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56화
탁기준이 자신의 과거 모습을 부정하는 가운데 한수철이 큰 소리로 입을 떼었다.
“인턴들 다 오셨습니까? 기획팀 AE 한수철입니다. 대표님 특별 지시로 인턴 멘토를 담당할 예정입니다. 지금부터는 편의상 반말로 진행할까 하는데 어떤가?”
“네. 당연히 괜찮습니다. 선배님!”
인턴십의 첫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한수철이 군기를 잡고 있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인턴십 시작하지. 여기 광고 동아리 아니다. 실전 투입된 거니까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바로 도태된다. 선착순 달리기 알지? 그렇게 달려서 살아남는 인턴이 정직원이 될 예정이다. 오케이?”
“네.”
“목소리가 작은데?”
“네! 선배님!”
회의실 맨 뒷자리에서 참관하던 탁기준이 도혁에게 속삭였다.
“와, 진짜 내가 저랬다고? 도저히 못 봐주겠는데.”
“훨씬 심했죠. 들어오자마자 반말했잖아요. 여기 웃기지도 않네. 어디서 선배한테 눈을 치뜨고 어쩌고 하면서.”
“이렇게 보니까 흑역사가 따로 없구만.”
떨떠름해하는 탁기준과 달리 한수철은 아주 신이 났다. 순한 맛 탁기준으로 변해 버렸다고나 할까.
“길게 말할 거 없이 광고 영업을 배우기 제일 좋은 미션을 지금 바로 수행할 거야. 여기서 살아남은 친구들만 우리 인턴 과정의 정규 수업과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 거다.”
“미션이요?”
“그래. 라디오 들으면 마지막에 붙는 상품권 협찬 광고가 있지?”
잠깐 상품권에 대해서 설명한 한수철이 곧바로 인턴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자, 알아들었으면 빨리 뛰어가서 상품권 광고 두 개 만들어 옵니다. 알겠습니까?”
“넵! 선배님!”
인턴들이 후다닥 뛰어 나가고 도혁이 한수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추억에 젖은 건 알겠는데 애들 적당히 잡아라. 꼰대 같잖아.”
“선 잘 탈 테니까 걱정 마. 내가 탁기준 팀장님이냐?”
“여러모로 비슷했어.”
“이런!”
탁기준과 한수철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격동의 인턴십 첫날이 시작되었다.
* * *
인턴들이 자리를 뜬 후 태강애드 인턴십을 했던 멤버들이 모여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광고에 막 입문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었다.
“인턴들 바람과 함께 사라졌네요. 저 때 정말 막막했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상품권 광고라니, 으.”
“어머, 그렇게 치를 떨면서 애들한테 그대로 시킨 거예요? 원래 시집살이도 해본 사람이 더하다더니 정말 그러네.”
최민아의 말에 도혁과 탁기준이 상품권 광고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협찬이 사소해 보여도 광고 영업의 진수를 담고 있다고. 대일이나 태강에서 괜히 신입들한테 상품권 광고 따 오라고 미션 주는 게 아니야.”
“작고 소중하죠. 지금 지역 광고 라디오 한 띠(한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광고 1개)에 십만 원 정도 합니까?”
“맞아. 띠는 더 넣어도 되지 뭐. 들어가기 나름이니까.”
“우리 인턴들이 저처럼 미션을 오버해서 따와야 할 텐데요.”
탁기준이 턱도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명 대표가 일레라 광고 따 온 건 레전드고. 십만 원짜리 상품권 영업해 오랬더니 일레라 가구 이미지에 시즌 광고까지 따 왔잖아. 지금 이렇게 기다리는데 어떤 놈이 가구 회사 통째로 물어왔다고 생각해 봐.”
“와우, 진심 땡큐네요.”
“그때 태강 직원들이 얼마나 놀랐겠냐. 기획팀장님은 보고 듣자마자 마시던 커피까지 뿜었다니까.”
두런두런 예전 추억을 나누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그건 그렇고 이번 인턴십에서 국제 광고제 진행하기로 한 건은 진행에 차질이 없겠어?”
도혁이 광고제 얘기를 꺼내자 한수철이 현실적인 부분을 짚었다.
“국제 광고제에 출품하려면 기회비용이 제법 들어. 명 대표가 말한 대로 국내에선 한국방송광고공사 공모전에 주로 나가고 있지.”
