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62화 (162/252)

광고 천재 명도혁 162화

“인쇄 광고의 가장 큰 장점은 집중입니다.”

“집중이라.”

“그렇습니다.”

인턴이 마른 입술을 한번 꾹 다물곤 다부지게 대답했다.

“인쇄 광고는 다른 매체와 달리 시각만을 자극합니다. 시청각을 자극하는 영상물이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프로모션 조형물 등에 비해서 불리한 조건이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각에만 매달리기에 오히려 그 자극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오감 중에 하나만 열려 있기 때문에 소비자 역시 더 집중해서 광고를 보고 효과도 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혁이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거의 맞췄습니다. 인쇄 광고의 가장 큰 힘이 바로 소비자가 집중해서 본다는 것이죠. 하지만 한눈에 시선을 끌지 못한다면 덮으면 그만인 부분은 약점이겠네요. 그렇죠?”

“맞습니다.”

“본인이 발표한 시안이 한눈에 시선을 끌었다고 생각합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화재라는 사건을 비틀자는 아이디어가 처음 나왔을 때 조금 소름이 돋았거든요.”

“맞아요. 창작자의 소름이 소비자에게 신선하게 다가올 때 광고인의 진짜 크리에이티브가 완성되는 겁니다. 잘했어요.”

PT 중이었기에 인턴들 칭찬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는데 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도혁의 마음에 쏙 드는 시안이었다.

황도준이 흥분한 심사 위원을 말리기라도 하듯이 다음 순서를 진행했다.

“자, 그럼 소란한 실내를 조금 정돈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기, 전에 잠깐 쉬어갈까요? 다들 차 한잔 마시고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심사 위원들이 최민아에게 몰려들었다.

“이럴 거야? 시안 직접 만든 건 아니지?”

“그건 반칙이잖아요. 인턴들이 했어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화재 사건 사진 조금 변형해서 쓰라고 말했을 뿐인데, 뭐.”

“처음 아이디어도 인턴이 낸 건가? 이거 냄새가 나는데?”

“맡아봐야 그릴 냄새지.”

“그릴 얘기하니까 확 땡기잖아. 그런 의미에서 빅시 버거 시켜 먹을까?”

“좋지!”

간식을 먹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마지막 강태오 팀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발표 끝나고 먹을 걸 그랬네요. 이 팀 발표자는 긴장해서 햄버거 제대로 못 드셨겠어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두 개 먹고 감자튀김도 남김없이 잘 먹었는걸요.”

어딘가 모르게 강태오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발표자였다.

발표 전에 햄버거를 두 개나 드셨단다.

도혁은 여유 넘치는 마지막 팀 발표자를 격려했다.

“끝나면 퇴근이니까 얼른 해치웁시다. 자, 파이팅하고 시작하세요.”

“파이팅!”

우렁차게 파이팅을 외친 남자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퇴근을 당겨 드릴 마지막 팀 발표자입니다. 짧고 굵게 분석 딱, 광고 딱. 쿨하게 발표하고 마치겠습니다.”

“좋습니다.”

패기에 찬 발표자가 화면을 오픈했다.

“저희가 준비한 캠페인은 공익 광고입니다.”

오호, 심사 위원들의 기대감이 배는 올라갔다.

국내외 광고제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얻고 수상하는 것이 바로 공익 광고였으니까.

역시 경험이 많은 강태오가 훈수를 뒀을 것이다.

도혁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발표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의 컨셉은 피입니다. Blood.”

순간 화면이 핏빛으로 물들고 교통사고의 현장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희는 이 교통사고 발생에서 두 가지 모습에 주목합니다. 하나는 음주로 인한 사고, 다른 하나는 운전 중 통화에 의한 사고입니다.”

더 처참한 영상이 이어졌다.

외신과 국내 뉴스를 조합한 영상물 하나만으로도 심각성을 강력하게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교통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소방대원이 아이를 구하지 못해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 아이가 쥐고 있던 곰 인형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 인형을 클로즈업하고 영상이 끝났다.

