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55화 (155/252)

광고 천재 명도혁 155화

“탁 팀장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권아영 대표한테 차였죠?”

“에헤이!”

권아영을 보내고 아저씨 같은 탄식음을 여러 번 뱉으며 탁기준이 몸서리쳤다.

“에헤이, 그런 게 아니에요. 저렇게 예쁜 얼굴로 웃고 있지만 뱀처럼 간악한 여자라니까.”

“항상 예쁜 건 인정하시네요.”

“뭐, 외모야 지적이기도 하고 소속사 연예인들보다 낫지. 아무튼 그건 그거고 저 얼굴에 속지 말라 이거야.”

탁기준이 그래도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 대표가 진짜 대처 잘했어. 난 이거 어쩌나 했다니까? 콜라보 제안 거절하면 가슴에 한을 품을 거고, 수락하면 우리 인턴 중에 괜찮은 애들 무슨 일이 있어도 빼돌릴 여자야.”

“아, 제가 이틀만 콜라보 하자고 제안한 거요?”

권아영이 만만치 않은 여자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탁기준의 말처럼 간악한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운영하는 매니지먼트의 스무 배는 자산을 불릴 CEO였으니까.

하여 인턴십을 각각 진행하되 이틀만 방송국 견학과 서로의 회사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기획을 만들어내다니 아무튼 대단해.”

“매니지먼트 사업과 광고대행사가 콜라보를 할 만큼 연관성은 없으니까요.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특히 방송국 쪽은 우리보다 권 대표가 정통하잖아요. 그쪽에서 알아서 진행하지 않을까요?”

“이야. 천하의 권아영을 이용하는구만. 이런 거 보면 명 대표도 무서운 사람이야.”

“무서울 거야 있나요.”

경험이 조금 많을 뿐인걸요.

도혁은 속으로 말을 삼키며 고요히 웃었다.

마흔 넘게 광고를 만들어온 경험, 사회생활에서 버틴 시간.

허무하다고 여겼는데 쓸모없이 버린 인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혁이 탁 기준을 보며 인턴십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인턴십 관련해서 간단히 기획한 게 있는데 같이 보시겠어요?”

“어떤?”

“이번엔 팀을 나눠서 멘토를 한 명씩 넣구요. 해외 광고제를 노려볼까 해요.”

“세계로 뻗어가는 DW애드인가. 좋네. 칸이나 클리오 어때? 학생들한테 좀 유연한 편이잖아?”

때마침 인턴들의 멘토가 될 한수철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수철이 잘 왔다. 우리 명 대표가 프랑스 칸 광고제 가잔다.”

“갑자기? 아, 인턴십 말하는 거구나.”

한수철이 광고동아리 애드포인트 때처럼 눈을 빛냈다.

한창 공모전에 사족을 못 쓰고 덤벼든 시절이 있었지.

도혁과 한수철이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

일 년 가까이 인턴십과 함께 국내 공모전을 휩쓴 전력이 있는 둘이었다.

“애들 데리고 공모전 한번 쓸어봐? 이거 손가락이 벌써 간지러운데?”

“헉, 방금 수철이 눈에서 광기를 읽었는데 나만 소름 돋냐?”

“저도요. 누가 올지는 모르지만 이번 인턴들, 각오 단단히 해야겠는데요? 우리 태강애드 시절만큼 힘들지는 않겠지만요.”

“에이, 명 대표님 내가 갈구면 얼마나 갈궜다고 이러세요~.”

너스레를 떠는 탁기준과 의욕이 넘치는 한수철이 함께 인턴십 공고를 올렸다.

[어서 와, 인턴은 처음이지?

Do win의 ‘Win-Win’ 프로젝트, 인턴과정 모집.

분야별 AD형 인재 절찬 수집 중.]

한 줄 한 줄 모집 공고를 써넣던 한수철의 입꼬리가 쓰윽 말려 올라갔다.

* * *

“빛과 함께 세상이 따뜻하게 빛나요~ 세상을 향해 불을 밝히는 빛, 세상 끝까지 달려가는 아름다운 빛~”

전국 곳곳에 빛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TV를 틀어도 라디오를 켜도 들려오는 한국전력공사의 홍보송.

심지어 초등학생들은 동요처럼 따라 부르고 있었다.