“회사 차원에서 지원하는 거야.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거라고 할까?”
“인턴과 회사의 비전에 투자한다는 건가?”
“맞아. 광고제 출품 때문에 인턴십 뒤에 아카데미 글자 붙여놓은 거야. 궁극적으론 후계 양성에 욕심이 있기도 하고.”
도혁은 어렴풋이 다시 살게 된 시간이 알고 있는 미래와 다른 세계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 사는 인생과 그가 활용해 온 광고들에 대해 보답하고 싶어졌다. 후계 양성이라는 생산적인 형태로 말이다.
도혁이 출입구에 세워진 배너의 글자를 가리켰다.
[DW애드 코리아, 인턴십 & 아카데미]
“크, 아카데미는 볼수록 그럴듯해. 광고 인재를 현업에서 집중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이 전무하잖아?”
“이 아카데미를 통해 선제적으로 고급 인재를 양성할 겁니다. 국제 광고전 참가는 그 프로젝트의 일환이 될 거구요.”
“수철이 말대로 매몰 비용이 있는데 괜찮겠어?”
“출품에 드는 시간과 물리적 비용 대비 얻어갈 게 많다는 판단입니다. 실전에서 캠페인 하나를 완성해 보는 경험과 더불어, 수상하게 되면 국내 최초가 될 거구요. 우리 직원들도 함께 참여함으로써 국제적인 감각을 키울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크죠.”
최민아가 국제 광고제에 DW애드 직원들의 역할을 물어왔다.
“참, 직원들은 멘토로 참여나요?”
“어떻게 할까. 태강처럼 잔인하게 내부 PT로 인턴팀, 기성팀 경쟁시킬까?”
“인턴, 기성 섞어서 팀 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인턴 할 땐 몰랐는데 막상 직원 입장이 되니까 태강애드 정말 잔인했네요. 인턴팀에 지면 얼마나 부담스러워.”
최민아가 치를 떨자 탁기준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가를 쓸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기획1팀 말고 인턴팀이랑 PT했잖아. 기성팀은 잘해봐야 본전이거든.”
“그래서 배신자 소리 들으셨잖아요.”
“솔직히 이제 와서 말이지만 명 대표가 이길 줄 알았어. 확신 같은 게 팍, 꽂혔다고.”
역시 감이 좋은 탁기준이었다.
도혁이 그의 감에 기대어 인턴십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어때요? 이번엔 확신이 드십니까? 우리 인턴들, 국제 광고전 나가도 괜찮겠어요?”
“흠, 명 대표가 크게 착각하는 게 있어.”
“착각이요?”
도혁이 한쪽 눈썹을 치키자 탁기준이 웃으며 대꾸했다.
“명 대표 같은 인턴은 다시 나타나지 않아. 내 한수철이 손모가지를 걸고 장담하지.”
“걸 거면 팀장님 손목을 거시지 왜 내 손을!”
한수철이 제 손목을 어루만지며 어이없어했다.
“명 대표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거라는 기대 하는 사람 있어?”
“에이. 그건 불가능하지.”
“이번 생에는 명 대표로 만족. 다시 태어나야지.”
직원들의 말에 도혁이 손사래를 쳤다.
“왜 갑자기 비행기 위로 띄우고 그러십니까? 어질어질합니다.”
“사실이니까요. 처음에 같은 팀 됐을 때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니까요?”
“나도. 친구지만 미친놈이구나. 생각했지.”
“광고에 미친 놈은 맞지 뭐.”
직원들 말에 도혁이 대답하자 웃고 있던 탁기준의 눈가에 웃음이 걷혔다.
“맞아. 광고에 미친 사람. 그리고 우리 전부 미쳐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지. 저건 압도적 생산성을 가진 천재구나.”
“맞아요.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천잰데 게으르지 않아서 국수 가락처럼 명품을 쭉쭉 뽑을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러니까 우리 전부 대기업 뿌리치고 명 대표한테 붙은 거 아니냐. 결과적으로 완전 잘된 거지. 태강 재낀 지 좀 됐잖아?”
대기업 대신 명도혁을 선택해 준 직원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심지어 직원들이 만족한다니 대표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뭉클한 마음에 눈가가 젖어 들려 하자 일부러 장난을 쳤다.
