

“공식 세계 3대 광고제니까. 특히 광고쟁이면 한 번은 와봐야 하는 곳이 칸이라고 생각해. 직접 보니까 감회가 남다르다.”

어지간하면 겉으로 좋은 내색을 보이지 않는 탁기준조차 감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저기 구경하고 사진을 찍느라 모두 정신이 없는 가운데 강태오가 차현우 얘기를 꺼냈다.

“현우한테 미안하네. 다음엔 내가 꼭 데려와야지.”

“현우 선배는 뉴욕이나 클리오 가실 거예요. 곧바로 이어서 수상할 겁니다.”

“그럼 그럼. 하긴 현우는 예전부터 미국 시장에 관심이 많더라고.”

도혁이 끄덕이며 동감했다.

그럼, 미래에 미국 광고계를 찢어버리실 분이니까 당연하지.

그래도 지금 미안한 건 맞았다.

명색이 창업 멤버인데 함께 오지 못해서.

동생 핑계를 대었지만,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회사를 지키겠다고 한 것이 분명했다.

강태오가 씁쓸히 턱을 어루만졌다.

“평생 맏이로 살아온 습관적인 책임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거 보면 친구지만 기특해. 본받고 싶기도 하고.”

“참, 태오 선배는 막내라고 했죠?”

“맞아. 삼 형제 중에 막내. 혼자 어머니 다르고. 배다른 형제라고 들어나 봤나?”

그렇게까지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TMI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닌데. 흠.

침음성을 삼키고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자 강태오가 웃어젖혔다.

“외국에선 재혼이 워낙 흔해서 별일 아니야. 광고제 끝나는 대로 스코틀랜드로 넘어가자고. 여기 해변 보고 감탄하는데 우리 고향 가면 끝장나 버려요. 크리에이티브가 저절로 되는 환경이라니까?”

“대표니이임!!!”

강태오의 고향 자랑을 뚫고 막내 대리들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대표님! 국장님! 저거 황금, 그 황금소 맞죠?”

“맞아. 황금라이언즈 수상자가 가지게 될 트로피. 어때 나한테 어울릴 거 같아?”

“그럼요! 찰떡같이 어울립니다.”

막내들이 동시에 트로피를 드는 척 양손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들었던 팔을 내리기도 전에 다시 명도혁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혁? 명도혁 씨 맞으시죠?”

“그렇습니다.”

시상식장 도착 직전에 통화한 주최 측 안내자가 다가와 도혁을 인도했다.

“칸 광고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미나 강연자는 별도 안내 사항이 있으니 이쪽으로 오세요. 다른 분들은 참관인이신가요?”

“모두 크리에이터입니다.”

“그러시군요. 이쪽의 남자분을 따라가시면 안내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럼 광고제 기간 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안내를 받아 레드 카펫을 지나가는 직원들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멀리서 한수철이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쳤다.

그 소리에 직원들이 모두 입을 모아 명도혁 파이팅이라고 소리쳤다.

“부끄러우니 얼른 가시죠.”

“한국분들은 에너지가 넘치시네요. 패기 있고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명도혁 대표님 우리 광고제에서는 최초의 한국인 강연자인 것 아시죠?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이세요. 최연소 기록도 경신하시겠는데요?”

안내인이 도혁의 프로필을 확인하며 미소 지었다.

“브레인은 얼굴보다 더 젊습니다. 젊은 생각과 감각. 저와 우리 회사의 특장점이죠.”

마흔을 넘긴 브레인이 얼굴보다 젊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며 도혁이 강사 대기석으로 이동했다.

젊은 동양인 남자의 등장에 앉아 있던 노교수들이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그중 한 남자의 눈이 사정없이 커졌다.

“이번 세미나에 강연하실 명도혁 대표님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감각적인 캠페인을 선보이는 젊은 크리에이터예요. 서로 인사 나누시죠.”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면이네요.”

비행기에서 만났던 피에르였다.

“피에르와 구면이시라구요? 저희도 이번에 처음 뵈었는데요. 선생님 강연을 그렇게 부탁드렸는데 끝까지 거절하셔서 서운했어요.”

“나야 나서는 걸 싫어하니까. 전 세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방랑자라서 강연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

“참관인으로서 칸의 발전에 도움되는 말씀 많이 부탁드려요.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이세요?”

안내인의 말에 피에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도혁을 물끄러미 보았다.

“오며 가며 만난 사이라고 해두지. 이 젊은 동양인이 칸에서 강연이라고?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내용을 들으시면 더 오래 사셔야겠구나 느끼실 겁니다.”

“자신만만한데?”

“세상은 넓고 신선한 크리에이터는 넘치는 법이니까요.”

애국 벨 같은 남자 피에르였다.

도혁은 피에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애국심에 웅장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강연 시나리오를 펼쳤다.

“강연 전에 여기서 대기하면 되는 거죠? 내일 열 시 맞습니까?”

“네. 명도혁 대표님 세미나 매진됐어요. 최초의 동양인 크리에이터의 강연이라 그런지 관심이 많네요. 현지 언론에서도 취재하겠다고 하구요.”