DW애드 코리아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전력공사 로고송이 흘러나왔다.

“빛과 함께 세상이 따뜻하게 빛나요~ 으으음.”

“세상을 향해 불을 밝히는~ 으음.”

직원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노래를 부르자 돌림노래처럼 누군가 따라 불렀다.

최민아가 차를 마시다가 웃음이 터져 버렸다.

“어쩜 이렇게 음치들이 많은지. 대표님 닮아서 그렇잖아요.”

“하아, 단체로 보컬 학원이라도 다녀야 하나? 간단한 한국전력 CM송도 못 따라 부르니, 원.”

“노래 실력이 중요한가? 광고가 중요하지.”

“하긴. 광고쟁이가 노래까지 잘하면 반칙이겠죠?”

도혁은 미소 지으며 전국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한국전력의 CM송을 다시 흥얼거렸다.

마침 TV에서 전구를 의인화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만화냐, 실사냐로 세 차례나 한국전력 측과 회의를 거듭한 끝에 실제 CF를 찍기로 했다.

중견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다.

“이번 CF는 다시 봐도 뭉클해요. AT 케이블 할머니 광고는 마지막에 웃음 포인트가 있는데, 이건 끝까지 은은한 여운이 남아요.”

“2차 시리즈 CM송 광고를 곧바로 내보낸 것도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노래는 직관적으로 각인이 되니까.”

“원래 기업 이미지 광고는 와르르 푸는 게 나아. 찔끔찔끔 매체 집행해 봐야 머리에 남지 않으니까.”

도혁이 CF를 마지막 장면까지 확인하곤 차현우에게 추가 프로모션 일정을 물었다.

“국토 동서남북 끝단으로 푸드트럭 보내기로 한 거, 일정 나왔어요?”

“어제 광고주와 날짜 픽스했어. 참, 그리고 명 대표한테 따로 연락한다고 했는데 들었어? 이번 프로젝트 장기적으로 연장하고 싶어 하더라고. 희망트럭을 정례화해서 전국을 국토 순회하듯이 시즌별로 돌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시던데.”

“네. 어제 통화했습니다. 공사이다 보니 공공사업에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겠다고 하더라구요. 저희로서는 정말 잘된 일이죠. 정기 사업으로 안정적 수익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 제법 큰 광고주들을 연이어 수주하며 수익과 업무가 적정 궤도에 올랐다.

사업은 확장해야 할 때가 있고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가 있는데, 대표는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더 이상 광고주를 영입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하여 이 시기에 내적 역량을 강화하고 인력 보강을 위한 인턴십을 추진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엄청난 젊은 인재들이 지원했다. 이진태 교수 역시 P대 장학생들만 뽑아 보냈고 S대도 제법 있었다.

서류 심사 당일, 팀장급과 멘토로 활약할 한수철이 회의실에 모였다.

도혁이 서류를 훑어보며 강조했다.

“지금부터 서류 심사할 텐데, 고졸도 상관없어요. 대학생이라는 단어를 뺀 건 학벌과 상관없이 실력만으로 뽑으려는 의도입니다.”

“괜찮겠어? 그러다가 핵심 인재 다른 회사에 뺏기면 어떡하냐.”

“크리에이티브에 학벌이 무슨 상관입니까? 해외에는 고졸 크리에이터 스타도 많잖아요.”

“하긴. S대 나와도 별거 없지 뭐. 나 봐라. 다를 거 없잖아?”

탁기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도혁이 그건 또 아니라며 반박했다.

“S대 출신에게 줄 가산점은 성실성이죠. 어쨌든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다는 건 학창 시절을 열심히 보냈다는 방증이니까요. S대에게는 성실함에 있어 가점을 줄 거예요. 성실성을 인정하되 딱 거기까지만 판단할 겁니다. 고졸이라도 충분히 창의성은 좋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웬만한 광고대행사엔 지원조차 못 하잖아요.”

“맞아. 출입문부터 막힌 건 공평하지 않지. 명 대표 의도 충분히 알아들었어. 오케이!”

호쾌하게 오케이를 외쳤지만 책상 가득 놓인 지원서를 바라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팀장급들이 심사하기에 벅찰 정도의 양이었다.