“광고 찍어내는 기계라는 말씀이시죠?”
“좋지! 진짜 기계처럼 찍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하면 되죠. 우리에겐 광고 기계 명도혁 대표가 있잖아요.”
“가둬놓고 시안 나올 때까지 만두만 먹여!”
장난을 치고 있는데 한 인턴이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저, 광고 사 왔는데요.”
* * *
광고를 사다.
이 광고대행사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도 인턴들이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도혁은 물끄러미 인턴을 바라보았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학생이었지만 특이점이 있었다.
그가 찬 메탈 시계가 명품이라는 것이다.
저 나이에는 접하기조차 어려운 브랜드. 성공한 사업가인 명도혁조차도 사기 벅찬 가격이었다.
직원들을 내보내고 도혁이 인턴과 면담을 시도했다.
“앉아요. 광고를 사 왔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죠?”
“말 그대로예요. 구매했다고.”
이 자식, 말끝이 짧다?
황당해진 도혁이 고개를 기울여 그를 찬찬히 보았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인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빠네 비서한테 말해서 광고 사라고 했어요. 라디오 상품권이라니까 갑갑해하던데요. 그런 거 왜 시키냐고.”
“아버님이 누구시지?”
“왜요. 우리 아버지 덕 좀 보게요? 에이 씨, 이래서 내가 어디 가서 아빠 얘기 안 하는데.”
거들먹거리는 꼴에 정말 저 인턴의 아버지가 궁금해졌다.
뉘 집 아들이기에 저렇게 건방진지.
“제와제와 아시죠? 그 회사 우리 아빠 거예요.”
“아, 제와제와. 알죠.”
곧 망할 중견 잡화 업체를 왜 모르겠습니까.
사업만큼 자식 농사도 망친 모양이었다.
도혁이 팔짱을 끼곤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걸 본 인턴이 어깨를 으쓱했다.
“라디오나 TV도 생각 있으면 말씀하세요. 또 사 오면 되니까.”
“편리하네요. 왜 인턴을 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편의적인 대답이야.”
“마케팅 배우라고 아버지가 하도 그래서 찔러봤죠.”
“찔러본 기분은?”
“재밌을 것도 같고 귀찮을 것도 같고.”
더 들을 거 있나? 찔러봤다는데 찔릴 생각 같은 건 없어서 말이지.
“나가.”
“네?”
“인턴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와씨, 지금 쫓아내는 겁니까? 라디오 상품권 해 오라면서. 그래서 사 왔더니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구만.
인턴은 분한 듯 말을 멈추지 않고 퍼부었다.
“광고 회사라고 해봐야 결국 하청 아니야? 평생 우리 아빠처럼 기업 하는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거잖아.”
“계속해 봐.”
“그러니까 하청답게 굴라고. 내가 광고주 아들이라는 걸 알려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손해 아닌가?”
제와제와랑 원수진다고 딱히 손해는 아닙니다만?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키가 큰 도혁의 그림자가 인턴을 덮었다.
도혁이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털며 노려보았다.
인턴이 놀랐는지 몸을 움찔했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지금 위협하시는 겁니까?”
“아니, 옷에 먼지가 묻어서 털어주는 겁니다만?”
“네?”
“다 털었으니까 나가. 우리가 제와제와 광고할 일도 없고, 더불어 너하고 나 다시 볼일도 없으니까.”
“당신 명도혁! 내가 기억할 거야.”
“그러시든지. 난 옷 털어준 죄밖에 없어서 말이지.”
씩씩 콧김을 뿜으며 인턴이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흔한 광고주 2세의 유세와 갑질은 전생에 물리도록 봐왔던 터였다.
이젠 진짜 갑인지 빈껍데기 강정인지 척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것 또한 두 번째 인생의 큰 소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롤을 털어내고 느긋하게 등을 의자에 파묻었다.
사이다라도 한잔 마실까 고민하고 있는데 대표실 문이 열렸다.
황도준과 또 다른 인턴이 서 있었다.
“저기 대표님, 이 친구도 광고를 사 왔다는데요.”
이번 인턴들 돈 많네.
도혁이 일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치익, 사이다를 따곤 인턴을 돌아보았다.
“그래, 어떤 광고를 어떻게 사 왔는지 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