약간의 부담이 밀려왔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심호흡한 도혁이 시나리오를 검토하기 시작하자 피에르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럼 나는 나가보겠네. 평범한 평론 지겨웠는데 이번 광고제 평론은 아주 재밌게 쓸 수 있겠어. 주목하도록 하지.”

* * *

외신에서 취재를 나왔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젊은 프랑스인 남자가 로비에서 일행을 맞이한 것이다.

“명도혁 대표님과 DW애드 직원이십니까? 저희는 프랑스 조간지 르 마뗑(Le matin, 아침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능숙한 영어로 인사한 남자가 인터뷰를 신청해 왔다.

“호텔 카페에서 간단한 취재를 하려고 합니다. 동양인으로서 최초로 칸 광고제에 정식으로 노미네이트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두 개의 작품으로 말이죠.”

“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직원들이 ‘올~ 대표님’이라고 수런거리자 도혁이 서둘러 룸으로 올려보냈다.

“국장급은 저와 인터뷰 함께하시고 민아 팀장이 애들 데리고 먼저 올라가.”

“네. 펜트룸 맞죠?”

“올~ 펜트룸! 이야!”

다시 감탄하는 직원들을 최민아가 짐 챙기듯 챙겨서 데려가고, 국장들과 로비의 카페로 이동했다.

“제가 광고에도 관심이 많고 특히, 동양과 한국의 문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울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한 적도 있구요. 때문에 이렇게 특집 인터뷰까지 편성하게 된 겁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지 언론을 통해 우리 광고를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레몬타르트와 에클레어, 그리고 커피를 곁들인 간단한 디저트를 주문한 기자가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보통 일본과 중국 등 동양권 국가에서 생산한 콘텐츠는 동양 특유의 문화를 접목한 크리에이티브가 관심을 끌게 마련인데, 이번 광고제 출품작은 어떤가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죠.”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캠페인을 구성하셨군요.”

“아니요.”

짧게 말을 끊은 도혁이 설명을 보탰다.

“미지의 이미지, 동양의 감성, 제3세계의 독특함을 내세운 크리에이티브는 이제 흔하다 못해 식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전략이 아니죠. 특히나 트렌디한 광고의 세계에서는 통하기 어렵다는 판단입니다.”

“척 보면 탁, 컨셉을 눈치채야 하는 것이 바로 광고입니다.”

도혁의 말끝에 강태오가 부연했다.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팔십 대 노인까지, 이곳 남부 프랑스의 토박이부터 남극에 사는 사람까지 모두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캠페인이야말로 진짜 크리에이티브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식으로 비유를 해보죠. 혹시 한국 음식 좋아하십니까?”

이번엔 강태오의 말에 이어 도혁이 기자에게 질문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나름대로 동아시아 쪽 전문 기자로서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너무 맵고 짜더라구요.”

“가장 많이 권하는 음식이 비빔밥과 김치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김치! 김치 압니다.”

김치를 잘 알고 있다는 기자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피에르처럼 동양인을 무시하지 않고, 한국의 문화에 호의적인 기자조차 먹기 부담스러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에게도 불고기를 짜지 않게 변형한다거나 글로벌화할 수 있는 음식이 많은데 우리만의 개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김치 마케팅에만 주력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저희는 김치 마케팅처럼 한국을 대표하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너무 낯설거나 어려운 이미지는 과감하게 배제했습니다.”

“오, 제가 짐작했던 내용과 상당히 다르네요.”

“인간의 보편적인 감각을 고려한 창작만이 국제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이번 노미네이트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끄덕인 기자가 좀 더 심층적인 질문을 해왔다.

“그래도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싶지 않나요?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을 보면 콘텐츠 안에 어떻게 해서든 코리아의 DNA를 심으려는 모습을 자주 보았거든요.”

“그건 한국 광고가 국제 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난 뒤의 일일 겁니다.”

도혁과 강태오의 눈길이 의미심장하게 마주쳤다.

“현지화된 불고기도 팔고, 국수도 팔고 천천히 한식에 익숙해지면 김치도 곁들여보고 젓갈도 함께 판매되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아. 한국 광고인의 수준을 국제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날이 오면 한국적인 캠페인도 먹힐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결국 시장이라는 건 열리게 마련이고, 강자로서 포식자의 자리에 있을 때 보다 실험적인 시도도 통하지 않겠습니까?”

강태오가 아이스커피를 한 번에 훅 들이켜고는 스타일대로 말해 버렸다.

“일단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팔리는 법입니다.”

“네? 또, 똥이요?”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펜을 놀리던 기자의 손길이 멎었다.

난감한 듯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어대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도는 알았으니 제가 어떻게 잘 손봐서 기사 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참, 내일 강연도 하시죠? 출품한 두 작품에 대한 프레젠테이션과 자유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미리 신청해 두었어요.”

“맞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기자와 인사를 하고 룸으로 올라왔다.

시끌벅적하게 루프탑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멀찌감치 보였다.

도혁은 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는 강연 연습에 돌입했다.

다짐에 찬 눈길로 찬찬히 발표안을 검토했다.

한국인 최초의 칸 광고제 발표였다.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 부담도 부담이었지만…….

‘하루만 지나면 나도 놀 수 있다! 와인 마실 수 있다고.’

시나리오를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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