“이럴 때 보면 우리 회사 진짜 자리 잡은 것 같다. 지난번 신입 사원 공채 때보다 지원자가 몇 배는 더 늘었어.”

“아직 멀었죠. 더 씹어 먹어야죠. 1등 할 때까지.”

“와우. 1등!”

강태오가 광고공사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흔들어 보였다.

아, 대한민국 1등? 도혁이 속으로 말을 곱씹으며 피식 한번 웃고 말았다.

남들보다 두 배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이 조그만 나라에서 만족할 수야 있나 지구 정도는 씹어줘야지.

물론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서 지금 조그만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서류 심사를 마친 팀장들에게 도혁이 국제광고제에 대한 뜻을 내비쳤다.

“아까 잠깐 AE들과 얘기 나눴었는데, 이번 인턴십 과정에서 두각을 보인 팀이 국제광고제 참가하면 어떨까요?”

“오! 클리오나 칸? 이야, 포부가 남다른데?”

“네. 팀별로 멘토가 하나씩 붙어서 지도해도 되고, 탁월한 친구들이 있으면 그 팀을 밀어주면 좋을 듯합니다.

“미래의 인재도 키우고 우리 회사 명성도 높인다? 좋은데?”

차현우가 누구보다 눈동자를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당장 현우 선배 동생만 봐도 한국 학생들 아이디어가 넘치잖아요. 그런데 보면 광고공사 공모전만 참가하고 있단 말이에요. 좀 아까워서요.”

“아주 좋은 생각이야. 국제광고제를 회사 명성 걸고 참여하긴 쉽지가 않거든. 진입 장벽도 높고.”

“맞습니다.”

“그런데 모든 과정을 영어로 진행해야 해. 언어 장벽이 있는데 어떻게 해결할 건가?”

‘저 영어 전공이잖아요.’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전공을 말할 뻔했다.

서둘러 입속으로 말을 삼키곤 영어 가능자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를 파고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 강태오가 눈에 들어왔다.

“어! 강태오 선배 영어 잘하지 않나요? 해외에서 태어났다면서요.”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쓰기는 하지만 못하진 않지. 그렇게 말하는 탁기준 팀장이야말로 영어 잘하지 않아?”

“나도 못하진 않지. 나름대로 대입 영어는 만점이었다고.”

“그럼 탁 팀장님이 서류 검수하고, 통역은 강 팀장님이 하는 걸로 진행할게요. 참, 제도적으로 무리가 없는지도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차현우 선배가 인턴이 영크리에이터 부문에 참가 가능한지 각 광고제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봐 주세요.”

“오케이. 혹시 무리가 따르면 어떻게 진행할까.”

“아카데미로 개설해야죠. 인턴&아카데미 과정으로 개설해서 광고제 출품하면 될 듯합니다.”

인턴십 과정의 큰 틀이 완성되었다.

이제 DW애드에 꼭 맞는 인턴들이 들어오는 일만이 남았다.

인턴십 과정의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50명의 인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혁과 탁기준이 회의실의 뒷자리 벽에 기대어 감회에 젖었다.

“이야, 명 대표랑 수철이 인턴으로 어리바리 들어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제가 어리바리하지는 않았죠. 수철이면 몰라도.”

“하긴. 단연 탁월했어. 뭐 이런 또라이 같은 천재가 다 있나, 신기했었지.”

“그랬습니까?”

“내가 첫날 상품권이랑 일레라 라디오 따오는 거 보고 기획팀장님한테 소리 질렀다니까. 미친놈 들어왔다고. 어, 애들 들어온다.”

하나둘, 인턴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인턴들을 보고 회의실 앞에서 교육 자료를 준비하던 한수철이 소리쳤다.

“인턴십 하시는 분들, 빨리 빨리 들어옵니다.”

“네! 알겠습니다!”

“착석해서 교육 자료 미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넵! 선배님!”

천장까지 어깨가 올라간 한수철과 군기가 바짝 든 인턴들의 대화를 보자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겨우 참았다.

탁기준이 한수철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한수철 저 똥폼 어떡할 거냐.”

“선배보다 훨씬 덜한데요, 뭐.

“내가 저랬다고?”

탁기준이 기댄 벽에서 등을 떼어냈다.

0