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64화
비행기에 올랐다.
유선의 몸체에서 뻗은 계단을 오르며 황도준과 도무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왕 가는 것 통 크게 1등석으로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유럽까지 멀어서 어떻게 몸을 구기고 가나 했는데 웬일입니까, 대표님!”
“나한테 말고 강태오 국장님한테 고마워해. 스코틀랜드 워크숍 비용은 한사코 본인이 내시겠다고 해서 남은 일정 럭셔리하게 다닐 수 있는 거니까.”
“이야. 두 분 정말 멋지십니다! 두윈애드 코리아 파이팅!”
들떠 있는 둘을 보자 도혁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참, 도준이 무진이! 비행기 오를 때 신발 벗고 타야 하는 거 알지?”
“아……. 대표님. 그게 아저씨 농담 무슨 일입니까? 저희도 그 정도는 안다고요.”
“진짠데. 일등석 처음 타보나?”
“일등석이 처음이긴 한데. 에이, 장난치시는 거죠?”
“아니라니까. 비행기 탈 때 신발 벗으라는 농담이 인구에 회자되니까 항공사 마케팅 팀에서 적극 검토해서 수용한 거 몰라?”
아재 개그를 던지며 가짜 증거를 제시하자 도무진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최민아가 코끝을 찡긋거리더니 한술 더 떴다.
“제일 앞이 도준이니? 뒤에 사람 많으니까 빨리 벗어. 우리 무진이 일등석은 안 타봤나 봐? 바뀐 지 꽤 됐는데.”
“뭐야. 도무진 아직 신발 안 벗었어?”
결국 손에 운동화를 움켜쥔 황도준, 도무진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소리쳤다.
“대표니임!”
“아, 정말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우린 선전에 의한 설득이 직업인 거 몰라? 직업 정신이 투철했다고 해두지.”
씩씩대며 구시렁대는 둘 사이를 외국인 남자 노인이 비집고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좌석 번호를 확인하더니 도혁의 자리 앞에 섰다.
짐이 많이 보이는 어르신이라 키가 큰 도혁이 일어나 트렁크를 올려 드리려 했다.
“손대지 마. 저리 비켜.”
“네?”
노인은 묘한 억양이 섞인 영어로 도혁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도혁이 씁쓸하게 자리에 앉았다.
‘프랑스 남부 쪽 말투인 것 같은데. 인종차별주의자인가?’
노인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프랑스어로 투덜거리더니 털썩 도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물티슈를 꺼내 사정없이 제자리의 테이블을 닦아대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웃으며 부탁했다.
“손님. 우리 비행기 이륙을 준비 중입니다. 테이블을 접어주세요.”
“뭐? 그럼 깨끗하게 준비를 하든가. 미개하게 더티하니까 이런 수고까지 해야 하잖아.”
“소독을 철저히 실시하고 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손님.”
신입 승무원인지 진상을 상대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흔한 진상 빌런이구만.
도혁이 조소하며 말을 툭 던졌다.
“비행기 사고가 이, 착륙을 기점으로 발생할 확률 92.3%.”
“뭐?”
“테이블이 앞으로 열려 있을 경우 경미한 사고에도 내장이 파열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혁이 짧은 고갯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프랑스 노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슬그머니 테이블을 접어 올리곤 의자를 똑바로 당겼다.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린 승무원이 떠나고 도혁이 칸 광고제의 리플릿을 펼쳐 들었다.
프랑스 노인의 눈이 도혁이 읽고 있는 칸 광고제 문구에 닿았다.
미간을 좁게 좁힌 채 도혁을 바라보더니 영어로 말을 붙여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기세가 죽었지만 여전히 고압적인 말투였다.
“일본? 아니면 중국인?”
“한국인입니다.”
“북한?”
“사우스 코리아, 대한민국입니다.”
한국보다 북한을 먼저 물어보다니. 대한민국 인지도 무슨 일입니까!
도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한류가 하루빨리 자리 잡기를 기원했다.
노인이 호기심 서린 눈으로 도혁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칸으로 가시나?”
“네. 맞아요.”
“칸 광고제 참석하는 건가? 동양인이?”
감히, 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는 눈길이었다.
하긴 한류가 유럽을 집어삼켰을 때도 인종차별이 심했는데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도혁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짤막하게 대답하고 신문을 펼쳤다.
“광고제 구경 가는 젊은이구만. 하긴 선진국의 크리에이티브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나면 발전의 원동력이 될 거야.”
“뭐. 좋은 경험이긴 할 듯합니다.”
“그래. 난 피에르요.”
피에르? 잠깐만. 피에르 앙투안을 말하는 건가?
세계적인 전설의 크리에이터이자 베일에 싸인 사나이 피에르가 이 노인이라고?
전 세계 광고인이 알 법한 거장이지만 괴짜인 성격 탓에 언론에 얼굴이 알려진 적이 없었다.
마침 기내 잡지의 후면에 피에르가 참여했던 명품의 광고가 실려 있었다.
도혁이 손끝으로 가리키며 눈짓을 보내자 노인의 한쪽 입매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오호, 이걸 알아보는구만. 신기한 동양인 친구네.”
“네, 광고하는 사람이니까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뭐, 반가워요.”
떨떠름하게 노인이 도혁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동양인이 자신의 광고를 알아보는 것에 대한 의문인지 불쾌감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국이면 광고 불모지일 텐데. 이상하군.”
잠깐 중얼거린 피에르가 승무원을 부르더니 와인을 시켰다.
“와인 서비스.”
“잠시만요, 고객님. 말씀드렸다시피 이륙 후에 준비 가능합니다.”