“매년 음주와 핸드폰 사용에 의한 부주의로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표자는 화면을 전환해 통계를 보여주었다.

음주 운전과 운전 중 핸드폰 사용에 의한 조작 미숙으로 이어진 사고의 수치였다.

“이 두 사고의 공통점은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운전자의 상식 부재, 즉 캠페인을 통해 반드시 개선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입니다.”

영상을 함께 보던 발표자가 심사 위원 쪽으로 몸을 틀어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희는 이 점에 착안해 공익 광고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 충격적인 비주얼을 그대로 쓸까도 생각했지만 우리 팀은 더 시선을 끌 만한 충격을 시도했습니다.”

“곰 인형도 충분히 괜찮은데요?”

“조금 무난한 느낌이라서요. 국제 광고전이기에 좀 더 창의적이고 임팩트 있는 장면을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감성 소구로 갔어도 괜찮았겠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봤단다.

도혁이 의자에서 등을 떼어내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강태오였으니까.

“첫 번째 시안입니다. 여기 피가 있습니다.”

Blood. 하얀 화면에 핏빛으로 붉게 적힌 글자가 사라지며 새로운 영상이 펼쳐졌다.

피로 만든 핸드폰 + 피로 만든 자동차 = 피로 만들어진 쓰러진 사람의 모습.

흰 바탕에 깔끔하게 얹은 핏빛 비주얼이 깨끗해서 오히려 처연했다.

사람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최민아 팀에서 만들었던 것처럼 한눈에 메시지를 관통하는 간결함이 돋보였다.

아주 좋은 인쇄 광고였다.

“아, 정말 좋네요.”

“이게 크리에이티브지.”

심사 위원석과 참관한 인턴들의 감탄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발표자가 충격이 채 가기도 전에 다음 시안을 펼쳐 보였다.

“다음 시안입니다.”

긴말 할 것 없다는 듯 짧게 말을 끊은 발표자가 화면을 전환했다.

이번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인쇄 광고였다.

차 안의 한 여자가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다른 손에는 술병을 들고 마시려 하고 있는 모습.

그런데 술병이 핏빛의 붉은 색이다.

마치 술병이 피를 토하기라도 하듯이 여자의 얼굴 쪽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그걸 피하는 사람의 표정이 역동적으로 그려졌다.

마치 정말로 피를 피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사 위원석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혁 역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시안을 바라보았다.

카피조차 없는 한 장의 사진.

이 사진을 1초 바라봄으로써 단번에 광고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녹색 계열의 여자 옷과 붉은 피가 섬뜩한 대조를 이루었다.

미친 색감이 도드라진 비주얼 충격에 충격을 더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차현우가 볼멘소리를 했다.

“이건 명백한 반칙인 듯한데. 발표자 솔직히 말해보세요. 멘토가 이 시안에 몇 퍼센트 기여했습니까?”

“글쎄요……. 한…… 70퍼센트…….”

“에이!”

“80…… 퍼센트 정도일까…… 요.”

“에헤이!”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된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당사자가 나섰다.

“일단 참관 인턴들은 나가시고 우리끼리 얘기합시다. 얘들아 나가봐. 내가 수습할 테니까.”

“그렇게 합시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심사해야 하니 인턴들은 퇴근해도 좋습니다. 최종 결과와 심사평은 내일 발표하도록 할게요.”

인턴들을 보내자 강태오가 본색을 드러냈다.

멘토도 팀의 일원이라며 뻔뻔하게 나왔다.

“돌아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잖아. 뭐, 내가 다 했어.”

“어허, 멘토가 적당히 관여해야죠. 인턴팀 프레젠테이션이었잖아요.”

“적당히라니. 그래서 칸을 어떻게 먹나? 기를 쓰고 덤벼들어도 꼴찌 상 하나 받을까 말까 한데.”

툭 뱉은 말이었지만 말끝에 힘이 실렸다.

“여기 계신 분들이 인종차별 안 당해봐서 적당히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내가 외국에서 살아봤잖아.”