“이륙 후 저도 부탁드립니다. 샤또 딸보 주시죠.”
“…….”
와인을 지명하는 도혁을 보고 피에르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동양인이 와인에도 조예가 있나 보군.”
“제공 와인 중엔 좋아하는 편입니다. 포도는 보르도니까요.”
“오호,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구만. 그럼. 보르도가 진리지.”
포도는 보르도라는 카피 같은 말을 남기고 도혁이 한숨지었다.
2018년도에 발매된 10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서.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도혁을 피에르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칸으로 가는 것 같은데. 심사 위원? 아니면 참관인인가?’
도혁은 의문을 거두고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피에르 역시 이륙 후 와인을 한 잔 마시더니 안대를 썼다.
“올~ 기내식. 무슨 일입니까!”
“기내식 먹으려면 손에 비닐장갑 껴야 하는 건 알지?”
“에이, 탁 국장님. 한 번 속지 두 번 속습니까?”
직원들의 속닥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순간 피에르가 안대를 휙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이래서야 1등석 탈 이유가 있나. 승무원, 저기 조용히 좀 시켜요.”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고객님.”
대화 내용이 우스꽝스러워서 그렇지 조용히 말했는데 유난스럽기는.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치는 제 목소리가 더 큰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도혁이 미간을 좁히며 쏘아보자 피에르가 흐음, 침음성을 삼키더니 안대를 고쳐 썼다.
그러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래서 동양인은 안 돼.”
도혁이 안대를 찬 노인을 내려다보며 차게 웃었다.
‘되는지 안 되는지 두고 봅시다. 조만간 세계 3대 광고제를 대한민국이 찢어버리는 걸 보게 될 거니까.’
* * *
이것이 남프랑스의 위엄인가.
일행이 공항을 빠져나와 칸의 해변에 도착하자 모두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야. 바다가 끝내주네요.”
“정말 외국 나온 것 같다. 그치? 이국적이고 운치 있고. 해변 산책로 정말 예쁘다.”
햇살을 받아 일렁이며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모래사장에서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산책로를 따라 아담하게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했다.
해변의 카페에는 일광욕을 하며 커피와 바게트를 즐기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광고제 기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네요.”
“남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지니까 평소에도 많겠지? 참, 소매치기 조심해. 한국 생각하면 안 돼.”
강태오가 직원들의 지갑과 가방을 단속했다.
이진우가 끄덕이며 여권 가방을 앞으로 메었다.
“에이, 이 팀장님, 뭘 그렇게까지 합니까? 시장통에서 생선 파는 아줌마 같잖아요.”
“이진우 팀장이 잘하는 거야. 황 대리 그렇게 백팩 메고 있다가 큰코다쳐. 정말 한국하고는 다르다니까? 소매치기가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고.”
강태오가 황도준의 가방을 앞으로 메어주었다.
도혁도 말을 거들었다.
“강 국장님 말이 맞아. 괜히 여권 잃어버렸다고 징징대지 말고 철저히 단속하도록. 대한민국 여권, 암거래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 알지?”
“그렇습니까?”
여행 가서는 노트북과 핸드폰을 카페에 놓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는 한국의 치안을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도혁이 다시 한번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커피를 주문했다.
“크으. 역시 커피 한잔을 마셔도 프랑스 해변에서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이구, 언제는 제주에서 마셔야 한다더니.”
“그건 그때구요. 이거 프랑스는 커피 향도 남다르네요.”
직원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겼다.
행복해하는 직원들을 보자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뻐근해졌다.
그동안 고생을 좀 시켰어야 말이지.
직업의 특성상 일이 몰리는 PT 때는 극한으로 아이디어를 짜내곤 한다.
돈으로야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편이었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
“긴 워크숍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푹 쉬다가 갑시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특히 우리 막내 대리들, 노는 것 좋아하는데 수고 많았다.”
“일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아니, 노는 게 일하는 거고 일하는 게 노는 거죠.”
“에이, 대표 앞이라고 너무 아부하는 거 아니냐?”
탁기준의 코웃음에 황도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진짜 노는 것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디어 안 나올 때는 힘들잖아. 주야장천 엉덩이 붙이고 쥐어짜는 거 알고 있어.”
“하긴, 그럴 땐 진짜 답답하죠. 제가 부적도 써왔다니까요.”
황도준이 지갑에서 주섬주섬 작은 종이를 꺼냈다.
“이이구. 점쟁이한테까지 간 거야?”
“네. 그래도 효험이 있는지 다음 날 아이디어가 확 풀려서 호도독 시안 완성했었죠.”
노력이 가상하다며 탁기준이 황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절박한 노력이 오늘의 성과를 만든 게 아닐까.
도혁은 새삼 직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울컥했다.
“아무튼 멀리 왔으니까 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잘 놀다가 갑시다. 뭐 발표하는 나를 제외하곤 다들 한가하잖아? 모두 즐기시죠.”
“참, 대표님 스코틀랜드에서 무슨 영업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것도 내가 할 거야. 다들 걱정 말고 편안하게 광고제 보고, 해변에서 놀다가 갑시다. 스코틀랜드는 태오 선배가 안내할 거고.”
그 말을 들은 강태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광고제 끝나면 각오하라고. 엄청난 게 기다릴 거니까.”
“올~ 뭔데요? 기대되는데요?”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지. 참, 명 대표 발표 준비는 잘 돼가?”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하며 도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노미네이트만으로 만족했는데, 꼭 칸라이언즈 따야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고 싶어졌거든요.”
도혁은 동양인 어쩌고 무시하던 피에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찡그렸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지, 해외에서 애국심이 몇 배는 불타오르는 도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