“하긴. 국대 무대에서 정당하게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도혁도 가장 걱정한 부분이었다.

이전 삶에서 한국 대학생들이 국제 광고전에서 두각을 보인 때보다 상당히 앞선 시점이었고 동양인 인종차별이야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광고인들이니 좋은 크리에이티브를 외면하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강 국장님이 보시기에 어때요? 아직 한국이 수상하긴 시기상조입니까?”

“시기상조라. 크리에이티브에 그딴 건 없지.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다른 선진국보다 몇 배 더 뛰어나야 한다는 거야. 열 배, 스무 배, 모두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작품이 나와줘야 겨우 끄트머리 상하나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게 내 예상이지.”

“흠.”

침음성을 삼키며 도혁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다른 심사 위원들 생각도 비슷한 듯했다.

“전력으로 붙어도 수상이 쉽지 않은 상태인데 페널티를 적용하지 말아달라는 거군요.”

“그렇지. 그리고 애초에 직원들 역량 키우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었잖아. 국제 감각 키우자면서요.”

“맞아요. 그 부분이 제1목표기는 했죠.”

“솔직히 봐봐. 최민아 팀도 최민아가 다 했을걸? 한수철은 아닐 거 같아?”

강태오가 매섭게 눈을 번뜩이자 둘 다 황급히 눈빛을 피했다.

“둘 다 솔직히 말해봐.”

“멘토니까 당연히 도울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관여를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아무래도 인턴보다는 많이 아니까요.”

“뭐, 아이디어 도출 과정이 그려지기는 하는데…….”

“대표님도 아이데이션 혼자 하드 캐리할 때 많잖아요. 선수끼리 왜 이러세요. 한 번만 봐주세요.”

한수철과 최민아가 애절하게 눈을 끔뻑이자 탁기준이 호통을 쳤다.

“아우, 징그러워. 어디 팀장이나 되는 것들이 눈을 그렇게 떠! 목소리 톤 안 바꾸냐?”

“봐주세요. 심사 위원님. 솔직히 탁기준 선배님도 멘토 때 엄청 간섭하셨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하긴. 탁기준도 인턴 팀원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아이디어에 관여했었지.

결국 멘토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의 문제인데.

도혁이 결심한 듯 일어서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이렇게 합시다. 처음부터 멘토의 역할에 대한 규칙을 정하지 않은 만큼 기여도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습니다. 측정이 모호한 부분도 있구요.”

“그렇치! 잘한다, 우리 대표님!”

강태오가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다른 멘토 둘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그럼 지금부터 순수하게 작품성으로만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절대평가 방식으로 진행할게요. 기획과 아이디어의 신선함, 시안의 퀄리티, 크리에이티브의 완성도, 주제의 수상 가능성 등 항목을 나누어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없었나요?”

“카피가 좀 아쉬웠는데 이건 명 대표가 보완할 거라고 믿고 있어서.”

또 강태오가 뻔뻔하게 나왔다.

다른 두 팀 멘토 역시 끄덕이는 것이 같은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영어 카피로 바꿀 거고, 대표가 카피 선순데 알아서 하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임했지 뭐, 비주얼 좋으면 카피 만들어줄 거잖아.”

“아우, 한수철! 민아도 같은 생각이었구만.”

“맞아요. 시간이 너무 없었다구요. 대표님 믿고 대충 썼어요.”

최민아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아버렸다.

도혁이 셋을 번갈아 노려보며 보드 마커로 화이트보드를 툭툭 두드렸다.

“이 맛에 대표하지. 어?”

“죄송해요. 대표님.”

“좀 봐주라. 명도혁 대표니이임~.”

이번에는 강태오가 최민아를 흉내 내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자 모두 소스라쳐 그를 진압했다.

“그, 그만! 제발요! 아씨 오그라들어.”

“강태오 이 자식 죽을래! 목에 힘 안 빼냐?”

“명 대표님! 빨리 심사 진행합시다!”

이보다 더 소란할 수 없는 심사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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